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97화-가책(呵責)
불빛을 따라 트레이야와 레니아 벤하르트는 달리고 달렸다. 가는 도중에도 벤하르트는 지도를 살펴 보았지만 아무리 지도를 살펴 보아도 마을은 없었다.
"기다려 레니아 트레이야!"
"왜 또. 정말 잔소리꾼 같이."
"지도상에 이 근처에 마을이 있다고 나와 있지 않으니까. 조금 자제 하라고 둘다아아 어?"
벤하르트의 시선이 허공에 멈추었다.
"왜 그러는데? 어!?"
벤하르트의 시선을 따라 트레이야와 레니아가 도착한곳에 보이는것은 하나의 성이었다. 아니 성이라는것은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지만 그것은 성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작았다. 사람의 얼굴만한 크기로 불빛을 내면서 공중에 떠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안에 사람이 있다는것을 알수 있었다. 좁쌀만한 사람들이 사람인지 아닌지도 구별하기도 어려웠지만 그것이 사람의 윤곽을 취하고 있다는것을 눈치챌수 있었다.
"저건 플라닌족인가?"
의아한듯한 표정으로 레니아가 말했다.
"플라닌족?"
트레이야의 물음에 레니아가 답했다.
"플라닌족이라고 하나의 성을 만들어 두고 그 안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종족이 있어. 실제 크기는 인간에 흡사하지만 그들은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아 가기 때문에 결계를 지어두고 좀처럼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지. 원체 소심한 종족이라고 하는데 하나의 결계 안에 또다른 결계를 지어두고 살아간다고 해. 저 성처럼 말이지."
레니아는 작은 성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가 접근할때마다 성은 주춤 거리면서 멀리 떨어지기 시작했다.
"플라닌족의 수장이여. 듣고 있다면 어서 나와."
그 말에 성은 도망치기를 멈추고 그 안에서 흰색의 빛이 나오더니 한 노인이 등장했다. 사람이라고 칭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무언가의 뿔처럼 튀어나온 귀와 구릿빛피부 누런 수염을 가지고 있는 노인은 전체적으로는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인간은 아니었다. 플라닌이라고 불리우는 숲에 사는 종족인 것이다.
"에구구, 숲에서 나오자 마자 인간들과 조우할 줄이야."
등을 두드리면서 노인이 말했다.
"플라닌족이라면 신기를 느낄만큼 신화와 법에 훤할텐데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레니아는 노인의 벤하르트와 트레이야와 한데 묶어 인간으로 치부한것에 약간의 짜증을 느끼면서 말했다. 그 말에 노인이 한손을 까딱 까딱 접으면서 말했다.
"아니 아니. 조금 신기가 느껴지기는 하니 자네가 신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나에게 느껴지는 기운을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네. 확실히 말해두자면 자네는 신보다는 인.."
인간에 가깝다라는 말 끝을 내뱉게 놔둘수 없어 벤하르트는 노인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노인은 입을 막은 벤하르트의 손을 힘껏 깨물었다.
"으아악."
"뭐하는 짓인가. 나 참 운이 나쁘군 이런곳에서 인간을 만나다니. 거기에 내 결계가 있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성을 볼수 있는 자가 셋이라니. 끄흐 나도 이제 늙은겐가."
노인은 무릎을 꿇고 풀썩 주저 앉더니 애석하다는듯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벤하르트는 노인에게 물린손을 연신 비벼댔고 레니아는 그런 노인을 밉상스럽다는듯이 트레이야는 다른 이종족에 순수하게 놀라하고 있었다.
"어이 레니아 정말 소심한것 맞아? 저건 소심하다기 보다는."
"괴팍하지. 그래서 어울리기가 힘든거고 그래서 멸시당해 저런 소심한 일들밖에 못하게 된거야. 보라구 고작해야 자신의 결계가 들켰다는것 하나만으로 자책하는 저 모습을 저게 소심한게 아니면 뭐겠어?"
그 말에 벤하르트도 고개를 끄덕이면 동의했다.
"그래 나는 소심하지. 크흑. 아니 그보다 자네들 이곳에는 무슨일인가?"
"그건 우리가 묻고 싶은 일이라구. 플라닌족은 본래 숲을 나오길 가장 꺼려 하는 종족이잖아. 평생을 자신들이 만든 세상에서 보내는것을 가장 즐기는 종족이 어째서 이런곳까지 나온거야? 간혹 한명씩 그 성에서 나오고 싶어하는 플라닌족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성 자체가 움직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적이 없어."
