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쿠라스 2부 85화-시공(時空)(14)(643화)
사흘 간 카실러스는 케이슨과 벤하르트를 가르쳤다.
"설마 이런 작은 변화로 이정도나 성장할 수 있을 줄이야."
케이슨은 달라진 자신의 실력에 만족해 하며 말했다. 이전보다 눈에 띄게 강해졌는가 하면 딱히 그런 건 아니다. 단순히 기를 더 요령 있게 다룰 수 있게 된 것뿐이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기술인 '유성'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공격이나 전략의 폭이 수배는 늘어나게 되었다.
"뭐 짧은 시간에 변화하고자 한다면, 이런 부분이 특효겠지. 애초에 다른 부분은 건드리기 애매하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 에르니아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는데?"
벤하르트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며 케이슨이 말했다. 벤하르트는 이전에 자신과 싸웟던 검술과는 전혀 다른 검술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걸 위한 의태니까."
카실러스는 벤하르트에게 검술을 만들어 주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카실러스만이 만들 수 있었던 유일한 검술.
사실 이제 자신이 생각한 대로 모든 형에서 '일섬'을 사용할 수 있는 벤하르트에게 따로 검술은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벤하르트만의 형이라는 것은 쉽사리 생기기 마련이다.
벤하르트가 무한이나 다름 없는 자유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벤하르트인 이상 결국은 호흡, 습관의 형태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카실러스는 벤하르트의 색을 완벽하게 지운 다른 검술을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역시 의태는 의태일 뿐. 맞지 않는 옷 인건가.'
카실러스에게 수업을 받은 날은 고작해야 사흘에 불과했지만, 마치 몇년을 수련한 것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건 단순히 기술이나 검술의 영역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후우."
벤하르트는 허공에 검을 휘둘렀다. 투명한 백색의 기가 일렁거리면서 공중에 고정되고 그는 그 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카실러스에게 배운 것은 단순한 검술만은 아니었다.
검술이 벤하르트가 휘두르는 형을 단기적으로 교정한 것이라면, 장기적으로는 벤하르트도 케이슨처럼 효율적으로 기를 운용하고 싸우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좀 더 적은 기를 가지고도 더 정교하게 다루는 것. 본래 검을 만드는 행위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폭발적인 기를 다룰 수 있는 벤하르트였기에 요령을 짚어주기 시작하면 그 뒤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되어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작은 백색의 연기를 한 발로 밟고 섰다.
'이것도 카실러스 씨의 조언이지.'
잠시 그는 이틀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아저씨 그런데 그때 그 공중을 박찬 것 말인데요. 저도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가르쳐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네가 배울 수 있는가가 문제라면 모를까."
케이슨의 발은 새하얗게 빛나 오르기 시작했다.
"요령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은 나도 유성각을 사용하지 않으면 꽤나 체력을 소모하게 되거든. 너라 해도 그리 다를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습니까?"
"요령 정도는 익혀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둘의 대화에 카실러스는 스리슬쩍 끼어들었다.
"하지만.. 에르니아 자네가 저 기술을 사용하는 건 연비가 좋지 않군."
"연비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의 문제가 아닙니까? 공중에서 이동한다는 수단 자체가 어려우니까요. 뭐 저도 없는 건 아니지만."
벤하르트는 자신이 사용하는 소환수의 형태를 한 기의 덩어리를 생각하며 말했다.
"자네는 만드는 자. 그렇기에 자신의 의지를 구현할 수 있지. 아마 상상할 수 있는 조형이라면 만들어 낼 수 있겠지?"
"어떻게 조금만 보고 거기까지 아시는 겁니까?"
벤하르트는 레니아도 저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며 질려 했다.
"조금 이라니. 얼마 전 대련과 무기를 만드는 것까지 밑천은 다 까발려 진 것 아니던가?"
"윽.."
"어쨌든 요령을 익혀서 사용하는 법을 익히는 건 개인적으로는 찬성이지만, 그걸 주력으로 사용하는 건 지금은 반대네."
벤하르트도 나름 카실러스를 파악했기에 거기까지 듣고는 물었다.
"그렇게까지 이야기 하시는 것을 보면 다른 방법을 추천하시고 싶은 모양이군요."
