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92화-회색의검사(1)
백색의 빛이 번뜩이자 몇마리의 디노사인트가 떨어져 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벤하르트와 레니아 트레이야는 전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디노사인트는 지친 그들을 상대로 여유롭게 조여오고 있었다. 그냥 생각없이 돌격 한다면 모를까 처음 벤하르트의 일격에 동료들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 천천히 지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벤하르트는 어디에서부터 꼬였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상황은 정말 최악이었다. 수십은 거뜬이 넘는 엄청난 수의 디노사인트가 하늘을 빼곡히 메워 서서히 벤하르트를 포위해 오고 있었다.
"요놈!"
트레이야가 재빠르게 손으로 디노사인트 한마리를 낚아 채었다. 꽤나 많은 디노사인트를 잡았건만 아직도 그 수는 백여마리에 이르렀다. 괜히 라군델에서 토벌하기 어렵다고 한게 아니라는것을 벤하르트는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벤 이녀석들은 뭐야?"
"디노사인트라고 이맘때가 되면 이곳에서 서식하는 녀석들이라고 하더라. 그나저나 너희들. 도대체 왜 여기 있는거야. 나 참. 따지고 싶은건 정말 많지만 정말 이럴때가 아니군."
"그게 맞는 말이지. 저 많은 마수들을 어떻게 잡지?"
트레이야의 말에 벤하르트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아무리 봐도 뚫고 나갈만큼 여유로워 보이는 곳은 없었다. 그야말로 벤하르트가 등을 대고 있는 돌산을 빼고는 눈앞에는 어디를 돌아 봐도 마수들 뿐이었다. 아주 천천히 날갯짓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말은 장난 스럽게 받았지만 정말 목숨이 내걸어야 할정도로 지독한 상황이 아닐수 없었다. 손에 힘을 불끈 쥐고 벤하르트가 외쳤다.
"레니아. 트레이야. 내 뒤로 와."
벤하르트의 말에 둘은 잽싸리 벤하르트의 뒤에 몸을 날렸다. 벤하르트가 힘껏 검을 들고 휘두르자 평상시와는 비할것 없는 백색의 빛이 디노사인트를 덮쳤고 길은 열리는듯 했다.
"됬다! 아.."
하지만 디노사인트들은 빨랐다. 빠르기도 빨랐지만 수가 월등하게 많았다. 금새 쓰러진 디노사인트가 있는곳을 다른 디노사인트가 금새 메워 오자 다시 그들은 발이 멈출수 밖에 없었다. 벌써 벤하르트일행이 잡은 디노사인트만 해도 놀랄만큼 많은수였지만 아직도 많은수의 디노사인트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거기에 동료들이 쓰러졌기 때문인지 얼굴에는 적개심이 가득했다. 등뒤에 산을 두고 차라리 머리 나쁜 마수들을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차라리 기회를 만들어 낼수 있을것 같았지만 디노사인트는 영특해서 쉽사리 달려들지도 않았다.
"레니아 이런 상황에서 쓸 약은 없어?"
"있다면 진작에 썼겠지."
어느정도 많이 포위했다고 생각한 디노사인트 한마리가 번개같이 레니아를 노리고 공격을 해오자 벤하르트는 그 디노사인트의 목을 베어 버렸다. 힘을 많이 준것도 아니었지만 검은 아주 쉽게 목과 몸을 분리 시켰다.
"벤하르트 레니아. 내가 새들과 싸우기 시작하면 마을로 바로 달려서 도움을 청하도록 해. 더는 못참겠다."
손가락을 까딱이면서 트레이야가 디노사인트를 노려보았다. 워낙에 성격이 급한 트레이야였고 트레이야 자신은 디노사인트를 상대할 자신이 있었기에 미끼가 되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트레이야 잠깐.."
벤하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녀는 디노사인트의 무리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이 닿을때마다 디노사인트가 한마리씩 죽어나갔다. 그런 그녀를 뒤도 없이 둘러쌓아 디노사인트는 일제히 노리기 시작했다.
"까오오!"
수십개의 부리가 트레이야에게로 날아왔지만 그녀는 이미 죽은 디노사인트를 들어 그 부리를 막아 내고 다시 몇마리의 디노사인트를 죽이면서 싸우고 있었다.
"까옥!"
"아차."
앞에서 날아오는 부리를 막아 내느라 미처 뒤를 파악하지 못한 트레이야가 신음을 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심하라고 둘러쌓이면 저녀석들이 원하는데로 되는거니까."
"벤하르트! 도망치라고 했잖아."
"무리하지마. 어차피 마을은 군대를 보낼정도의 여력이 안되니까 이미 이런 상황을 알고 각서까지 쓰게 해서 보내는데 아니 애초에 너희들 각서를 쓰지 않은거야?"
