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191화-수마행(數魔行)의 탑(8)
"후우 후우."
"졌다."
온몸을 철갑으로 두른 기사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주변을 백색의 빛이 가루 같이 산화하고 있었다. 5층의 수호자를 이긴 벤하르트는 이곳이 왜 수련의 장인지 알수 있을것만 같았다. 각층마다 정해진것이 없는 독특한 각자의 기술을 볼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다. 특히나 얼마간의 안전을 보장하는 자리라면 더더욱. 어지간한 싸움에 미친 자가 아닌 이상에야 실전이랍시고 하는 연습도 한정될수 밖에 없는것이다. 벤하르트의 경우에는 요셉이나 리드 정도가 그러 했을까.
요는 다양한 기술을 경험할수 있는것에 있었다. 한사람으로서 그치지 않고 각 분야를 갈고 닦은 여럿을 상대할수 있다는 것은 분명 굉장한 수련임에 틀림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에 매료 되었다. 3층까지를 오를때는 가슴의 상처 때문에 굉장히 번거로웠지만 4층 부터는 충분한 휴식을 했기에 어느정도 우위를 점하고 상대와 어우러질수 있었다. 개중에는 쉽사리 승부를 볼수 있었던 기회도 있었지만 그는 쉽게 이기지 않았다.
이것을 기회로 조금이나마 더 강해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아.."
6층은 검은 피부에 흰색의 머리를 가진 여자가 상대였다. 검다기 보다는 연한 갈색에 가까웠지만 그녀의 흰 머리칼 때문에 더욱 피부색이 강조 되어서 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상당히 노출도가 심한 옷을 입고 있어서 싸움에 집중하기가 힘들었지만 그보다도 더 움직임은 예측하기가 힘들었다. 기를 사용해 공중에서도 몇번이고 이동할수 있어서 공간의 자유도를 이용한 공격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백광과 검은 그림자가 맞붙었다. 벤하르트의 실력은 흑피의 여인보다는 아주 약간 더 좋은 정도였지만 그것을 알고 있는 여인도 파악하며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쉽사리 승부를 낼수 없었다.
6층에 오른 벤하르트가 상대를 하며 느낀것은 각 층의 실력이 높다고 실력에 비례 하는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1층은 2층이나 3층보다 실력이 뛰어났고 4층은 1층과 비등 5층부터 더 강한 상대가 나왔던 것이었다.
"잠깐."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땅에 착지하며 여자가 말하자 벤하르트는 잠시 멈추었다. 이제는 한두번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날아오는 공격도 여유롭게 검으로 쳐냈다. 처음 일을 생각하자 당한 옆구리가 조금 시려 오는듯 했다.
"식사 시간이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분홍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나왔다.
"식사 시간이에요."
늘어지는 목소리는 싸움의 긴장감마저 서서히 녹여 버렸다. 하지만 그것에 현혹되지 않아야 하는게 바로 수마행의 탑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불의의 습격을 한두번씩 행했기 때문이었다. 실전에 한없이 가까운 대련은 그로서도 바라는 바였다.
"어이 너. 여기는 뭘 원하고 온거냐?"
털털한 목소리로 여인이 물었다. 6층 까지 오르면서 대화 다운 대화를 해본적이 없었던 벤하르트는 그녀의 물음에 입에 음식을 넣다가 빤히 쳐다 보았다.
"뭐야? 물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왔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라. 그정도의 실력이라면 가렌더 부크에 가려고 하는 것이겠군."
"아? 대단하시군요."
"뭐를. 몇년 일하다 보면 자연히 알수 있게 돼. 그럼 시작할까?"
이 짧은 대화가 끝날때 까지 그녀는 벌써 깔끔하게 식사를 비워 버렸다.
"저는 아직 시작도 안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 좋아."
말은 뒤끝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상쾌한 어조 였지만 그녀의 행동은 말투와는 전혀 달랐다. 먹는 중간에도 계속해서 한두번씩 공격을 해 벤하르트는 결국 음식을 들고 이리 저리 이동하면서 먹을수 밖에 없었다.
수면의 시간 다시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곳에 오고 벌써 2일이 지났다는것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탑에는 자체적으로 나오는 빛을 빼고는 빛이 들어오거나 밖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때마다 들어오는 식사가 아니면 현재의 시간이 어떤지 알수가 없었다. 저녁 식사 후 30분 뒤가 취침 시간이라는것을 알아낸것은 바로 어제의 일. 탑이라는것에 맞지 않게 이불과 베개에 몸을 맡기던 벤하르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여인에게 눈을 돌렸다.
"으히익!"
빛도 없는 어둠속에서 백색의 눈이 벤하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빛이 있을때는 몰랐는데 어둠속에서 그녀의 눈은 백색으로 약간의 빛을 내고 있었다.
"아. 놀랐나. 우리 종족은 주위가 어두워지면 눈이 이렇게 빛나게 되어 버리거든.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미안하다."
"아니 놀란건 그것만이 아니라.. 왜 저를 보고 있었냐는 겁니다."
"응? 그게 너 남자잖아?"
