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422화-혈문(血聞)(6)
"이래저래 인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애석하게도 10년 사이에 있었던 일은 전부 인간과 관련되었던 일이었지. 화초에 물을 주고 이 정원을 가꾸는 일밖에 할게 없는 내 10년의 시간이 어긋난것은 단 두번뿐이었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무말도 없이 어디론가로 향했다.
"어딜가는거야?"
"오늘의 정원 정리는 아직이거든 해서, 겸사겸사 정리를 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해주지."
정원에 들어가자 마치 거대한 숲을 보는것 같은 밖의 흑백세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광경이 눈앞에 드러났다. 단순하게 생동감 있다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다. 웨이즈가 가꾸는 정원은 흡사 살아서 움직일것 같은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워낙에 게으름뱅이어서 말이지. 언젠가는 이녀석들이 내 일을 대신 할수 있도록 기르고 있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웨이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정원이 그의 말을 대신 해주는 것처럼 소리로도 감각으로도 그의 위치는 파악할수가 없었다.
"10년전 나는 이 정원을 가꾸다가 한번 실수를 해버렸어. 이녀석들이 살짝 폭주를 해버리는 통에 가지고 있었던 영석의 파편을 잃어버렸지. 바람의 힘이 조금 필요한 탓에 그 힘을 빌리고 있었거든. 거의 끝나갈 무렵쯤에 이녀석의 난동으로 인해서 나는 그 물건을 잃어버리고 말았지."
'라질의 이야기다.'
벤하르트와 레니아는 동시에 시선으로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제룽에게는 풍령석의 파편을 찾는것을 시켜두었는데, 때마침 누군가가 이곳으로 들어왔지. 그때 당시에는 수백년만에 한번 침입을 허용했던 터라 조금 놀라버렸지. 그리고 들어온 그 남자는 곱게 돌려 주었어."
"어째서? 그 남자가 풍령석의 파편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그 말대로 그 남자는 이곳에서 풍령석의 파편을 가지고 갔지. 하지만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이곳은 아무렇게나 들어올수 있는 곳은 아니니까, 정해진게 있다면 마치 운명처럼 흘러가게 되어 버리는거야. 그가 풍령석의 조각을 훔쳤고,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저 그것뿐인 이야기라는것이지."
"엄청난 적당주의로군."
레니아는 못마땅하다는 태도를 보이며 이야기했다. 매사에 꼼꼼하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웨이즈의 성격을 확실하게 찬동할수는 없었다.
"적당히 라는건 나쁘지 않아. 이것으로 인해 내가 손해를 보게 된다면 그야 안좋은일이고 나쁜일이겠지만,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만큼 좋은것은 없지. 적당히라는것은 파고들지 않는다는점이지만, 역으로 말하면 최소한의 적당히는 해주어야 한다는것이야. 그러니 죄책감도 없고,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생물들은 적당히 살아가고 있는거거든."
"뭐 그건에 관한건 좋아. 그래서?"
"어쨋든 그것이 내가 처음 속았던 일이다. 속은것을 안건 그 남자가 이곳의 밖을 나가고 난 후의 일이었지. 그 뒤로 나는 인간들이 쉽사리 이곳의 물건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제룽을 더 강화 시켰어. 그리고 애초에 이곳으로 범접하지 못하도록 마수들을 꾀어 내기 시작했지."
그 말을 듣고 벤하르트는 제룽이라는 괴물이 어째서 그정도로 강력했는지에 대한 의문점이 풀렸다.
"경계 너머의 마수들을 그렇게 포진 시켜 놓아도 들어오는 사람은 들어오게 되어 있더군. 두번째는 기묘한 한쌍이었지. 한명은 나름대로 괜찮게 생긴 여자였고 한명은 남자였다. 둘은 길을 잃었다고 했지만, 글세 실제 길을 잃었는지 잃은 척을 했는지는 정확하지는 않아. 어쨋든 둘은 나에게 하루의 대접을 받고 멋드러지게 영석을 빼앗아 갔지."
"어떻게?"
"글세. 잘 모르지만, 뺏긴 마당에야 별로 알고 싶지도 않군."
"당신은 파수꾼이잖아."
그녀는 어이없어하면서 말했지만, 그에 대답하는 쪽은 여전히 흐르는 구름같은 느슨한 어조였다.