"그건 우리에게도 어쩔수 없는 일이 있어 그렇네. 그리고 아가씨는 말투를 조금 가려야 겠구먼, 연장자를 대하는 방법이 아주 서투르니."
"누가 연장자야! 나로 말할것 같으면."
레니아가 버럭 성을 내며 노인에게 달려 들려 했지만 노인은 가볍게 레니아를 퉁겨냈다.
"마법?"
"우습지만 자네가 설사 신이라고 해도 나보다 더 나이를 먹었을리는 없을 것이네. 이몸은 이래뵈도 수만년을 살아온 고대의 플라닌 족이거든."
"거짓말 하지마. 플라닌족의 수명은 천년 수장이라고 특별할리는 없어."
그 말에 노인은 밝게 웃으면서 손바닥을 쫙 피고 무언가를 만들어 내었다.
"그건 내가 아닌 플라닌 족을 말하는 것이라네. 이몸으로 말할것 같으면, 이 불노(不老)의 마법을 개발한 플라닌족 최대의 마법사이자 수장 길리어스니까,"
"불노의 마법?"
트레이야가 길리어스의 손에서 반짝이는 마력구를 보고 말했다. 거의 반평생을 대르나드에서 살아온 그녀는 이종족이라는것에 대한 환상과 그것이 얼마나 희귀한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자연히 레니아와 벤하르트와 함께 여행을 하다가 만나게 되었기 때문에 평생에 한번 만날까 말까 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여행을 하다 보면 어쩌다가 한번씩 만나주는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종족이 신기하기만 한듯 관심있어하는 트레이야의 모습에 덩달아 즐거워진 길리어스가 손에 있는 마력구를 빙글 돌리고 말했다.
"그렇지. 잘 보시게나."
마력으로 이루어진 소용돌이를 길리어스가 자신의 몸에 가져가자 순식간에 길리어스의 몸에는 생기가 넘쳐났고 곧 젊은 청년의 형상으로 바뀌어 갔다. 준수한 미남자였지만 어딘가 촐랑 거리게 생긴 남자로 변한 길리어스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알겠나? 이것이 바로 나의 진짜 모습. 길리어스 라는거지."
"모른다고 그런것. 어느 책에서도 길리어스라는 위대한 플라닌족에 대해서는 실려있지 않아."
"그럴수밖에 슬프게도 내가 부활한건 10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거든 만여년 정도를 이 마법을 개발하기 위해 스스로의 육체를 봉인시켰기 때문에.."
"고작해야 불노의 삶을 얻고 싶어서 그런짓까지 하다니 추한줄 알아라."
"흥 이몸은 신도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룬것이네. 지금에라도 당장에 너희 인간들을 간난아기로도 노인으로도 만들수 있음이지."
그 말에 레니아가 콧방귀를 끼면서 말했다.
"하 신도 못이룬다고? 그런건 이미 몇천년전에 이루고도 남았지. 불노같은것 가지고 너무 잘난척 하지 말라고,"
"무슨 소리를 하는겐가? 아가씨가 내가 이룬 불노의 마법을 익혔다고?"
"마법일 필요가 뭐있지? 불노의 명약을 만드는 노시엘트의 약신이 바로 나야. 불노따위는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도 안되. 나의 지난 만여년의 시간은 무엇이었던 거지?"
길리어스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앉더니 양팔으로 무릎을 감싸 안고 중얼 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음습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를 보고 있을수만은 없어 벤하르트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레니아의 말로 미루어 보면 플라닌족은 숲을 잘 빠져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고 실제로 별로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던 모양인데 어째서 나오신 겁니까?"
"크흐흑. 그것이 말일세. 우리 플라닌족은 알다시피 평화롭게 숲의 안 이 성에서 살아가고는 하지만 성이 그렇게 거대한건 아닐세. 작은것도 아니지만 말일세.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던 성에 점점 플라닌족은 늘어 갔고 식량을 사러 인근의 마을에 가야 할 정도로 우리는 시달리기 시작했네."
"돈은 뭘 사용하는데요?"
