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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달건달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장편 미래 무협 -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 제1장 장미가 있는 전장(戰場)

장편 미래 무협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1장 장미가 있는 전장(戰場)

 

추수가 끝난 고량 밭에 시체들이 구르고 있었다. 열선포에 맞아 녹아내린 전차와 격추된 공병(空兵) 검독수리 단승정(單乘艇)과 새매 무인(無人) 비행정이 망자들의 저승행 노자로 불타고 있고, 까마귀 떼가 먹잇감을 찾아 하늘을 수놓았다.


전쟁, 인간이 만들어낸 생존투쟁의 극한적인 발로. 2057, 동아시아연방 동북자치지구 랴오닝성 안산시 인근의 황야에서, 동아시아연방군과 분리주의연맹군은 전쟁놀이를 펼쳐 인간 청소를 하였다.


주검으로 뒤덮인 황야에서 한 줄기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죽음을 눈앞에 둔 자의 마지막 숨소리, 용병 차림의 진욱이 보병용 소총을 굳게 쥔 채로 전차 옆에 쓰러져 한 줄기 생기를 붙잡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허공을 바라고 부릅뜬 눈은 하나를 잃어 외짝 눈, 그나마 초점을 잃었으니 정녕 죽은 자의 그것이었지만, 아직 삶을 끈을 놓지 않은 증거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는가? 어허! 가슴이 부셔지고, 눈알을 관통당해 구멍이 뚫렸는데. 질긴 목숨이 아직 숨을 놓지 않았구나.


아니다. 이미 죽어 주검이 된 지 오래인데 원기가 사라지지 않아 추태를 부리고 있는 걸게다.


진욱은 스스로 미심쩍어 초점을 잃은 외눈으로 하늘을 담을 듯 부릅떴다.


40대의 다부진 얼굴이었다. 허나 그 또한 부조화라, 시체를 헤집어 유류품을 노리는 전쟁터의 부랑아 각다귀들의 주의를 끌어 눈동자에 인영이 비쳤다.


전쟁터를 떠도는 각다귀들의 삶은 약탈에서 이루어진다. 어린 각다귀 하나가 진욱의 손에서 총을 빼앗았다.


약탈을 생업으로 가진 각다귀는 열 살을 넘을 정도의 나이였지만 죽음에 무심할 줄 알았다. 이 자는 죽어가는 인간, 죽을 인간에게 총이 무슨 소용이랴.


죽은 자는 하나의 사물일 뿐 산 자의 삶에 위해를 끼치지 못한다. 오히려 이렇게 고철을 남겼으니 감사할 일, 각다귀는 응당 취해야 할 물건을 취하듯이 총을 챙겨 들었다.


죽을 사람은 죽어야 하는 게 전쟁이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주검을 양분삼아 살아남는 법, 억울하거든 살아남아 눈이라도 흘겨라 하는 게 각다귀의 법칙이었다.


각다귀의 눈에 진욱의 목에 걸린 펜던트 목걸이가 보였다. 보석과 금은은 환영받는 유류품이다. 각다귀는 진욱의 목에서 목걸이를 떼어냈다.


까맣게 녹이 슬은 청동제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뚜껑이 닫혀 있었는데 따로 장치가 있는 듯 열리지 않았다. 각다귀는 흥미가 없어져서 전차를 향해 내던졌다.


누군가의 생전에 보물로 위함을 받던 물건은 누군가에게는 쓰레기일 뿐이다. 파삭! 볼품없이 던져지는 펜던트 목걸이. 그 서슬에 펜던트의 뚜껑이 열리고 안쪽에 숨겨져 있던 사진이 드러났다.


넝쿨장미가 꽃을 피우고 있는 정원의 벽에 기대어 한 소녀가 웃고 있었다. 열두어 살이나 됐을까. 장미꽃만큼이나 화사한 소녀의 웃음.


인생에 웃음만이 존재하는 시절을 사진으로 남긴 소녀는 함께 찍힌 장미꽃만큼이나 아름다웠다.


뚜껑이 열리면 오르골이 작동되도록 장치가 된 듯 음악소리가 시작되었다.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하는 메기의 추억’. 그리고 이어지는 곡은 2040년대 초에 유행했던 처용의 노래였다.

 


서라벌 밝은 달 아래 매화꽃 그늘에서

천년을 함께 살자 맹세한 님

꽃이 피고 지고 꽃잎이 티끌 되고

향기야 있건 없건 고운 님 진토 되어도

천년의 맹세야 변할까 보냐.