"그렇지."
"뭐 됐어. 그때 빼앗긴 영석은 어떤 영석이지?"
"빙령석.? 아니면 수령석..? 어느쪽이든 상관 없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세계의 돌을 나는 그날이후로 잃어버렸다."
레니아는 몸을 살짝 웅크렸다. 벤하르트와 레니아는 별로 재산의 분담 같은것을 좋아하거나 하는건 아니었지만, 영석의 경우는 레니아가 가지고 있는것이 더 나았다. 기와 마법의 특성상 나름대로 자유도가 더 높은 마법쪽이 영석을 다루는것이 더 능숙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번을 속고나니 이제는 인간에 대해서는 불신의 경지에 까지 이를것 같게 되어 버렸지. 뭐 같은것이라 실제로 불신하는건 아니지만,"
"영석이라는것을 잃어버렸는데도?"
"세상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아.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이곳의 물건을 지킬 테지만, 그 전부를 확실하게 지킬 필요는 없어. 속은건 분명 내 잘못이고 아쉬운 일이지만, 그런 사소한일을 가지고 인간 전부를 매도하는것이야 말로 웃기는 노릇이지. 없어지거나 사라질 물건은 언제고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사라지게 되어 있다. 반대로 사라지지 않을 물건은 손을 떼고 있어도 사라지지 않아. 정도의 차는 존재하지만 말야."
"그건 그렇고, 풍령석은 파편이었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현재 이곳에는 풍령석이 있는거야?"
"있다면?"
느슨한 말투였지만, 벤하르트와 레니아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있다면, 그래 조금 노려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레니아!?"
벤하르트는 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당황했다.
"이쪽은 별로 적당하지 않아서 말야. 있으면 있는데로 최선을 다할거거든."
"직설적이라 좋구만, 능구렁이같이 속일 계책을 짜는것보다 훨씬 시원시원하고 좋아. 뭐 그렇다고 해도 이제 풍령석은 이곳에 없어. 없어진지도 한참 되었지. 처음에 말했었지? 수백년만에 침입을 허용했다고, 그 이래 라는 말을 만든 수백년전에 풍령석은 이미 다른 사람이 가지고 떠났지."
"그것도 도둑맞기라도 한거야?"
"성심것 대화하고 확실하게 내가 직접 건네주었지. 그녀석은 도둑질을 하기에는 융통성이 없는 녀석이었어. 그 점이 마음에는 꽤나 들었지만,"
"그게 누군데?"
레니아는 영석을 가져갔다는 사람의 이름을 알기 위해 물었지만 웨이즈는 그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질문은 분명 10년치의 이야기가 아니었었나? 마지막은 너희들의 긴 이야기에 대한 조금의 성의를 보여주긴 했지만, 여기까지가 한도점이다."
'쓸데없는데서 깐깐하기는.'
"네 그 쓸데없는 질문때문에 한가지 더 이야기가 있었지만 못들려주게 되어버렸군. 영석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뭐!?"
당황해하는 레니아를 무시하고 그가 말했다.
"그럼 질문은 다 된것 같고 가볼까?"
어느샌가 벤하르트와 레니아의 뒤를 점하고 있는 웨이즈에게 그들은 오랜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웨이즈의 뒤를 따랐다.
"별다른 의도를 가진건 아니고 그냥 질문입니다만, 왜 여기서 무엇을 지키고 계신 겁니까?"
"생각한지 꽤 되서 까먹었다. 그저 윗사람의 명령에 따르고 있을 뿐이야. 정신이 부서지지 않도록 내식대로,"
"정신이 부서진다니 그건 무슨뜻이죠?"
"그것도 어차피 길지 않아. 신경쓸 필요는 없다네. 벤하르트 하르크."
영문 모를 답변을 하면서 웨이즈는 처음 들어왔던 입구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안내하는 도중 벤하르트가 물었다.
"마수들은 어떻게 끌어 모으셨습니까?"
"이곳에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물건들이 많지. 기적의 산물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영석따위는 애들 장난감과도 같을 정도의 물건이야. 그것들중 다른 장난감으로 마수들을 꾀어 냈지."
"꾀어 냈다고 한다면 마수를 만들어낸게 아니고 어딘가에 있는 마수들을 데리고 왔다는 건가?"