"아 그게.."
레니아와 트레이야가 시선을 밑으로 깔았다. 벤하르트가 홀로 여행하는것을 몰래 보려고 이런 저런 일을 했다고 말할수는 없는 일이었다.
"으앗. 아 진짜 미치겠군."
검을 들어 한마리의 디노사인트를 죽여 냈지만 아직도 수십마리 도저히 세명이 감당해낼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끄.."
"레니아!"
"괜찮아 앞 앞이나 봐."
앞에서 날아오는 발톱을 검으로 베어 내고 벤하르트가 다시 레니아를 돌아보았다. 괜찮다고는 했지만 어깨부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처는 전혀 괜찮은것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벤하르트가 검을 휘둘렀다. 이미 검에 맺힌 빛도 서서히 줄어들어 공중에 있는 디노사인트에게 닿지 않았다.
"하아 하아."
'설마하니 이 내가 이런곳에서 저런 마수에게 먹이가 되고 마는거야?'
생각만해도 아찔했다. 평상시처럼 신으로서의 자존심에대한 진담반 농담반 섞인 말들과는 차원이 틀렸다. 어느 한 산에 있던 신이 한 대장장이와 여행을 떠나 이름도 모를 곳에서 이름도 모르는 마수에 둘러쌓여 잡아 먹혔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가 레니아의 머릿속에 그려지자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심한 상처도 상처였지만 수천년간 신으로 지냈던 레니아에게는 일순간 정신적인 고통이 더 심했다.
"레니아 뭐하고 있어!"
다급한 벤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벤?"
"어쨋든 달아나자 앞만 뚫어내서라도 달려야지 이대로는 정말 꼼짝없이 당해버리겠어."
레니아의 멍했던 시선이 다시 디노사인트에게서 멈추었다. 눈앞에는 아직도 지친 기색 없이 정신없이 새머리를 낚아 채는 트레이야가 보였다.
"이런 곳에서 죽을것 같아!?"
'레니아와 트레이야라도, 살려야해!'
"간다! 트레이야 떨어져!"
검에 흐릿하게 맺혀 있던 빛이 일순간 강하게 피어 올랐다. 거대한 백광이 휩쓴 자리에는 힘없이 널브러져 있는 디노사인트들만이 있었다. 레니아와 트레이야는 지친 몸을 이끌어 그 사이를 달려 나갔다. 이미 꽤나 수가 줄어 있었기 때문에 디노사인트들이 바로 그들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내 레니아의 발이 멈추었다.
"벤! 뭐하고 있어?"
"하하.. 어서가."
달려 나가려던 찰나에 쓰러져 있던 디노사인트 하나가 벤하르트의 발에 부리를 찔러 넣어 벤하르트는 뛰어 나갈수가 없었다.
"바보가! 널 두고 갈수 있을것 같아!?"
레니아는 고통에 한쪽 팔을 움켜쥐고도 벤하르트를 향해 돌아오고 있었다.
"가라니까! 정말 다 죽게 생겼어. 신이 이런곳에서 죽었다고 생각해봐라! 창피하지도 않냐!"
"동료를 버리고 갔다는게 더 창피하겠다."
한쪽 팔로 그녀는 영검을 들고 휘둘러 그녀에게 오던 디노사인트를 베어냈다.
"벤하르트! 만약 살아 돌아가면 한턱 징그럽게 쏴야 할줄 알아."
"퍽이나 너희들이 오지만 않았어도 안전하게 지나갈 방법을 찾을수 있었다고!"
입에서는 아직도 농담어린 목소리가 나왔지만 상황은 최악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벤하르트일행에 비해 디노사인트는 적어도 오십은 넘는 마수들이 적의를 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담이 아니고 말야. 진짜로 죽을것 같아 레니아."
"내 인생도 참 기구해. 아마 세상에서 최초일거야. 마수에게 잡혀 죽은 신이라니."
"레니아 너는 많이 살았다고 했잖아. 나야 말로 최고로 불행하다고, 겨우겨우 대르나드에서 나와 얼마나 있었다고 이 꽃다운 나이에 죽어야 하는거야."
"어이 불행 대결이라도 할 생각이야? 논점이 어긋났다고,"
벤하르트는 거의 감각이 없는 다리를 힐끗 쳐다 보았다. 이미 피도 많이 흘러서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힘들었다.
"으으."
수십마리중 하나의 부리가 눈앞에 오는것을 보면서 벤하르트는 이번에야말로 죽었다 라고 생각했다.
"벤!"