 


오르골 소리에 되돌아온 각다귀가 목걸이를 집어 들어 펜던트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해본다. 그때마다 달라지는 노래는 메기의 추억과 처용의 노래 두 곡이었다.


전장에 처연하게 울려 퍼지는 노래 소리. 각다귀는 만족한 듯 펜던트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각다귀와 함께 멀어지는 처용의 노래를 들으며 진욱은 하나만 남은 눈을 여전히 부릅뜨고 전장을 보고 있었다. 죽음만이 존재하는 전장의 폐허에서 진욱의 눈동자는 각다귀의 뒷모습을 그림자로 비추었다.


그래 가져가거라. 생전의 나도 그 펜던트의 주인공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살았고, 이제 그녀를 쫓아 저 하늘로 흩어지고 있단다. 이 인연으로 네 인생이 어찌 변화할지 모르지만, 어차피 세상의 일이야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더냐.


까마귀 한 마리가 진욱의 눈을 노리고 내리 꽂혔다. 진욱이 일생 의지하여 세상을 보던 눈알 중 하나가 까마귀의 한 끼 식사가 되어 삼켜졌다. 까마귀는 만족한 듯 하늘로 날아올라 멀어졌다.


하나 남은 눈알을 까마귀에게 뽑힌 진욱의 얼굴은 더욱 처참하게 변했다. 가뜩이나 시신에 다르지 않던 진욱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자조를 했다.


나도 인간으로써의 삶을 살던 시절이 있었던가. 아내를 맞고 아이를 낳고. 들에 나가 밭을 일구고, 정원에 장미꽃을 피우고.


그래, 장미꽃. 나는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열심히 달렸어.


죽어가는 자의 깊은 시름이 또 한 차례의 낼 숨을 만들어 전장에 뿌렸다. 마지막 순간이 가까운 자의 가쁜 숨소리.


까마귀 떼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각다귀가 까마귀 떼를 쫓으며 돌아오고 있었다. 그새 달라진 모습. 손에 장미꽃을 들고 있다. 피처럼 붉은 장미꽃.


각다귀는 진욱의 가슴에 장미꽃을 놓았다. 진욱은 코를 벌름거려 향기를 맡았다.


죽어가는 나를 위해 꽃을 가져왔느냐? 착한 아이로구나. 오체육신 중에 유일하게 남은 살아있는 기관인 진욱의 코는 장미꽃 향기를 흠씬 받아들였다.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유품을 빼앗는 각다귀는 그렇게 조화를 남기는 걸로 미안함에 대신했다.


펜던트 목걸이를 훌쩍 들어 보이는 각다귀. 뚜껑이 열려 처용의 노래가 다시 흘러 나왔다.


각다귀 또래의 소녀가 장미꽃 가득한 정원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다. 노래는 소녀의 목소리였다. 각다귀가 만족한 듯 빙그레 웃는다. 장미꽃을 주었으니 펜던트 목걸이를 가져도 좋지 않으냐 묻는 것이겠지.


착한 아이구나, 나도 한때 너처럼 장미꽃을 사랑할 줄 아는 아이를 가졌던 적이 있었단다. 그 아이의 애비가 나였지. 그렇다면, 어미는…… 어미는?


진욱의 생각은 계속되지 못했다. 무인비행정 새매의 무리가 기관총탄을 퍼부으며 다가왔다. 전투의 승자가 마지막으로 행하는 권리 행사인 생존자 사냥. 기관총탄에 맞은 시체들이 툭툭 튀어 올랐다가 떨어진다.


중무장 무인비행정 새매는 동아시아연방의 정규군이 자랑하는 살인병기였다. 명령을 받으면 표적을 쫒아 어디까지라도 따라가는 궁극 병기. 그 가공할 병기의 집단이 전투의 마무리를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각다귀가 놀라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 손에 펜던트 목걸이를 쥔 채로. 그 움직임에 반응하여 새매들의 총탄이 뒤따른다. 강약부동이라 각다귀의 죽음은 순간일 터였다,


진욱은 필사적으로 오른손을 들었다. 이 아이는 내게 호의를 베풀었다! 갚아야 한다!


진욱의 오른손 손가락들이 권총 모양을 만들어 무인비행정 새매를 겨누었다.


