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를 향해 1
일레인은 걱정스런 눈길로 강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강을 건너 간 게 한참 전이었다.
“걱정되냐?”
카를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일레인은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속내를 전부 감출 수는 없었다.
“괜찮을 게다. 강한 녀석인 거 너도 알지 않냐.”
카를도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이미 감정이 목소리에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말은 일레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괜찮을 거라 되뇌이고 또 되뇌이며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로시크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모두가 불안해 하고 있었다.
정령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일행의 불안한 마음이 그녀에게도 전해져 왔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며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일행을 챙기던 정령의 시선이 갑작스레 경계 쪽을 향했다.
경계 안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로시크는 곧바로 정령에게 마력을 흘려 보냈다.
그녀는 바람을 끌어 모아 일행의 앞에 벽을 만들었다.
바로 다음 순간, 경계가 일그러졌다.
콰아아아앙!
굉음이 울려 퍼지고 돌풍이 몰아쳤다.
정신을 차리고 벽을 거뒀을 땐 갈색 속살을 드러낸 대지가 일행 앞에 펼쳐져 있었다.
강은 격렬한 바람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게 무슨···.”
카를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고개를 돌렸다.
로시크와 일레인의 시선은 한 곳에 멈춘 채 움직일 줄 모르고 있었다.
“저쪽에 뭐가···.”
고개를 돌린 카를도 말을 잊었다.
저 너머, 경계로 일그러져 있던 지평선이 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10년 만이었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될 때까지 보지 못했던 바깥 풍경.
카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가 해낸 것이다.
어딘가 미덥지 못하지만 능력만은 확실한 그 남자가 모두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 주었다.
카를은 눈물을 닦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를 찾아야 했다.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진 그와 여우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카를의 딸이었다.
“아저씨! 미호!”
일레인을 둘의 상태를 살폈다.
그레이스에게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그녀의 손길에 미호가 눈을 떴다.
“미호야, 괜찮아? 아저씨는?”
“난 괜찮아. 주인님도 마력이 고갈돼서 그렇지 심각한 상처가 있는 건 아니야.”
“하···, 다행이다···.”
“걱정 했어?”
“아냐, 바보야.”
“아니긴, 히히.”
일레인은 고개를 돌렸다.
머리칼 사이로 엿보이는 귓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괜찮냐?”
조금 늦게 온 카를이 물었다.
로시크는 일레인에게 아무 말도 하지않고 그레이스의 상태를 살폈다.
“마력이 고갈 됐어. 이 녀석, 회복할 때까지 못 움직이겠는데?”
“그래? 내가 업지. 자.”
카를은 그리 말하며 자세를 낮췄다.
로시크를 그레이스를 수습해 카를의 넓은 등에 얹었다.
“아, 제대로 좀 해봐.”
“쯧.”
로시크는 혀를 차고는 그레이스의 자세를 고쳤다.
힘을 잃고 늘어진 손이 흔들렸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고맙다는 말도, 수고했다는 말도 지금은 가슴 속에 담아둬야 했다.
일행은 부드러운 흙바닥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두두두.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흙먼지가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은빛 찬란한 갑주가 햇살을 받아 빛났다.
“가서 확인 좀 해 줄래?”
로시크의 정령이 그들을 향해 날아갔다.
“기사단이래?”
카를의 질문에 로시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이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선두에 선 기사의 말이 크게 투레질을 했다.
*
*
*
다각다각다각다각.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낯선 천막이 보였다.
그레이스는 몸을 일으켰다.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지 온 몸이 뻣뻣했다.
팔을 돌려 어깨를 가볍게 푼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차곡차곡 쌓인 담요가 그레이스의 몸을 받치고 있었다.
‘짐마차인가?’
그는 짐마차의 후미로 가 천을 걷었다.
갑자기 쏟아진 빛에 눈이 부셔 그레이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돌을 깔아 정리한 도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손이 자주 닿는 듯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경계를 뚫고 나오는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레이스는 몸을 돌려 마부석 쪽으로 갔다.
천을 걷자 익숙한 꼬리가 보였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호.”
“어. 깼어?”
미호는 네 개의 꼬리를 살랑거리며 그레이스를 보고 미소 지었다.
“아저씨.”
“오냐.”
미호의 옆에는 로시크가 앉아 있었다.
한참 앞에는 그의 정령이 날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쭉 빼고 주변을 살폈다.
카를과 일레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걔넨 기사단 본대랑 먼저 갔다.”
로시크의 말에 그레이스는 무슨 소리인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사단이요?”
“그래. 그 녀석들 데리러 기사단이 왔었어. 급하다고 걔네 먼저 데리고 갔다. 우린 짐마차랑 기사 하나 붙여줄테니 알아서들 오라더라.”
“그래요?”
그들과 관련해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기사단이나 되는 전력을 고작 두 사람을 마중하러 보내는 건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야 귀족 아가씨니까요.”
모르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레이스의 시선이 말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을 향했다.
로시크가 말한 병사인 듯 했다.
시선을 알아차린 병사가 말했다.
“하급 기사인 필립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네. 근데 귀족이라는 게 무슨 얘기에요?”
그레이스의 질문에 필립이 더 놀란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일레인님 얘기죠. 모르셨어요?”
“몰랐어요.”
“저 같은 평민 출신 기사로는 눈을 마주칠 수도 없을 만큼 높은 신분이세요. 제국에서도 단 세 명뿐인 공작의 손녀시죠.”
그레이스의 머리가 잠시 생각을 멈췄다.
설마 카를이 공작의 자식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그럼 어머님 쪽인가?”