"뭐 그렇기야 하지. 그렇게 단순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벤하르트는 또 무언가 카실러스가 자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 들어 보도록 할까?'
"케이슨의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선결해야 할 과제가 있지. 케이슨이 유성각을 사용한 것 정도의 신체 능력을 얻거나 혹은 그 이상의 기를 대기를 차는데 사용할 수 있거나 하는 것. 그 두가지 중 하나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능력 이상의 기술이 되겠지."
벤하르트도 카실러스가 이야기 하는 것은 충분히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케이슨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하지는 않다. 하지만 벤하르트 자신이 낼 수 있는 힘을 뛰어 넘은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조건과 각오, 다른 의미로는 반동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는 그 기술에 고집을 할 필요가 없지."
"네?"
"타인의 기술을 익히고자 하는 자세는 좋지만, '결과'를 얻기 위한 '방법'은 과연 그것 하나일까? 에르니아 자네는 만드는 자. 자신의 장기를 살리는 게 좋겠지."
카실러스는 기를 만들어 공중에 발판을 만들었다.
"나는 기로 형태를 유지하는 것을 쉽게 하지 못해. 여기 이렇게 발판을 만든다고 해도 '설 수 없지' 기를 낭비하듯 쏟아 부어 낸다면 이렇게 서는 것도 가능할 거야."
카실러스는 자신이 만들어 낸 기에 올라 탔다.
"할 수는 있지만 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지?"
그는 발판을 박차고 날아 올랐다.
"내 입장에서는 마법을 사용해 나는 것이 연비로도 성능으로도 우월한데."
"그렇군요."
벤하르트는 카실러스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곧장 검을 휘둘러 허공에 발판을 만들고 그것을 박차 날아 올랐다. 용이니 새니 거창하게 만들 필요 없이 작은 기의 덩어리를 만드는 것만으로 그는 케이슨이 했던 것 같은 움직임을 낼 수 있었다.
"하고자 한다면 그 '만드는 재능'의 효율을 높이는 쪽을 연마하는 게 알맞은 노력이라는 게지."
"그렇군요. 말하고 싶으신 것은 자신에게 맞는 방식을 취하라는 것이겠군요."
카실러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방식이라.."
회상을 끝내고 벤하르트는 검을 들고 잠시 생각했다. 카실러스의 말은 비단 공중밟기의 방법'만'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니었다.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한. 하지만 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이다.
"어이!! 에르니아!"
케이슨이 손을 흔들며 벤하르트를 다급히 불렀다.
"무슨 일이에요?"
"곧이다. 곧 시공의 틈이 나올 거야. 얼마 남지 않았어."
"흐음 그렇다면 서둘러야 겠군."
카실러스는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뭘 말입니까?"
벤하르가 묻자 카실러스가 말했다.
"지금까지의 교정은 무엇을 위한 교정이었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선 실력만 필요한 게 아니지. 어디 협력을 구해 '마도구'를 만들어 보도록 할까?"
"마도구?"
카실러스는 벤하르트와 케이슨을 데리고 다시 공방을 찾았다.
"이래뵈도 나는 마법에 상당한 자신을 가지고 있지."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반쯤 해탈한 반응이었다.
"어련 하시겠어?"
"마법과 기는 같은 에너지를 사용하지만 그 방식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에르니아의 검은 기를 다루는 것. 그렇기에 특정한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는 뛰어날 지언정 다방면적으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아. '검'은 만들 수 있지만 검 내부의 세부적인 내용을 조율하는 것은 서툴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그 부분을 내 마법의 술식으로 보조한다."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물론 누구나 할 수는 없고 꽤 힘들지만, 왜 그때 보여 줬잖냐. 나라면 보조 할 수 있어."
'괴물..'
레니아든 덴이든 천재라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온 벤하르트였지만, 눈 앞에 있는 사람은 정말 자신의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카실러스는 자신의 손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자 그 마력의 술식을 넣어서 만들어 주게. 지금이라면 검이 아닌 다른 것이라도 능숙하게 만들 수 있겠지? 뭐가 좋을까. 그래 목걸이가 좋겠군."
"뭘 만들라는 겁니까?"
"자네의 본래의 외모를 인지하지 못하게 하는 도구. 그것을 상상하며 만들게."
