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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잊혀진 세월, 1950년 대 - 1

내 이름은 형도다.

다섯 살 때 부산으로 피난 온 우리가족은 변두리 천변川邊동네에 살았다. 임시수도 부산시는 동네공장 마당에서 이따금씩 활동사진을 상영해주곤 했다. 국정홍보용 뉴스 위주고 영화는 곁다리였지만 그래도 인기였다.

각각 6살, 10살 손위인 두 형은 그때마다 핫바지 방귀 새듯 슬며시 사라지려했지만 울며불며 따라붙는 불감당의 물귀신, 막내를 데려갈 수밖에 없었고 돌아올 때면 잠든 나를 업고 오는 고역을 치러야 했다.

동네 천막교회에 가면 성경 팜플렛을 주었다. 하지만 글자도 모르는 꼬맹이들은 그걸 딱지쯤으로 여겨 누가 더 많이 모았나 겨루곤 했다. 장난감이라곤 구경조차 어렵던 가난한 시절의 풍속도.

 

인구 40만의 부산은 몰려든 피난민 덕분에 터질 듯 부풀었고 천막촌과 판자집이 온 사방에 들어섰다. 지난 시절의 인습이나 타성 따위는 벗어던져야 살아남는 치열한 세월의 부산은 이 잡다한 군상들을 버무려 녹여내는 용광로였다. 엄청난 물자와 새로운 문물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었고 모든 생계는 전쟁 그리고 미군물자와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었다.

2차 대전에서 한몫 챙긴 고래들이 냉전의 최전선, 한반도에서 맞붙자 틈새에 낀 새우들 등만 터지는 판이었다. 이데올로기 대결의 현장, 한국전쟁에는 세계사적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등이 터진 새우들에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피난살이의 애환을 노래한 이별의 부산 정거장, 그리고 이산가족의 눈물을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 따위를 들으며 고달픈 나날을 이어갔다.

그 시절의 김수영 시인은 부산 포로수용소 제14야전병원에서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도 개켰다. PX가 된 명동 동화백화점에도 취업해 생계를 꾸려갔다. 박수근이 미군 초상화로 생계를 유지하고 박완서가 가족을 먹여 살린 곳도 PX였다. 초상화를 원하는 미군과 화가를 이어주는 일. 콧대 높은 여대생 박완서는 추레한 모습의 화가들을 김씨, 박씨 등으로 불렀는데 그 박씨가 화단에 큰 족적을 남긴 박수근 화백이었다.

 

피난시절 기억의 끄트머리는 서울행 기차 풍경이다.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던 사과궤짝 좌석의 기차는 깨진 창문을 군용우비로 가리고 칙칙폭폭 달렸다. 굴을 지날 때마다 굉음과 매캐한 연기에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야했고 콧구멍은 검댕이로 시커메졌다. 새벽녘에 부산역을 떠난 기차는 역마다 서고 역이 아닌 곳에도 무시로 서면서 한밤중이 되어서야 겨우겨우 한강철교로 들어섰다. 반나마 찢어져 펄럭이는 판초우비 사이로 우당퉁탕 창문을 스치던 시커먼 쇠기둥들이 서울의 첫 인상이었다.

우리 식구는 혜화동에 둥지를 틀었다. 혜화동 로터리의 성당에는 보트 그네가 있어 또래들과 툭하면 우르르 몰려갔다. 늘 비어있던 - 아! 그곳은 왜 비어 있었을까? - 놀이터 옆 인기척 드문 담장 안에는 수녀님들이 산다고 했다. 그곳은 갈멜 수녀원이었고 그 성당 사제가 훗날의 추기경, 김수환 신부였다고 들었다.

 

수돗물 나올 시간이면 꼬맹이들은 양동이를 챙겨 공동수도 앞에 길게 늘어선다. 북새통이 되고 새치기도 나타난다. 그럴 때면 골목대장 진국이가 군기반장으로 나선다.

“쟤네 엄마 아프시잖아.” 따위 이유를 주워섬기며 유독 여자애들만 역성드는 녀석이 우린 눈꼴시었다. 하지만 중학생 진국이의 카리스마에 도전할 용기는 우리들 누구에게도 없었다.

학교 건물이 미군 막사로 징발된 이웃학교 효제는 우리 학교와 교사를 함께 사용했다. 그래서 한 교정의 두 학교 아이들은 툭하면 대결을 벌였다.

“효제, 효제, 거으지떼들아, 까앙통을 옆에 차고 혜화학교로..., 헤이!”

놀려대면 녀석들은 분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렇다. 그 가난한 세월에도 우린 결코 주눅 따위는 들지 않았었다. 그건 혜화동에서 안국동에 이르는 길 곳곳에서 따뜻한 시선으로 개구쟁이들을 지켜본 어른들 덕분인지도 모른다. 독립한 조국의 첫 세대를 만감 어린 눈길로 묵묵히 바라보던 노인들은 당시 서울거리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시간은 미래로 흐르는가? 그렇다고들 한다. 하지만 간혹 뒤집힌다.

역주행은 미래기억이 과거로 전이되면서 일어난다. 우주공간 어딘가에 어느 날 블랙홀이 열리듯 은밀히 일어나는 해프닝. 여하튼 흔한 일은 아닐 그 전이가 일어난 것은 서울로 온 바로 그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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