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84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84
“그 동안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말하지 않아도 된다.”
울음소릴 그친 동자승이 입을 열려 하자 무진이 막는다.
“아니에요. 어차피 전 오래 견디기 어려워요.”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는 구나.”
“전 벌써 반 년째 쫓기고 있어요.”
“그 동안 힘들었겠구나.”
“이유가 뭐니?”
무진에 이어 호란도 의문을 가진다.
“제가 그걸 봤기 때문이에요.”
“그거라니? 혹시 무심대사가 살해당했느냐?”
“그..그걸 어떻게 아세요?”
“이 형이 원래 눈치가 10단 이란다.”
“맞아요. 사부님이 놈들에게 살해당했어요. 제가 보는 앞에서 말이에요.”
“놈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거냐?”
“저도 누군지는 몰라요. 생전 처음 보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어요. 복면을 하고 있었고요.”
“근데 어떻게 도망쳤니?”
“그 때 전 사부님 숙소를 청소하는 중이었어요. 놈들이 사부님의 방안으로 들어섰을 뗀 다락방에 있었고요.”
“근데 들켰다?”
“제가 실수를 했어요. 급한 마음에 그들이 모두 떠난 줄 알고 너무 일찍 다락에서 내려온 거죠. 만약 그 때가 대낮이 아니었다면 전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예요.”
“그들이 보는 눈이 많아서 널 해치지 못했구나.”
“예. 만약 주위에 사람이 없었다면 전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할 거예요.”
“근데 왜 도망을 다니니? 소리를 지르거나 장문인에게 말했으면 됐을 텐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분명히 장문인께 말씀을 드렸거든요.”
“그런데도 보호하기는커녕 암살을 시도한단 말이냐?”
“예. 전 이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요.”
“걱정 마라. 이 누나가 있는 한 아무도 널 해치지 못할 테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 서로 인사도 안 했네. 난 호란이라고 하고, 여기 있는 형은 무진이야.”
“전 일승이라고 해요.”
“근데 요즘은 여자도 소림에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이구나.”
무진이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한다. 일승을 여자라고 부른다.
“예에?”
“여자라고요?”
동자승은 물론이고, 호란도 놀란다.
“오라버닌 대단한 분이군요. 지금껏 사부를 제외하곤 제가 여자란 걸 눈치 챈 사람은 없었는데.”
“무심대사가 널 거두었구나.”
“예. 제가 다섯 살 때 가족들이 홍수로 모두 죽고 길에 버려진 걸 사부님이 구해주셨어요.”
“쯧쯧쯧, 그런 분이 돌아가셨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저도 잘 모르겠어요? 사실 갈 데가 없어요.”
“그럼 이 언니와 같이 갈래? 다른 건 몰라도 매일 같이 만두는 먹여줄 수 있단다.”
“정말요?”
“당근이지. 이 오라버닌 언니의 남편이고, 형제들도 많단다.”
“그보다 사부님의 복수를 해주실 순 없으세요? 제가 어려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잘 몰라요. 하지만 부모님과 같은 사부의 복수를 꼭 하고 싶어요. .... 아니에요. 제가 너무 어려운 부탁을 드렸네요. 취소할게요.”
“네 말대로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해줄 수는 있다.”
“정말요?”
“그렇긴 한데, 그런 일을 아무 관계가 없는 네 부탁만으로 들어줄 순 없잖니?”
“일승이, 아니 혜화가 언니 오빠께 인사를 올려요.”
혜화는 눈치가 빨라 호란의 뜻을 금방 알아챈다.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큰 절을 올린다.
“그래. 앞으로는 우리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살자구나.”
호란은 혜화의 손을 잡아 일으켜 자리에 앉힌다.
“고..고마워요.”
“네 말을 믿지만 동시에 의문도 많단다.”
“저도 그래요. 소림 제일고수라는 사부께서 그렇게 쉽게 돌아가시는 것도 그렇고, 장문인은 물론 사형들까지도 사부님의 죽음을 나 몰라라 했어요.”
