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71화-출(出)
집에 늘어져 있는 두명의 여자들을 뒤로 한채 벤하르트는 장비를 점검하기 위해 다시 잡화점에 들렀다. 우락부락하지만 전에 호감을 남겼기 때문일까 그 험하게 생긴 외모에서도 어딘가 인자함이 묻어 나오는듯 싶었다.
"잘 가게."
그는 벤하르트의 태도를 보며 마을을 나가리라는 것을 짐작하고는 그렇게 말했고 벤하르트는 그를향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그곳을 나왔다. 여전히 거리에서는 싸움이 벌어 지고 있었는데 언제 휘말려도 이상하지 않을정도로 소란스러웠다. 술병이 깨지는 소리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쉴새 없이 들려온다. 그런 모습을 보니 더더욱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야 겠다는 생각이 벤하르트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식료품점이나 과일가게 다른 마을이었다면 인자한 외모는 기본으로 미소가 절로 번졌을테지만 대르나드에서는 택도 없는 일이었다. 어느곳이나 험상궃고 어둠을 흩뿌리는 사람들 뿐이었다. 새삼 트레이야가 왜 그렇게 지독히 이곳을 떠나고 싶어했는지 알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번의 싸움이 일어나고 요란하며 규칙과 질서라고는 없는 이곳에서 여자가 살아나가는 것이 순탄치 않을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끝."
등에는 트레이야의 침낭을 양손에는 여러 음식들을 들고 벤하르트는 여관을 향했다. 갑작스레 벤하르트가 서있는곳에 그늘이 진다.
"어?"
"뭐가 어?냐 이녀석 잘만났군 그 여자는 어디에 있나?"
백색의 피부를 가진 거대한 덩치의 사내 섄이 벤하르트를 가로 막았다.
"지금 여기에는 없습니다만,"
"잘됬군 사정없이 네놈의 얼굴을 패줄수 있을테니 말야."
대르나드는 그렇게 거대한 마을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마을보다 약간 더 큰 마을이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트레이야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찾는것 정도는 간단한 일이었다. 벤하르트는 섄이 자신을 노리고 왔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섄이 어떤 수를 사용하더라도 트레이야를 이길 수단은 없어 보였고 섄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터였다. 하지만 그대로 당하고 물러서기에 그는 너무도 명성을 얻었고 허영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다못해 약해보였던 벤하르트라도 괴롭혀줄 심산이었던 것이다. 섄이 그곳에 나타난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각오는 되 있겠지?"
"저 저기.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아주 큰 잘못을 저질렀지. 이 나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농락했다는 것이다."
억지였지만 이 마을에서는 그런 억지조차도 허용되었다. 어차피 마을에 법다운 법은 존재 하지 않았다. 굳이 있다면 강한자가 법이었을 것이다. 말이 끝날때 공격이 올것이라는것을 알고 있었던 벤하르트는 양손에 든 짐을 놓고는 풀쩍 뛰었다. 거대한 주먹이 허공을 지났다.
"음?"
섄은 의외로 날렵한 벤하르트의 움직임에 눈을 치켜떴다.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구경꾼들은 몰리기 마련이었지만 섄같은 경우는 마을에서도 손속이 매섭기로 유명한지라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다시 거대한 주먹이 벤하르트의 옆을 가로 질렀다. 리드의 검보다 월등히 느린 공격 피하는것은 문제도 아니었지만 언제고 계속 피할수는 없었다. 적절한 공격없이 모든 공격을 피할 정도의 능력을 가졌다면 그것은 이미 엄청난 격차가 있다는 말을 의미했다. 당연히 벤하르트가 그런 경지에 도달했을리는 없었다. 막무가내로 공격해오는 섄의 주먹을 막고 벤하르트는 멀리 나가 떨어졌다. 데굴데굴 굴러 건물에 등을 기대고 축늘어져 있는 벤하르트를 보고 마을사람들은 낄낄대면서 웃기 시작했다. 나가 떨어진 사람을 비웃으면서 하나 남아 있는 우월감에 도취라도 되어 보려는듯 했다. 섄은 주먹을 오그렸다 폈다 하면서 벤하르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주먹에 느낌이 없다니, 일부러 나가떨어진건가?'
