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417화-혈문(血聞)(1)
그날 이후로 레니아는 상인들과의 접촉을 피했다. 한창 달아오를것만 같은 무렵에 벌어진 일인지라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개중에는 꽤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들 마저도 있을 정도여서 그들은 여행을 서두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이곳 탄티노 도시에서 북쪽으로 수일을 걸어서 북쪽의 경계지역으로 가는거지."
지도를 가리키며 벤하르트가 말했다.
"길이 조금 험한것 같은데?"
"어 그렇지? 뭐라 해도 산맥이니까 말야. 새삼스럽지만 노시엘트 산을 오르면서 진짜 죽을뻔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새삼스럽네. 어차피 죽기 위한 장소를 찾기위해 오른 주제에 말이지."
"하하. 아픈 구석을 찌르기는,"
약간은 뒤끝있는 어투로 벤하르트가 말했다.
"북쪽 경계를 끼고 있는 산맥은 경계를 이전에도 말했던 경계를 구분짓고 있어, 네가 있었던 곳은 연장선상이기는 하지만 노시엘트 산맥도 마찬가지로 산맥을 따라 나누고 있어."
"그러고 보면 나도 새삼스러워. 노시엘트에 살면서도 그런것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까 말이지. 저 편 너머에는 뭐가 있는지 알려들려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분명 그랬기에 나는 엔쿠라스를 찾으려고 바락바락 악을썼던것일지도.."
"새옹지마 같은 건가?"
"오오. 그런 말도 알고 있는건가?"
"뭐야 그정도로 날 무시하고 있는거냐. 이래뵈도 사회인 90년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이정도야 기본이라고,"
"뭐 그렇지."
너털웃음을 지어보이고 레니아는 눈앞에 있는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벤하르트와 레니아는 탄티노 도시에서는 상당한 유명인이었다. 레니아의 경우는 그 특출난 외모와 일전 얼마간의 일때문에, 벤하르트의 경우는 레니아때문에 덩달아 유명해진 경우였다.벤하르트의 경우는 신상을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레니아와 결부시켜 그녀를 속인 악한이나 그녀의 시중을 드는 사람 정도로 굉장히 폄하된 평가를 받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쪽의 두분."
"음?"
3보나 벌어진 거리에서도 물씬 피어나오는 술냄새에 레니아는 자연히 손을 코로 가져갔고 벤하르트는 그들을 부른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디에서나 볼수 있을 법한 평범한 중년의 남자였는데, 축 늘어진 살에 술기운에 붉게 달아오른 코는 그가 만취상태라는것을 짐작케했다.
"혹시 경계 지역에 갈 생각인건가?"
"그렇습니다만,"
"흐음. 술 한잔을 산다면 멋드러진 정보 하나를 알려주도록 하지. 어떤가?"
레니아는 미간에 인상을 팍 썼지만 벤하르트는 넉살좋게 나름대로 낼수 있는 금액의 술을 남자에게 사 주었다.
"통도 크군 그쪽의 까탈스러운 여인과는 전혀 달라."
"뭐야!?"
"자자.. 레니아 참으라고,"
"성격도 불같군. 얼굴이 반반하니까 남자가 져주고 사는구만 그래."
"뭐 뭐라고?"
"저기. 그런 말은 조금 자제해주시고, 술을 드렸으니 정보라는것을 알고 싶습니다만,"
축 늘어진 주정뱅이는 술냄새 풍기는 입김을 하 하고 레니아에게 불었다.
"푸후.."
"이 주정뱅이를!"
"참으라니까,"
마력으로 강화한 레니아를 막느라 벤하르트도 상당히 진을 뺄수 밖에 없었다. 진심은 아니겠지만,,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리는 손에 힘을 줄수 밖에 없어 나중에는 레니아가 진심으로 이러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였다.
"자네 이런 이야기를 아나?"
"무엇 말씀이십니까."
"사람은 술만 마시게 되면 죽게 된다는것 말일세. 술기운이 너무 독해서 말야."
한껏 트림을 해대고 남자는 죽을상을 했다. 벤하르트는 흘끔 술을 보았다. 그다지 도수가 높지 않아 취할리도 없었건만 남자는 완연히 취한 사람 같은 행동을 보였다.
'어쩔수 없지.'
"그럼 안주까지는 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벤. 어째서 이런 녀석에게 돈을 쓰는거야? 이녀석은 그저 단순한 주정뱅이일 뿐이라고,"
눈앞의 주정뱅이는 레니아의 말 그대로 별다른게 없는 평범한 중년인일 뿐이었다. 벤하르트와 레니아가 마음만 먹는다면 한손가락으로도 혼내줄수 있을만큼의, 레니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벤하르트는 전연 다른 생각을 했다.