"그래. 이곳은 너희가 말하는 차원과는 또 다른 곳이지만, 너희식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음음."
웨이즈는 근처의 풀을 살짝 만지고 골똘히 생각하다 말했다.
"그래 북쪽 경계를 넘어서게 되면 마수들이 이곳과는 전혀 다를정도로 많거든. 그쪽의 마수를 끌어다 쓰는거다."
"저희는 엄밀히 말하면 침입자입니다만, 한가지 말하고 싶은게 있습니다."
"말해봐."
반쯤 감긴 눈으로 웨이즈가 말했다.
"아까전 이야기 했었지요. 없어질 물건은 무슨 짓을 해도 없어지게 되어 있다고, 반대로 없어지지 않을 물건은 행동하지 않아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그렇지."
"그렇다면 이곳을 어떻게 지키던 그것에 대해서는 상관 없지만, 밖의 마수는 치우는게 어떻습니까? 마수때문에 사람들도 피해를 보고 있고,"
"인간들이 어떻게 되던 나는 관계 없다. 벤하르트 너는 적당주의를 착각하고 있어. 적당주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아니야. 연연하지 않을뿐 내가 할일은 꼭 해야 한다는거다. 그렇게 했음에도 빼앗겼다면 그 건에 대해서는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하지만 애초부터 행동하지 않는게 아닌 것이지."
"....."
"인간이란 역경을 잘도 헤쳐나가거든. 이곳으로 들어오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이정도는 알아서들 적응하게 되어 있어. 실제로도 네가 생각하고 있는것보다 더 빠르게 인간은 적응해나가고 있지. 여러가지 의미로.."
그 말에 벤하르트는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반면에 레니아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의미?'
"속으로 얼마든지 욕을 해도 상관 없다. 이런 마음가짐이 적당주의라는 거지."
"편한 사고방식이로군요."
"그래. 아주 제멋대로의 사고방식이지."
그런 말을 하는 웨이즈의 얼굴은 살짝 슬픈 기색이 감돌았다.
"마수는 당신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거지? 그렇다면 굳이 마수들이 수그러들기를 기다리는게 아니라 당신이 길을 만들어 줄수도 있는것 아냐?"
"말해두지만 나는 쫓는것도 쫓지 않는것도 하지 않거든. 애초에 이미 스스로를 침입자라고 밝힌 너희들에게 굳이 길을 터줘야 할 의무는 없다네. 너희들을 잡지도 않지만 도망치는것을 장려하지도 않아."
"그렇군. 알것 같아 당신의 논리."
"알아줘서 고맙다고 해두지. 전(前) 약신 레니아."
그는 하품을 하면서 다시 가꾸어놓은 거대한 입사귀 쪽으로 걸어가 누웠다. 그런 그를 레니아는 약간은 동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마수를 뚫는건 우리가 하도록 할게."
"그래. 나가는 방법은 알고 있겠지?"
레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품안에서 무언가가 흘러 내렸다.
"어..?"
레니아는 다급하게 놀랐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가 흘린것은 고이 간직해뒀던 영석을 둘러 놓은 천이었던 것이다.
"벤!"
"음? 왜?"
느긋하게 묻는 벤하르트와는 다르게 레니아는 영석을 쥐어 품안에 넣으면서 소리쳤다.
"빨리 도망쳐!!"
"실수를 하면 안되지. 레니아. 그걸 내가 '보아버린 순간' 나는 너희들을 잡을수밖에 없게된다."
지금까지 연신 게으르고 금방이라도 쓰러져 잠들어 버릴것 같은 눈에 섬뜩한 살기가 머물렀다.
'실수라고? 아니 이건 그런게..'
웨이즈가 내뿜은 살기에 벤하르트는 칼같이 몸이 반응해 레니아를 안아 들고 달렸다. 몸상태는 최고조 마수를 피해 달아날때보다도 훨씬 더 빠르게 그의 다리는 움직였다. 삽시간에 웨이즈의 거처에서 나온 그는 흑백공간을 내달렸다.
"정신력이 뛰어나군. 이정도로 능숙하게 이 공간을 다룰수 있는 사람은 드문데 말이지."
"웨이즈!?"