벤하르트의 고개가 살짝 갸웃댔다.
'남자가 뭐 어때서?'
"남자는 모두 짐승이거든."
"걱정 하지 마시지요. 당신은 제 취향이 아닙니다. 취향이라 해도 건들것 같습니까?"
"음음."
고개를 연신 끄덕인후 그녀가 말했다.
"그런 말로 안심시킨후에.. 라던가. 거기에 너 지금의 나로는 상대가 불가능하니까 대처해둬서 나쁠건 없지. 아무렴."
"그럼 상대가 여자면 어떻게 됩니까?"
"그냥 자면 되지. 세상에 어떤 여자가 여자를 품고 싶어 하겠어?"
"아니 그거야 모르죠."
젊었을때는 풍문으로라도 여러가지 이해하기 어려운것을 들었기 때문에 조금 나름대로는 비릿한 웃음을 풍기며 벤하르트가 말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마계와 그가 살던곳은 아무래도 달랐기 때문에 자신할수는 없었다. 애초에 들었던 것도 소문이었으니,,
'그래. 그럴리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사람은 사람답게. 그게 제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과 적당히 잘 타협한것 같은 기분이 들어 표정이 만족스러워 졌다. 그런 벤하르트를 보면서 여인은 베개 밑에 놓아 두었던 단검을 배게 옆으로 가져다 두었다.
'표정이 심상치 않으니 더 경계 해야겠군.'
"그런데 안주무실 겁니까?"
"호오, 본색을 들어내는 건가?"
드디어 잡았다 라는 들릴리 없는 그녀의 속마음이 벤하르트에게 확 와닿았다.
"끅. 그게 아니라 내일도 싸워야 할텐데 잠이라도 자두는게 좋지 않을까란 염려 였는데, 마음대로 하세요."
홀로 수근 거리고 노려보는 그녀를 보면서 푸념조로 그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의외로 평상시와 같은 털털한 말투로 그에게 말했다.
"아니 뭐. 남자와 같은 곳에서 잠을 자지 않는것은 내 습관이니까, 오히려 불안에 떨면서 잠을 자는것보다는 훨씬 체력이 절약되니 상관 없어. 그것보다 너야 말로 안자는거야?"
"제가 낯을 많이 가리거든요. 뒤에서 그렇게 두 눈을 치켜뜨고 있으면 잠을 못잔단 말입니다."
"그래? 그럼 서로 안자면 되겠군. 서로 체력을 소진 하고 서로 만족스럽고 서로 마음이 편하게.."
"타당한 답은 아닌것만 같은데,"
"그럼 이야기를 하자. 그냥 서로 살기를 대놓고 뿌리고 경계 하는것보다야 그게 낫겠지? 설마하니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덮치거나 하는 짐승 같지는 않으니까,"
"그러니까!! 전혀 그럴 의도 없다니까요. 아예 그런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자꾸 뭡니까. 마치 조금만 움직여도 짐승이라는 듯한 그 눈초리 하며!"
화들짝 놀라며 그녀는 눈을 깔고 중얼 거렸다.
"아 실수로군. 쓸데 없는 말을 해서 더 위험해 진것 같아."
"이보쇼."
대화를 하는것 자체가 무의미라는것을 깨달은것은 이야기를 시작하고 난 후 얼마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녀 본인이 그런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나는 밤이 되면 피해망상이 심해져서 말이지. 낮의 성격이 주를 이루기는 하지만 때때로 불안해 지거든. 사실은 겁탈 당하거나 한 경험 같은것은 없다네."
"겁...탈..?"
"지 짐승의 눈!?"
"아니라니까요."
투덜거리면서 그는 묻는 말에나 대답하는 선방의 자세를 취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어지간히도 심심했던지 그에게 여러가지를 캐물었다. 누군가에게 모험담을 설명해주는데는 이미 이골이 난 터라 적당히 각색 하고 적당히 부풀리고 적당히 잘라내며 그는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이야기 해 주었다.
"히야. 언제고 한번 가보고 싶은데, 멋진 곳이야."
"뭐 그렇죠."
"그런데 너 말야. 나에게 궁금한 점이라던가 하는것은 없는거야? 아까부터 나만 묻고 있는데, 뭐든 물어 보라고. 대가라고 하기에는 우습지만 대답해주지."
"아니 두려워서 별로 묻고 싶지는 않은데요."
"뭐가?"
"그러니까, 반응이 두렵다는 말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생전 처음으로 그런 취급을 받았다구요. 적어도 제 입장에서는 그런 독설을 듣게 되면 꺼려진단 말입니다."
"독설? 하하 독설이래. 여기에 올라온 녀석들은 많았고 개중에는 인간도 있었지만 이정도 이야기로 독설이라고 하는 녀석은 네가 처음이야. 아 그 목석 같은 녀석은 아예 대화 자체를 거절했었지. 그녀석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목석?"
그 말의 대상은 나우스가 아닐까 생각해 그는 인상착의를 물었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청년이었는데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대화다운 대화를 한적이 없었지 싶은데, 그건 왜?"