저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한번 밟아보면 금새 들통날 사실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섄이 벤하르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벤하르트가 움직였다. 어 하는 소리를 내기도 전에 벤하르트의 손은 섄의 목을 찔렀다.
"켁 켁."
벤하르트는 섄을 무시한채 바로 짐을 들고 줄행랑 쳤다. 의외로 구경꾼들도 선선히 길을 터 주었기 때문에 수월히 그곳을 벗어날수 있었다.
"살았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섄을 이길수 없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검을 뽑으면 쉬이 해결될 문제 였지만 이런 사사로운 문제로 생사결까지 낼 필요는 없었다. 검을 뽑아 검의능력을 사용하면 그 많은 눈에 자신의 검이 띄게 되니 그것도 문제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여관의 문을 열었다.
"여 왔어?"
평소에 입던 옷과는 다른 옷을 입은 레니아가 서 있었다.
"뭐야 그 옷은."
"이것들은 내 옷 어때 눈 돌아가지?"
트레이야가 입는 옷들은 다소 노출이 심했기 때문에 벤하르트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비단 트레이야 뿐만 아니라 대르나드에 머물던 여성들의 옷은 거의 대부분이 헐거웠다.
"저기 트레이야. 같이 동행 한다길래 말하는 거지만 계속 그런옷으로 다닐거애요?"
"음? 왜?"
"뭐 이 마을에서는 그게 보편적이라지만 다른 마을은 아니거든요. 레니아를 보면 알다시피 꼭 저게 보편적이라는건 아니지만,"
"뭐 그건 그 마을에 가서 결정할 일이지. 안그래?"
'도대체 저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벤 어때? 이 옷은?"
"에. 뭐 좋아."
어떤 옷을 입어도 그녀는 잘 어울렸다. 약간 건성적인 어투에 레니아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좋아라고 말하는 벤하르트에게 뭐라 핀잔을 주는것은 그야말로 억지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여행의 준비가 끝나고 세사람은 여관의 밖으로 나왔다. 트레이야는 마지막까지 점검을 해두었는데 찰칵 하는 소리에 그녀는 미소를 띄우고는 말했다.
"무단으로 들어 오려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호되게 당하겠지."
벤하르트는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물으려 들지는 않았다.
"출발하.. 엥?"
정비를 끝내고 돌아본 곳에는 섄을 비롯해서 여럿의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딱 보기에도 좋은 의미로 몰려든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저기 말야 벤하르트 뭔일 저질렀어?"
"아니 아까 시비가 붙어서 도망쳐 나왔는데 그게 문제 였을까요?"
"뭐? 그냥 도망쳐 왔단 말야? 곤란한데 그건."
법이 없다 했던 대르나드였지만 암묵적으로 그들의 생활에서 만들어 놓은 법이 있었다. 대르나드 같은곳에서 살다보면 홀로 사는 사람도 모여서 생활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인데 허구한날 시비가 붙다 보니 홀로 살아 나가는 사람들은 시비가 붙는다 해도 아주 불리할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본래는 그런 일따위 무시하며 생활해 왔지만 한번 대대적으로 패거리 싸움이 붙어 버리고 마을의 피해가 속출하자 암묵적인 규칙을 만들었는데 결투를 할때에는 일대일로 싸우고 그 즉시 뒤끝 없이 싸움의 결과를 내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규칙을 안지키면 일대 다수도 상관 없이 묵인해 준다는것인데, 빈다던가 구타를 당한다던가 하더라도 거기서는 싸움을 끝내고 왔어야 정상이라는 이야기지."
"남의 일이라고, 전 규칙같은건 모른다구요."
"하여간 벤은 어딜 가서도 말썽이로군,"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이 마을을 나가겠다고 어제 승인도 받아 놨으니까 이대로 마을의 밖으로 돌파하는게 어때? 하나 둘 대충 20명 레니아는 벤하르트가 맡는 쪽으로,,"
"왠지 짐이라는 말처럼 느껴지는데,"
"참아.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을때가 아니야아아!"
철퇴가 그들을 향해 날아오고 벤하르트는 레니아를 잡아 끌어 그 철퇴를 피해 냈다. 빗나간 철퇴는 트레이야의 여관에 박히게 되었다.
"헤헤.."
철퇴를 던진 남자가 웃으면서 철퇴를 수습하려 하자 트레이야가 외쳤다.