“혹시 사부가 죽음을 위장한 건 아니더냐?”
“그건 아니에요.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어요.”
“으음! 그렇다면 두 가지뿐이다.”
“두 가지라면...?”
“한 가지는 소림사가 어떤 세력들로부터 위협을 받아 무심대사를 제거한 것이고, 다른 건 소림사의 핵심 세력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는 것이다.”
“제가 소림에서 생활한 이후 장문인과 사부님은 누구보다 가깝게 지냈어요. 절대로 배신할 분들이 아니에요.”
“우리도 1년 전에 두 분을 뵌 적이 있는데 너와 같은 생각을 했다.”
“1년 전에 사부님을 뵀었다고요?”
“그래. 왜?”
“혹시 장문인으로부터 신표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랬지.”
“보여주실 수 있어요?”
“그야 어렵지 않지.”
무진은 품속에서 작은 신표를 하나 꺼내 보여준다.
“아! 맞아요. 맞아.”
“너도 이걸 아느냐?”
“사부님께서 반 년 전쯤에 신표에 대해 설명을 하시면서 그걸 가지고 있는 분을 만나면 한 가지를 확인하고 이걸 보여드리라고 했어요.”
이번에는 혜화가 품속에서 서찰을 하나 꺼낸다.
“뭘 확인하라더냐?”
“오라버니께서 장문인과 사부님께 한 가지 약속을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랬지.”
“그게 무엇입니까?”
“향후 10년 내 소림에 문제가 생기면 도와주겠노라 약속했다.”
“아! 맞습니다. 그럼 이걸 확인하십시오.”
서찰은 밀봉돼 있다. 혜화도 보지 않은 모양이다.
“쯧쯧, 그때 영감탱이는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군.”
무진은 혼자 중얼거리며 서찰을 확인한다.
“으음!”
서찰을 읽는 무진의 표정이 제법 심각하게 변한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는 표정이 한껏 밝아진다.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사부는 크게 두 가지를 적어 놓았다.”
무진은 서찰을 호란에게 넘기면서 말을 시작한다.
“한 가지는 널 부탁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죽고 나면 복수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정보를 적었더구나.”
“저를 요?”
“그래. 설사 복수가 어렵더라도 너만은 꼭 부탁한다고 하더구나.”
“사...사부! 흐흐흐흐흑!”
사부가 자신을 부탁했다는 말에 혜화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이번에도 호란이 소리를 차단해서 주위 사람들은 전혀 듣지 못한다.
“근데 두 분은 소림엔 어쩐 일로 가시나요?”
혜화는 한참을 울더니 갑자기 궁금해졌는지 입을 연다.
“절에 뭐 하러 가겠니?”
“소림사는 불공을 드리는 곳이 아니라서....”
“네 오라버니께서 건강도 안 좋고, 나도 마음의 안정이 필요해서 얼마간 머물 생각이다. 오라버닌 장경각에서 책을 읽을 생각이신가 봐.”
“아, 예. 근데 두 분이서 사부의 복수를 할 순 있으세요? 오라버닌 몸도 안 좋으신 것 같은데....”
혜화는 그제야 무진의 오른팔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네 사부가 우리에 대해서 뭐라고 하더냐?”
“믿을 수 있는 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상하네. 딱 한 번 봤을 뿐인데 뭘 보고 그런 말을 했을까?”
“제가 똑같이 물었더니 사람은 많이 본다고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라고 하셨어요.”
“제법 그럴싸한 말이네. 근데 믿는다는 것과 복수를 할 수 있다는 건 다를 텐데?”
“그것까진 잘 모르겠어요. 전 오라버니와 언니가 좋은 분이라는 건 알겠어요. 그것만으로도 족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손해 볼 건 없을 거다.”
“전 앞으로 어떻게 할까요?”
“일단 우리랑 같이 소림으로 가자.”