벤하르트는 망설이지 않고 도구를 만들었다.
"우옷.."
케이슨은 벤하르트가 폭발적으로 내뿜는 기를 보고 탄성을 내지르며 놀랐다.
곧 아무 장식도 없는 투박한 은 목걸이가 두개 완성되었다. 벤하르트는 완성된 목걸이를 착용해 보았다.
"뭐야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케이슨이 말했다.
"그야 에르니아와 자네가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 자네 둘은 예외로 설정했으니까, '그런 것을 위한' 술식인 거네."
"그러십니까. 그런데 저거 효과가 있기는 한 건가?"
"아주 제대로 작동하고 있으니 걱정 말게. 행동거지를 조심한다면 단순한 외모로는 '누구도' 저게 에르니아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테니.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구만, 내가 돕기는 했지만, 훌륭한 보물이다."
원래 자신만만하기는 했지만, 지금의 카실러스는 정말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좋아하는 듯 보였다.
"자 이건 자네 것."
"아니 나는 베.. 어험. 에르니아와 다르게 시공 여행자라 상관 없는데."
"글세."
그렇게 말하며 카실러스는 슬쩍 벤하르트를 바라 보았다. 그 시선에 벤하르트는 전날 있었던 카실러스와의 대화를 떠올리고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하긴 주는 것을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말하고 케이슨은 목걸이를 챙겼다.
"그리고 그 도구는 시동어를 사용할 수 있게 해둿네. 끄기 위한, 그리고 켜기 위한 시동어는 스스로 생각해 보게나. 일단은 사용하지 않는 게 좋겠지만."
"읏!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군. 열리는 곳은 그 신역인가.. 슬슬 이동해야 겠어."
"때마침이라는 느낌이군."
카실러스의 말은 벤하르트에게 유난히도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벤하르트와 케이슨 그리고 카실러스는 달인들 답게 쉽사리 신역을 올랐다. 도중 마물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당연히 셋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이상하리 만치 조용한 영역에 시공이 틈은 일렁거리고 있었다.
"후후.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할 틈이 없겠군. 멜이 아쉬워 하겠어."
"그럴려나요."
"하지만 이게 옳은 것이겠지."
"어이 카실러스."
"뭔가?"
"인정하기는 싫지만 너는 정말 천하의 기재다. 후우..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걸 가르쳐 줘서 고맙다."
케이슨은 얼굴을 돌리고 툴툴 거리며 감사를 표했다.
"그런 감사는 그쪽의 에르니아에게 하는 게 어떨까?"
"응? 그게 무슨 뜻이냐?"
"그리고 에르니아. 아니 벤하르트 내가 자네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순간 섬칫 몸을 떨었지만,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그' 카실러스가 하는 행동이다. 설사 무모하다고 해도 무모하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이미 벤하르트와 케이슨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카실러스를 인정하고 있었다.
"벤하르트... 하르크. 벤하르트 하르크입니다."
"후후 고맙네 벤하르트 하르크. 나와의 만남이 자네의 이 여행, 아니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되기를 기원하도록 하겠네."
카실러스의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공의 틈이 격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이 에르.. 에라이 벤하르트! 곧 닫힐거다. 가야 해."
벤하르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카실러스에게 인사했다. 감사하다는 말 하나 없는 단순한 행위.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그 정갈한 행동 하나로 벤하르트의 감사를 느낄 수 있었다. 감사하다느니 잘 가라느니 그런 허울 뿐인 말은 이미 그들에게는 필요치 않았다. 인사를 끝낸 벤하르트는 곧장 시공의 틈으로 몸을 날렸다.
"고마움을 표해야 하는 것은 과연 어느 쪽일까."
카실러스는 미소를 띠고 한동안 벤하르트가 사라진 시공의 틈을 바라보았다.
- 작가의말
항상 2주에 한번식 쓰는 것 같은 이 기분...
추석 전에 한번 써서 올리고 싶었는데, 결국 못 쓰고 있다가 부랴부랴 써보네요. 좀 마구 써내린 기분이 들어서 나중에 살짝 수정할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 한가위는 엄청난 연휴던데,
모두 즐거운 한가위 되셨으면 좋겠네요. ㅇㅅ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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