"달려!"
망설임 없이 레니아의 손을 잡고 벤하르트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제길 놓치지 마 끄으아아 뭐야 이건!"
철퇴의 남자가 철퇴를 수습한 순간 집의 부서진 부분에서 수십개의 못이 사방으로 날아가기 시작했고 그에 혼란과 함께 여러명이 부상 당했다.
"어째서 저런것을 만들어 둔겁니까?"
"엄연히 저건 내 재산인데 누군가가 허락 없이 들어 온다면 죄를 받아야 하지 않겠어?"
'성격 한번 괴팍하군,'
본인은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분명 대르나드에서의 생활에 젖어 있는 그녀의 모습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할수 있었다. 하지만 대르나드에 살려면 그정도는 기본 아닌 기본이었다. 못에 박혀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는것은 역시 썩 즐거운 일은 아니었고 그들에게 신경을 쓸 겨를도 없이 그들은 달렸다.
"어딜!!"
거대한 몸이 그들을 가로 막았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새삼스래 확인할것도 없었다.
"흐아앗!"
트레이야는 주먹을 불끈 쥐고는 그의 복부에 주먹을 꽃았다. 외마디 비명이 퍼지고 섄은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선뜻 다가 오지 못하는 그의 동료들을 뒤로 한채 그들은 마을을 빠져 나왔다.
"엄청 뒤죽박죽이네."
레니아의 말에 벤하르트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그런말 말라구, 그래도 몇년간 머물렀던 마을인데 작별하는데 이정도 소란스러움은 환송회 같은 분위기라고 생각해. 뭐 소란을 내가 일으킨것은 아니지만,"
트레이야의 눈이 슬쩍 벤하르트에게로 향했다.
"고의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벤하르트의 말을 듣지 못한듯 그녀는 뒤의 마을을 보고 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마을이 싫어 빠져 나왔다 해도 수년간 머물렀던 곳 지난 추억이 하나도 없었던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싫었던 곳이라 해도 아쉬움 한조각마저 남아있지 않은것은 아니었다.
"뭐 대르나드에서의 삶도 오늘로 끝이네, 안녕 대르나드 나의 소녀시절의 재앙과도 같았던 곳. 아마 평생 잊지 못할거야."
"하하."
말은 그렇게 매도를 해도 눈에 잠긴 작은 아쉬움을 전부 감추어 낼수는 없었다. 그것을 감추어 주려는듯 벤하르트는 힘차게 발을 굴렀다.
"그럼 빨리 가자구요. 다음은 무슨 마을이었더라,,"
"그러고 보니 아랫쪽 배를 타러 간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목적지는 남쪽의 빈트닌 이겠네. 하지만 단번에 그쪽으로 가기는 힘들거야. 중간에 아마 몇가지 마을이 있었던것 같은데,"
지도를 뒤지던 벤하르트의 손이 다음 마을에 멈추었다. 에코트라고 불리우는 마을이었다.
"그래 거기. 나는 여행이 처음이라, 지도를 보는법도 모르거든 어느정도를 가야 하는거야?"
"글세요. 나흘 정도 일까, 아니 음식도 나흘치를 가지고 와서 나흘이 아니면 곤란하지만,"
"잠깐 벤. 이정도 거리에 나흘? 더 걸리지 않아? 여기서 여기까지 오는데 몇일이 걸렸는데."
벤하르트는 지도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싱긋 웃었지만 그 웃음은 너무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계산을 잘못했나?"
"뭐 어때 부족하면 얻어 먹으면 되는 것 아니겠어?"
트레이야는 여행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말했다. 하지만 실상 그 자급자족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벤하르트와 레니아는 뻔히 알고 있었다.
"뭐 이렇게 잡담할 틈도 없겠군요. 한걸음이라도 더 빠르게 에코트를 향해 가는수밖에 별다른 방법은 없겠어요."
"좋아 그럼 빨리 가자. 왠지 두근두근 거리는데?"
흥분된 목소리와는 상반된 기분으로 그녀는 마지막으로 대르나드를 바라보고 작별을 고했다.
'나에게는 악연이나 다름 없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시끌벅적 해서 심심하지는 않았던것 같네. 이제는 정말 안녕이야. 대르나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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