초롱 거리는 눈으로 트레이야가 묻는것을 보고 자신의 이야기에 한껏 빠졌다고 생각한 길리어스는 품안에서 작은 보석하나를 들어서 트레이야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니까 인간이란것들은 어리석어서 반짝이는것들을 보면 사족을 못쓰거든. 우리에게 있어서는 쓰레기 같은 것들을 그들은 보물로 여기고 좋아하더군. 그래서 이것으로 식료품을 사곤 했지. 참고로 말하면 저 성안에 널린게 이것이라네. 식료품을 살때는 인간세상에 있는 동물이나 필요한 기구들도 한꺼번에 사오곤 했다네."
"알았으니까 빨리 본론으로나 들어가."
레니아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재촉하자 길리어스는 화를 내며 말했다.
"이 낭자를 본받아 좀 말을 곱게 할수는 없나. 어쩌다가 내가 저런 신인지 인간인지도 모를 여자를 만나서.."
"뭐라고!?"
궁시렁 거리던 길리어스는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사나운 레니아의 기백에 움찍 거리면서 뒤로 물러 났다.
"아 둘다 그만 하고 이야기나 계속하세요. 중간에 딴길로 세지 말고."
벤하르트는 레니아와 길리어스의 중간을 가로막으면서 이야기를 재촉했다. 에헴 거리면서 다시 길리어스는 거드름 피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인구가 포화가 되려 해서 나는 한가지 결심을 했지 성을 한개 더 지어 내자고 말이야."
"성을 한개 더 짓는다고? 당신 혼자?"
"당연하다네. 아쉽게도 우리의 플라닌족에 쓸만한 마법사는 나 하나거든. 그래서 새로운 마법사의 양성도 돕고 있지. 이제야 나의 위대함을 알겠나?"
어느새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길리어스가 자랑스럽게 말하자 그녀는 적지않게 놀랐다. 보통 플라닌족의 성은 한두명의 마법사가 지어낼수 있는게 아니었다. 수십의 마법사가 복잡하게 얽히고 얽히게 마법을 부려 이중 삼중으로 결계를 쳐서 만들어 진것이 '숲안의 성'이라 불리우는 플라닌 성인 것이었다. 수십의 마법사가 매달린다해도 몇주 몇달이 걸릴지 모르는 고된 작업을 홀로 한다고 태연하게 말하니 레니아가 놀랄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를 얕보면 곤란하네. 괜히 긴 세월을 살아온것은 아니니까 말일세. 알겠나?"
아직도 믿기지 않은듯 레니아는 흘끗 흘끗 길리어스를 쏘아 봤지만 길리어스는 그런 시선을 느끼며 되려 즐거워 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 성을 짓는데 어떻게 되었다는 겁니까?"
벤하르트의 말에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길리어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성을 만드려면 윤곽부터 지어야 하기 때문에 성의 결계에서 나와 이 모습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는것이네. 그래서 짓고 있는데 말이지. 얼마전에 이상한 마수가 오더군."
"이상한 마수?"
벤하르트의 등에 살짝 식은 땀이 어렸다. 이상한 마수라고 했을때 머릿속에 떠오른 한 무리의 새가 떠오른것이다. 벤하르트뿐 아니라 레니아와 트레이야도 연신 방글거리던 웃음이 사라졌다.
"그래 뭔지는 모르겠지만 거대한 새였는데 성을 짓고 성을 방어하면서 그 새들과 싸우기는 너무도 번거롭더란 말이지. 거기에 어찌된 영문인지 그 새는 기가 막히게 내 결계를 잘 찾더라고, 내가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도 집요하게 공격해오는 새들때문에 숲에 머물고 싶었지만 결국 숲에 머물수는 없었던 거지.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숲에서 나가려고 하는데 자네들을 만난거야. 이거참 나는 복도 없지."
'정말 복 없는 인간 아니 플라닌족이군. 그 일을 처하게 만든 당사자가 우리라는 것을 알면. 생각만 해도 끔찍해.'
레니아와 트레이야도 약간 어색한 표정으로 길리어스를 바라 보자 벤하르트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키면서 표정관리를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다시 길리어스를 보자 미안한 감정이 올라왔다. 자신들만 아니었어도 평온하게 살았을 플라닌족을 생각하니 양심이 찔려 벤하르트는 길리어스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문득 벤하르트는 에코트에서의 일을 기억해 내고는 길리어스에게 말했다.
"될지 안될지 모르겠지만 한가지 방법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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