'나우스겠군.'
"아 그럼 혹시 이곳을 지나갈때의 사람들을 다 알고 있는 겁니까?"
"사람은 아니지만 그 말뜻을 봤을때 답은 맞다고 할수 있지. 이곳은 평행세계를 잇는 공간이야. 물론 그 생각을 공유하는것은 이곳에 있는 탑 6층의 주인인 이몸이지. 각층마다 전부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동시에 많은 사람이 도전을 하러 온다고 해도. 어딘가에 있는 내가 상대를 해주지. 그리고 하루가 끝날때 그 모든 경험은 이 몸에 다시 축적이 되는거고, 나도 탑의 일원이니 어느정도는 알고 있지만 자세한것은 사실 잘 몰라. 그렇게 되어 있다는것만 알뿐."
"그럼 요셉도 지나갔겠군요."
"요셉? 이름으로 말하면 못알아 듣는데,"
요셉의 생김새를 설명하니 그녀는 박수소리를 내며 알아 차렸다.
"아 그 녀석이라면 하루전에 올라갔지. 굉장한 실력자였어. 한번쯤 제대로 붙어 보고 싶을 정도로.."
"아 음? 저기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했군. 나는 마르티나 라고 해. 너는 왠지 벤하르트 라는 녀석일것 같군."
"뭐뭐 뭡니까? 어떻게 알고 있는겁니까?"
"아 그 요셉이라는 녀석이 중얼 대는 것을 들었거든."
왠지 자연스레 이야기를 하는 듯 해서 벤하르트는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내 이름을 언급하다니, 뭐지?'
"어이 벤하르트 라고 했었지? 가렌더 부크에 사는거냐?"
"아니 그런건 아닌데요."
"그럼 왜 가는건데?"
"말하자면 길지만, 밤도 기니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수마행의 탑의 수면시간은 그렇게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가렌더 부크에 가려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도 끝내고 덧붙혀서 마계에 왔을때의 일도 대충 설명하고 조금 졸고 나니 벌써 6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녀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자 벤하르트도 따라 일어났다.
"어?"
몸이 휘청거렸다. 하루를 안잤을 뿐인데 몸이 굉장히 나른하게 느껴졌다.
"이곳의 한시간은 여섯시간. 즉 쉴때도 한시간을 자면 6시간을 자는것과 비슷한 효과를 내게 되어 있지. 6시간을 자면 18시간을.. 하지만 실제로 쉬는 느낌은 6시간이기 때문에 18시간 같은 지루함은 없지만, 안쉴 경우에는 쉬지 않았을때의 수십시간의 피로가 몰리게 되는거야. 한시간 정도는 쉬게 해줄까?"
'몸이 어지러워.'
그녀는 몸을 수그리고는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한번의 발을 퉁길때 벤하르트가 말했다.
"잠시만요. 역시 조금 쉬어야 겠습니다. 심하네요."
"그래? 좋지만 네 휴식시간에서 까게 될거야."
한시간만 잘 생각이었던 그가 깨어났을때 마르티나에게 들은 시간은 4시간이었다.
"징그럽게도 잘 자더만, 대단해. 보고 말고 할것도 없잖아."
"으음."
말투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분명히 그녀는 쭉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벤하르트가 일어났을때 처음 본것이 그녀의 흑회색 눈이었으니 그 나름대로는 약간 기분이 거북했다. 그녀는 천천히 거리를 벌리고 이제는 적당히 피로가 풀린 벤하르트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생각해보니.. 이건 말해둬야 할것 같다. 밤에 즐거움을 주었으니까 말해줄게."
"음?"
"그 요셉이라는 녀석이 중얼거린것은. 분명 벤하르트 네가 제 시간에 올수 있는가 하는 말이었어."
"아..."
분명 남은 일수는 얼마 남지 않았었다. 수마행의 탑은 1시간이 6시간 1일이 6일인 공간이었다. 아마 그가 생각하고 있는것보다 훨씬 더 시간은 남지 않았을 터였다. 요셉이 먼저 지나갔으니까.. 라는것으로 위안을 삼을수는 없는것이다. 정신 없이 싸우다 보니 그는 이곳의 시간개념을 잊었던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요셉이 있으니까 하는 위안도 분명히 생각하고 있기는 했었다. 요셉이 있을텐데. 하는 믿음보다 불현듯 그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 불안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른채 그는 늦을 대로 늦어도 하다못해 제시간 안에 가기 위해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
"단번에 가야겠습니다."
"이제야 진짜로 오는건가. 재밌겠군."
벤하르트의 짜릿하게 저려오는 투기(鬪氣)를 느끼며 그녀는 단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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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일. 연참대전도 끝나갑니다. 연참대전과 함께하면 20화에 가까운 분량도 꿀꺽 꿀꺽.. 없으면 10화를 쓰는것에도 빌빌.. 사실 매일 쓰는게 이야기의 맥을 잡고 쓰기에는 편한데 이게 마음대로 안된단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연참대전은 좋습니다 ^^;
그리고 떠오르는 연참대전이 끝난 후의 제 모습. O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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