이지선(二指禪). 진욱이 일생을 함께 한 무예. 진욱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한번만, 한번만 더 도와다오!


눈알을 잃어 감각만으로 발해진 공격이 새매들을 뒤쫓아 덮쳤다. 그러나 별무소용. 새매들의 기관총탄은 각다귀의 등에 구멍을 뚫어 놓았다.


간발의 차이로 진욱의 이지선이 새매들을 뒤따라 격추시켰다. 정확하게는 새매 비행정과 본선의 조종자 사이의 통신을 차단한 것이지만. 전파가 전기의 기운이라면 이지선은 인체의 기운이었다. 강한 기운이 약한 기운의 운동을 억제한 것.


진욱은 자신의 무예 이지선이 아직 발동될 수 있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각다귀는 이미 생명을 잃은 후였다.


동력을 잃고 빙그르르 떨어지는 새매 비행정. 나는 약해졌구나. 내 긴고(緊箍)를 떠나보낸 후, 본원진기를 닦아왔지만 한 아이를 살릴 정도의 성취도 아니었어. 이렇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까지 몰리고……


긴고(緊箍). 투전승불(鬪戰勝佛) 손오공을 성불하게 만든 수호령. 애당초 제멋대로인 성품을 고치기 위한 수단으로 머리에 씌워졌지만 결국 성불한 후 광휘가 되었다지.


긴고(緊箍)가 특화되어 붙어 있었던 오른쪽 다리에 신경을 집중시켜 보았다. 종아리 부분에 부운 것처럼 부풀어 있던 오른쪽 다리가 긴고의 자취였다. 헌데 반응이 없다. 스스로 몰아낸 것. 그때에 엄청난 고통을 겼었지.


나도 내 긴고를 그냥 수호령으로 받아들여 공생을 계속했더라면 이런 모습은 안 되었을지도……


아냐, 나는 역시 긴고로부터 독립하기를 잘했어. 긴고는 수호령으로 볼 수도 있지만, 긴고주가 발동할 때마다 내 전체를 통제하려 들곤 했던 족쇄이기도 했지.


게다가 나를 긴고주로 묶었던 여인은 한때 내 아내였던 여자…… 나는 내 아이를 낳아준 여자를 죽여 긴고로부터 놓여났지. 그 때문에 죽음의 사자에게 쫓겨 이 상황에 이르게 되었지만.


무인 비행정 새매들의 새로운 집단이 몰려왔다. 더욱 많은 숫자의 새매들이 한층 강한 힘을 몰고 왔다. 진욱은 사자들이 왔음을 알았다.


내 아내의 좌우시자였던 좌인, 좌오. 온 천하를 통틀어 단 둘뿐인 전광인간(電光人間). 저들은 광자(光子)로의 변신이 가능한 절대병기 빛 인간. 그간 주인의 복수를 위해 나를 쫓았고, 이제 마무리를 하려고 오고 있다.


내 아내 유키는 전광인간을 다스릴 수 있었던 유일한 인간이었지. 그녀가 죽은 상황에서, 전광인간은 살인병기일 뿐이다. 나는 세상을 위해 최후의 싸움을 해야 한다.


진욱은 필사적으로 진기를 끌어 모아 이지선의 준비를 했다. 검지와 중지를 세워 앞으로 내밀고 다른 손가락들은 접는 형식의 손가락 권총 이지선. 처음 이지선을 보았을 때 스승 권사명은 말했다.


그건 과학이다. 기를 모으는 방법만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하지만 지금은 적이 너무 강해 대적이 어렵지 싶구나.”


30년쯤 전의 기억이었다. 쉽게도 떠오르는구나. 그때에 스승은 참으로 쉽게 이지선을 시전하여 새매들을 격추시켰지. 그리고 어린 나와 내 동생 세나를 구하려고 스스로 위험에 뛰어들으셨어.


2033년이었던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의 생사를 놓고 희롱을 일삼았던 내 인생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어. 이전의 기억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날의 사건 이후로 내 상궤를 벗어난 인생 역정은 시작되었으므로 나는 그 날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


동아시아가 통일전쟁을 마감한 직후, 폭격으로 반쯤 폐허가 된 의정부의 한 거리에서 나는 운명을 시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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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일상 | 장편 미래 무협 - 언제나 장미가 피어 있는 곳 / 제1장 장미가 있는 전장(戰場) 1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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