'역시 아까는 일부러 였다는 건가. 칠 생각도 없었으면 왜 그렇게 힘을 준거냐고, 서로가 기운 빠지게,'
"벤. 듣고 있어?"
"그래."
"어째서 이런 주정뱅이의 상대를 해주는거야?"
"아가씨는 말이 너무 험하시구만,"
마른 안주를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으면서 처음 말을 거는 상태로 돌아온 주정뱅이가 말했다.
"전혀 심하지 않아. 당신에 한해서는."
주정뱅이는 벤하르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청년이여.. 바다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구만,"
능글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그는 레니아를 보면서 웃었다.
"이이이.."
레니아는 진심인지 거짓인지 살짝 울그락 불그락거렸다.
"뭐 좋구만, 재밌는 아가씨였어."
주정뱅이가 손을 뻗어 레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들자 벤하르트는 그의 손을 툭 쳐서 궤도를 바꾸고는 말했다.
"이제 슬슬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만,"
"오호. 재미있구만, 어쩌면 도시를 달군 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포기해야 겠군. 술에 안주 이정도면 충분히 댓가는 받은 셈이니까,"
"당사자를 앞에 두고 참으로 건방진 이야기를 늘여 놓는구만,"
레니아는 투덜였지만, 아까같이 화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좋아. 그렇다면 아까 말한 정보라는것을 알려주도록 하겠네. 별다른건 아니지만, 혹시 경계지역에 가고자 한다면 언제쯤 갈 생각이신가?"
"사흘 안에는 출발을 할 생각입니다만,"
"그럴것 같았지. 하지만 그건 자제하는게 좋을걸세."
"어째서입니까?"
"북쪽 경계에 가까워 질수록 마수가 많아진다는것은 알고 있겠지? 지금 이맘때는 한창 마수가 들끓는 계절이지."
술을 한번 들이키고 안주를 입에 털어 놓으면서 주정뱅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마수가 많아서 지금 가지 않는게 좋을거라는..?"
"그럴리가! 물론 경계지역으로 가는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네. 왠만큼 힘있는 사람들도 반쯤은 병신이 되거나 죽는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나곤 하지. 하지만 그런 일로 막거나 한다면 그거야 말로 웃긴 노릇이지. 애초에 마수가 두렵다면 경계지역을 갈 의미도 없고,"
"그렇다면 어째서?"
"마수가 상대적으로 들끓는 이때는 '피먹이 마수'가 튀어 나오는 모양이야. 그리고 그것은 경계지역을 다니는 사람들 말로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하더군."
"피먹이?"
"그렇다네. 역시나 몰랐던 모양이지? 그렇다면 술과 안주에 대한 값은 다 치른것이나 다름 없겠군. '더 이상은 알려주지 않아도 되겠어.' 피먹이 마수는 겨울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반년 정도 느긋하게 쉬는것도 나쁘지는 않을게야. 명심하게 나는 가지 말라고 경고했으니,"
주정뱅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슬금슬금 레니아에게로 다가가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완벽한 정권이 그의 배를 가격했다.
"끄으으. 정보도 알려줬는데 너무 하지 않은가."
"시끄러워. 그런 조잡한 정보에 이런 고급술과 고급 안주를 대령한 벤에게 고맙다고나 하는게 좋을걸."
"별로 좋지는.."
레니아는 신경질적으로 그가 웅크리고 있는 머리 옆을 다리로 쿵쿵 굴렀다.
"가자 벤."
"정보는 고마웠습니다."
"하하 다음에도 기회가 되면 술이나 한잔 사주게."
벤하르트는 그럴일은 없을거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술집을 나섰다.
"위험 분자라.."
"무시하는게 나아 그런 주정뱅이의 헛소리는."
여관으로 돌아오면서도 레니아는 연신 주정뱅이에 대해서 투덜 투덜 거렸다.
"하지만 맞는다면? 맞을 가능성도 부인할수는 없지. 나도 별로 믿기지는 않지만, 사실 안 믿기지도 않아. 사실이어도 전혀 이상할게 없지."
레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말야. 그 이야기 자체도 별로 신빙성이 느껴지지 않아. 생각해봐. 반년이라고? 겨울? 사실 겨울이 더 위험스러워 보이지 않아? 내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이건 나를 탄티노 도시에 더 머물게 하려는 상인의 수작이 아닐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렇게 말하려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맞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게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레니아와 고작해야 하루를 놀기위해 거금을 사용했던 상인이 이런 짓이라고 못할리 만무했다.