몸이 멀쩡했다면 모를까 그녀도 시원치 않아 벤하르트를 구하러 갈수도 없었다. 그것은 트레이야도 마찬가지여서 마치 정지한듯이 그들은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툭]
벤하르트를 노렸던 디노사인트의 머리가 떨어졌다.
"어?"
"뭐지?"
"뭔가 인기척이 느껴져서 와봤더니 이런곳에 사람이 있었을 줄은."
너덜너덜한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상당히 떨어진곳에서 모습을 들어 내었다. 벤하르트만큼의 나이였을까 검집에는 이상하게 긴 장도를 들고 잡티하나 없는 흑발을 가진 검사였다. 레니아나 트레이야와는 달리 유독 벤하르트는 그 사람을 검사라고 생각했는데 검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닌 검사 특유의 무언가를 느낀 까닭이었다.
"분명 이곳은 위험하다 라고 소문이 났을것 같았는데 아니었나.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회색의 옷은 이리 저리 봐도 너무나도 남루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런것을 신경 쓰지 않는듯 했다. 갑작스러운 검사의 등장에 벤하르트나 레니아에게 공격하던것을 멈추었던 디노사인트는 다시금 검사까지 포위하기 시작했다.
"도망.."
도망치라고 이야기하려던 벤하르트의 말은 목구멍에서 멈추었다. 저 검사에게 도망같은건 필요 없었다. 방금전의 귀신같은 일격은 그가 한번도 이길수 없었고 지금도 다다르지 못한 리드보다도 무시무시한 소름끼치는 일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디노사인트중 하나가 검사를 향해 돌격했다. 바람이 날리는 소리가 들리고 디노사인트는 떨어져 내렸다. 세사람중 어느 하나도 그 움직임을 알아챈 사람이 없었다.
"이정도면 됬겠지? 네녀석들이 당할수 없다는것을 알았다면 얼른 사라져라. 아니면 죽어볼테냐?"
냉랭하게 말하는 검사의 말을 알아들은것인지 단순히 공포스러웠을 뿐이었는지 디노사인트는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벤하르트의 빛에 맞고 기절해 있던 디노사인트도 서서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산에는 디노사인트의 모습은 커녕 평범한 새조차도 찾아 보기 힘들게 되었다.
"죄도 없는 생명을 죽인다는건 잔혹하지만 어쩔수 없군."
멀리 사라지는 디노사인트를 보면서 검사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도망치는 디노사인트를 믿기지 않는듯 벤하르트와 레니아 트레이야는 쳐다보았다.
"이봐 당신!"
세명중에서는 가장 몸이 성했던 트레이야가 화난듯한 표정으로 검사에게 걸어갔다.
"그런 실력이 있으면 전부 없애 버리면 되잖아. 저녀석들 때문에 우리는 죽을뻔 했다고, 거기에 저런게 이런곳에 있으면 여길 지나가는 사람들이 위험하잖아."
"트레이야! 그만 말해."
벤하르트는 트레이야의 말을 막았다. 벤하르트가 그런생각을 하지 않은것은 아니었고 검사의 생각을 아는것은 아니었다. 벤하르트가 레니아의 성격을 알게 된것은 여행을 하면서 부터지만 그 전 노시엘트의 산에서 그는 그녀가 사람을 생각하는 전반적인 생각을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 있어 사람이나 마수 그외 다른 생물들은 같은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레니아를 부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트레이야의 말을 막았다.
"맞아. 너희, 아니 우리에게 그럴 권리는 없으니까.."
레니아가 자신을 우리라고 이야기한것에 벤하르트는 적지 않게 놀라는데 검사가 말을 걸었다.
"잘 알고 있군. 굳이 따지자면 나는 저쪽 새들의 편을 들어 주고 싶었거든. 이곳 땅은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니까. 사람이 동물을 먹고 마수를 먹는것처럼 저들의 식사에 사람이 포함되어 있을뿐이니까,"
검사의 말은 트레이야를 비웃는건지 아니면 아무의미가 없는 어조인지 잘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런.."
딱히 반박을 할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상당히 놀랐군. 나 말고 설마 이 길을 지나가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줄은."
"어쨋든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니 신경쓰지마. 그나저나 또 관여해버렸군."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한번 내쉬고 검사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레니아가 벤하르트에게 말한다.
"벤 따라가자."
"에? 왜? 아따따 아프다. 조금만 천천히 가자."
전투가 끝난 탓일까 다리의 상처가 쑤셔 오기 시작했다. 살짝 신음소리를 내다 벤하르트는 레니아의 어깨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잔말 말고."
"어라 레니아 벤하르트 어딜가는거야?"
검사를 향해 절뚝거리면서 걸음을 옮기는 벤하르트를 따라 트레이야도 그들을 따라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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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루만 더 가면 연참대전을 완료합니다. 조금만 더 힘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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