“맞습니다. 공작님의 하나뿐인 따님이셨죠. 그분이 평민 출신의 기사와 사랑에 빠져 황도를 떠난 건 저희들 사이에선 아직도 유명한 러브스토리랍니다.”
“와···. 로시크 아저씨, 알고 있었어요?”
그레이스는 로시크에게 물었다.
그는 별 소릴 다 한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당연히 알지. 걔네 도망 나올 때 도와준 게 나였어. 몰랐구나?”
“아니···, 와···.”
앞에서 날고 있던 정령이 그레이스를 보고 쿡쿡 웃었다.
그녀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먼저 데려갔군요.”
“그렇지. 공작이 손녀 보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는 모양이야. 기사들이 공작의 명령이라고 어찌나 재촉을 해대던지. 너 데리고 가겠다는 애들 고집을 다 꺾더라.”
“하하.”
그레이스는 그저 웃었다.
고집을 부리면 꺾이는 법이 없던 부녀를 데려갔다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급했던 듯 했다.
제발 좀 가자고 애걸복걸하는 기사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보다 너 몸은 괜찮냐?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네, 이제 멀쩡해요. 마력이 모자라기는 하는데 이거야 좀 지나면 회복하니까요.”
“그래. 다행이다. 거기 구석에 보면 간식거리 좀 놔뒀다. 먹고 더 자.”
“네.”
짐마차 구석에는 주머니와 병이 놓여 있었다.
쿠키와 우유였다.
그레이스는 쿠키를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실컷 먹고 마시자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몸이 휴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로시크에게는 문제 없다는 듯 말했지만 지금 그의 몸에는 최소한의 마력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지금은 푹 쉬는 게 가장 급한 일이었다.
그레이스는 담요 더미에 다시 몸을 뉘이고 눈을 감았다.
‘아, 맞다. 칼···.’
폭발의 여파를 막아내고 사라진 검이 생각났다.
마지막 순간 마력을 쌓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선혈의 달은 산산이 부서졌다.
빛이 되어 사라져가던 게 그가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좋은 검이었는데···.’
풀썩.
갑자기 묵직하고 폭신한 것이 그의 위에 누웠다.
눈을 뜨자 새하얀 털이 보였다.
“너도 자려고?”
“응.”
“그래, 자자.”
따스하고 포근한 감촉에 그레이스의 숨도 잦아들었다.
어느새 둘은 잠의 바다로 가라 앉아 있었다.
식사 때가 되면 로시크가 둘을 깨웠다.
식사를 마치면 뒷정리를 하고 다시 잠을 잔다.
며칠 동안 그런 생활이 반복되었다.
창백했던 그레이스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아왔다.
*
*
*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필립은 마차 안을 보며 말했다.
“오늘은 저 마을에서 쉬어 가겠습니다.”
일행이 탄 마차가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마차를 향했다.
제국군의 마크가 그려진 천막을 두른 마차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필립은 넉살 좋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아···, 음. 매일 하는 일인 걸요. 별 거 아닙니다. 근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오늘 여기서 묵어갈까 해서요. 촌장님 댁이 어디죠?”
기사가 그들에게 친근하게 대하자 사람들은 경계하지 않고 그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일행은 사람들이 가르쳐 준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마을 한 가운데 위치한 촌장의 집은 사람이 머물고 가기 편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레이스는 집의 규모에 감탄했다.
“크네요.”
필립이 웃으며 그레이스에게 설명을 했다.
“그야 사람이 묵어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죠. 제국의 관리인 촌장이 업무 중인 제국의 기사를 챙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라고 세금으로 봉급을 주는 것이죠.”
“호오···. 일반인이면 어때요?”
“돈을 받지요.”
그레이스는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사람을 대하는 일 자체가 촌장의 업무라면 저런 집을 가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마차가 촌장의 집 앞에 멈추자 문이 열렸다.
집에서 나온 청년이 필립에게 인사를 건넸다.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님. 들어가 쉬시지요. 제가 말과 마차를 정리하겠습니다.”
“아, 부탁 할게요.”
청년에게 고삐를 넘긴 필립은 일행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인이 일행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방은 2층에 준비해 뒀으니 원하시는 방을 쓰시면 됩니다. 식사 준비가 끝나면 모시러 가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가볍게 답한 필립은 2층으로 올라갔다.
일행도 그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그레이스는 아래를 돌아보며 말했다.
“뭔가 되게···.”
“사무적이죠? 어쩔 수 없어요. 저 사람에겐 이것도 일이니까요.”
“아하···. 해야만 하는 일이라 저런 반응이군요.”
“네. 그냥 방에서 푹 쉬고 아침에 빨리 떠나주세요 이런 느낌이죠. 저도 빨리 떠나는 게 좋구요. 정해진 일자 이상으로 머물려면 써야하는 서류만 몇 장이며 사비까지 털어야 하거든요. 진짜 깐깐해요. 가뜩이나 지갑 얇은 기사들한테도 뽑아 먹으려고 하고.”
“와···.”
계단을 오르는 필립의 그림자가 실내등에 길게 늘어졌다.
그의 뒷모습에서 직장인의 쓸쓸함이 느껴지는 듯 했다.
일행은 방을 하나씩 골라 잡았다.
“그럼 푹 쉬시고 저녁 식사 때 뵙겠습니다.”
필립이 인사를 건네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좀 이따 보자.”
로시크도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레이스는 미호를 품에 안고 방문을 열었다.
“들어가자!”
“그래. 너도 좀 씻자. 털에 먼지가 껴서 회색 여우가 됐어.”
“그래? 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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