“예에? 저더러 호랑이 굴로 들어가잔 말씀인가요?”
“지금까진 소림의 일승이었지만, 지금부턴 혜화이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다.”
“이름만 바꾼다고 달라지나요? 서..설마 제가 변장을 한 것도 알고 계세요?”
“그게 어때서? 나도 약간 변장을 했는데....”
“언니도요?”
“그래. 니 오라버니가 내 미모가 너무 뛰어나다며 숨기라는 거야. 그래서 할 수 없이 약간 손질을 했지.”
호란은 농을 하면서 손으로 살짝 얼굴을 만진다. 그러자 주위가 환해지며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된다. 물론 그 전에 호란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미..믿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이쁠 수가 있죠?”
“지금보단 더 나은 것 같니?”
“그럼요. 지금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예쁘지만, 원래 모습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어요.”
혜화의 말대로 호란의 미모는 갈수록 빛이 난다. 월계에서 무진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예쁘긴 해도 지금처럼 돋보이진 않았다. 조금 전 변장을 지운 얼굴은 황실의 미인들조차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미모다.
“호호호! 말이라도 고맙구나. 우리 혜화도 앞으론 예쁘다는 소릴 많이 듣게 될 거야.”
“고마워요. 저처럼 사내같이 생긴 계집이 언니처럼 예쁜 분에게 그런 말씀을 들으니 너무 기분이 좋아요.”
“다행이구나. 앞으로도 계속 밝게 웃어라. 그게 네 사부가 원하는 것일 거야.”
“근데 제 얼굴도 보지 않고 어떻게 아세요?”
“마음의 문을 열면 누구나 그 정도는 볼 수 있단다.”
“저도요?”
“당연하지. 너도 오라버니가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배우기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단다.”
“그럼 당장 배울래요.”
“하하하! 호호호!”
“우리 혜화가 그 동안 무공에 굶주렸던 모양이구나.”
“사부께선 처음부터 전 중이 될 수 없다며 소림의 무술은 가르치지 않았어요.”
“전혀?”
“예. 대신 다른 문파의 무공을 몇 가지 가르쳐 주셨어요.”
“그랬구나.”
“자, 그럼 일단 옷부터 바꾸러 가자.”
“죄송해요. 전 그럴 돈이 없어요.”
“호호호! 네 오라버니는 비록 차림새는 이래도 중원제일의 부자란다. 걱정 말고 가자.”
“중원제일의 부자라면 황금상단의 단주라던데....”
“황금상단의 단주보다 더 부자일 걸?”
“그게 가능해요?”
“호호호! 그건 지내다 보면 차차 알게 될 거다. 가자.”
무진이 먼저 일어나자 두 사람도 따라 나선다.
<진시황의 옥쇄가 나타났다!>
<진시황의 옥쇄는 도난당했다!>
<진시황의 옥쇄에는 보물 지도가 그려져 있다!>
<천하제일의 도둑이 가곡에 나타났다! 그가 진시황의 옥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소문이 어제부터 가곡에 퍼지기 시작했다.
무진 일행이 가곡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일승을 혜화로 변신시키는 일이었다. 우선 옷가게에 들러 여자로 변신하고, 얼굴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렸다. 근데 옷가게를 나서는 순간 혜화가 멈칫하며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살핀다.
“동네 분위기가 왜 이렇죠? 저 때문은 아니겠죠?”
“글쎄다? 네가 사람들이 놀랄 만큼 예쁘긴 해도, 저들은 너와 관계없이 저러는 것 같은데...”
“호호호! 오라버니도 참, 제가 언제 제 얼굴 때문에 저런다고 했어요? 혹시 절 찾으러 다니느라 저러는 줄 알았죠.”
“그건 아닐 거다. 소림에서도 대놓고 널 찾진 못할 테니까.”
“누가 널보고 일승이라고 하겠니?”
“그죠? 전 이 얼굴로 소림에 가보고 싶어요.”
“곧 가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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