"에이 그래도 그렇게 떨어질까,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이 진짜 그 위험이라는게 있을수도 있는거잖아."
"아니 그럴일은 왠지 절대로 없을것 같아. 아주 확답은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확신은 가지고 있다고, 그 주정뱅이 자꾸 나를 만지려 하기도 했고, 여러가지 정황을 살펴볼때 내 말이 맞을 확률은 8할을 넘어."
"나머지 2할은?"
벤하르트의 반문을 가볍게 넘기며 레니아가 말했다.
"흥 어쨋든 설사 맞다고 해도 한낱 마수일 뿐이잖아. 너와 나라면 어떻게 안될것도 없지. 아오이스의 놈들이라거나 고야마라거나 마왕이라거나, 그런 것들에 비하면야 고작해야 단일 개체의 마수 정도 별것도 아니잖아? 그저 조금 강한 동물일 뿐이잖아?"
"별것도 아니라고 확답은 할수 없지. 디노사인트의 일을 생각해보라고, 그때도 제로씨가 없었다면 너와 나 트레이야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걸."
"지금은 부지 할걸? 그 배가 와도 끄떡없지."
"뭐 그거야.."
벤하르트도 그 말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때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의 강함은 참새와 독수리 정도로 사실 비교할수도 없을정도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둘이라면 왠만해서는 지지 않는다는거야. 상대는 어차피 마수잖아? 설사 이기지 않아도 도망은 칠수 있지 않느냐는거지."
"하지만 만에 하나."
"만에 하나라니.. 그럴 일은 전혀 없어. 왜냐하면 말야. 나에게는 필살의 기술이 있잖아? 공간이동 마법 말야."
"그건 그렇군. 하지만 말야. 나는 별로 그건 원치 않는데, 따지자면 너한테도,,"
벤하르트는 난처해하면서 말했다.
"아.."
레니아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공간이동 마법을 사용하고 그 반작용으로 널부러진 자신의 수치스러운 모습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가볍게 벤하르트의 턱을 툭 치고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최후의 보루로 말야. 그때는 뭐 느긋하게 요양이나 받지 뭐."
흘끗 벤하르트의 시선을 살피는 그녀의 여전히 얼굴은 붉게 물든 채였다. 벤하르트는 나름대로는 신중한 성격이었지만, 레니아의 말처럼 사실은 그 자신도 나름대로 자신의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렇다면야, 그나저나 왠지 여행을 시작하고 싶어 안달이 나게 보이는데?"
"기분 탓이겠지.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빨리 시작하고 싶은게 아니라 할일이 있다면 쇠뿔도 단김에 빼라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해. 나로써도 경계너머라는곳은 어떨까 궁금하거든. 조금은 흥분해온다고나 할까."
기분 좋은 얼굴로 환히 웃는 레니아를 보며 그는 불안감을 전부 떨쳐 버리고는 말했다.
"그런거냐. 그렇다면 레니아님이 원하시는데로 서둘러 준비해볼까."
"그나저나.. 결국 술값은 날린거지?"
레니아는 뜬금없이 툭 하고 그 말을 꺼냈다.
"뭐야 그걸 꼬투리 잡고 싶어서 이렇게 말한건 아니겠지? 결국이라고 했지만! 그거야 말로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난 과정을 중시하는 남자란 말야."
"그랬지. 예나 지금이나."
둘은 그렇게 잡담하며 다음 여행의 준비를 시작했다.
- 작가의말
엔쿠라스에는 한자가 존재합니다. 사실 안쓰고 있기는 하지만 영어같은 부류도 존재하죠. 그리고 그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만, 엔쿠라스에는 나오지 않을겁니다.
여기에 쓰는 이유는 나오는게 별로 이상한게 아니다. 라는걸 말하고 싶은 것이죠. 저도 판타지를 동서양으로 구분하고 싶지 않다 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중 한명..? 인것 같습니다. 가 아니고 맞습니다.
판타지에 간간히 등장하는 한문명 같은건 왠지 멋나지 않나요? 그래서 전 설정채로 집어 넣어 만들어 버렸지요. 다시 말하지만 엔쿠라스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
어쨋든 (오늘의 사설은 좀 길군요.) 연참대전의 시작을 알리며 앞으로 17화 가량 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별일 없으면 아마 통과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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