공격에 힘을 쓸수도 없을정도로 전력을 다리에 투자한 벤하르트를 웨이즈는 가볍게 따라붙고 있었다.
"왜 쫓아오시는 겁니까?"
"영석 때문이지."
"이건 저희가 모은겁니다. 이곳에서 훔쳐낸게 아닙니다."
"그런가? 확실히 그쪽의 지령석은 그럴지도 모르지만, 빙령석은 본래 이쪽에 있었던 물건이다. 설사 너희가 훔친게 아니라고 해도 '알아버린이상' 나는 그것을 되찾아야만 하는거다."
웨이즈의 무덤덤한 공격을 벤하르트는 반사적으로 피해냈다. 그러자 그 공격이 향하는 방향에 나무가 무너져 내렸다.
"벤 내려줘."
레니아는 스스로가 있으면 불리하다는것을 알았기 때문에 벤하르트에게서 떨어졌다.
"너무하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너희들이 별것 아니라 생각한 그 '적당주의'는 바로 이런것이니까,"
상대를 눈앞에 두고도 그는 몸을 푸는 동작을 했다. 그 동작이 너무도 빈틈 투성이였기 때문에 벤하르트는 무심결에 검을 내질렀다.
"아.. 꽤 하는걸 그래."
팔이 떨어져 나가는걸 보면서도 그는 연신 태연자약한 상태였다. 떨어져 내린 팔을 웨이즈는 가볍게 걷어 찼다.
"뭐!?"
날아드는 팔에 벤하르트는 검을 휘둘러 백광의 빛으로 팔을 쳐냈다. 그리고 바라본 웨이즈에게는 언제 당했냐는듯 손이 자라나 있었다.
'무슨..'
"그럼 적당하게 간다."
웨이즈는 가볍게 발을 퉁겨 벤하르트의 지척에 접근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그 동작 하나 하나는 웨이즈의 팔공격이 아니었고, 공격을 가한 풍압만으로도 벤하르트의 몸이 찢겨져 나갈듯한 공격들이었다.
'상대가 안돼.'
웨이즈는 그 엄청난 능력에도 실제로 싸우는것에는 능숙하지 못해 그 점을 파고들어 둘은 나름대로 팽팽한 대결을 펼치는듯 했다. 하지만 웨이즈는 전혀 상처가 늘지 않았고, 벤하르트는 스치는것만으로도 살이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곧 승부는 날것 처럼 보였다.
"벤! 이리로 와!"
"레니아!?"
레니아의 목소리에 벤하르트는 전력으로 달렸다. 하지만 웨이즈는 그런 그를 여유롭게 걸어갔다.
"간다. 놀리지는 마."
레니아는 마지막 힘을 다해 공간이동을 했다.
"어!?"
"레니아.."
"....."
"이곳은 격리된 세계. 전력을 다했다면 모르지만, 그런 미약한 마력으로는 도망칠수 없지."
"잠깐 다가오지마. 알았어. 어쨋든 네가 원하는건 우리가 아니잖아?"
레니아는 품에서 빙령석을 꺼내들었다.
"역시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그래. 굳이 너희들을 괴롭히고 싶지도 않고, 죽일생각도 전혀 없어. 이쪽이 해야 하는건 너희들에게서의 빙령석 회수다."
"줄게.."
"레니아.."
"어쩔수 없어. 이곳에서는.."
그렇게 레니아가 말하자 지진이 일었다. 아니 지진과 비슷했지만, 그것은 웨이즈의 세계가 찢겨져 나가는 소리였다. 흑백의 세계의 하늘에는 검은 균열이 일었다. 그리고 그 틈에서는 붉은 줄이 날아들었다.
"음?"
"어?"
그 줄은 벤하르트와 레니아를 동시에 묶어 데리고 나갔다.
"이정도면 됐겠지. 역시 적당주의는 참 좋아."
웨이즈는 슬픈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나무위에 누워 균열을 메꿔나갔다.
- 작가의말
요즘 밥을 안먹고 살다보니 무리를 하나 너무 어지럽습니다.
나름 잘 쓴것 같은데 마음에는 전혀 안듭니다. 뭔가가 부족하고 빼먹은것 같아서요. 너무 찜찜하네요. 부족한게 있다면 추후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떡밥을 회수하거나 하는 과정으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좋은 주말 보내세요~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