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80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80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건방진 놈. 네놈이 지금 잔머리를 굴리는 모양인데, 아무리 발악해도 내 손을 벗어나진 못한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우욱!”
왕명은 점차 얼굴이 붉어지며 혈관이 튀어나온다. 이 상태라면 얼마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백발마녀에게 달려들 것이다.
“컥! 퇫!”
그는 혀를 깨물어 피를 토하며 견딘다.
“지독한 놈, 하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후후후! 당신에게 몸을 바칠 바엔 자결을 선택할 거요. 이렇게 말이오. 커억!”
왕명은 다시 혀를 깨물려 한다. 근데 그보다 백발마녀의 동작이 더 빠르다. 그는 혈도가 막혀서 움직이질 못한다.
“그럴 순 없지. 네 정도 내공이면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바꿀 수도 있을 텐데 말이야.”
“으으으으읍!”
왕명이 소리를 내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백발마녀가 손을 들자 수십 명의 미녀들이 날아와 하얀 천으로 주위에 사각형의 공간을 만들고 사라진다.
“어때? 이 정도면 분위기가 제법 그럴싸하지?”
백발마녀는 왕명에게 다가와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어멋!”
그녀는 그의 옷을 다 벗기곤 놀라며 그 자리에 몸이 굳어버린다.
“호호호호! 점잖게 생긴 놈이 물건은 괴물이구나. 이런 걸 ‘꿩 먹고 알 먹고’라고 하던가? 호호호호!”
그녀는 뭐가 좋은지 계속해서 웃으며 자신도 옷을 벗는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너도 나랑 즐기면 후회하진 않을 테니까. 이 정도면 어떠냐?”
그녀는 나신의 몸을 그대로 왕명에게 보여준다. 그걸 보는 순간 왕명의 눈빛은 피가 흐를 듯이 붉어진다.
“으음! 이런, 이런! 나도 흥분했나? 이런 일은 처음이네.”
백팔마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만지며 가볍게 흥분한다.
“별일이네. 안 되겠다. 빨리 해치워야지. 이러다가 내가 넘어가겠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져 곧바로 누워 있는 왕명의 위로 올라간다.
“어멋!”
순간 왕명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바닥에 눕힌다.
“이 자식이, 어디를... 허억!”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자신의 뜻과는 별개로 하나가 돼 격렬하게 움직인다.
‘우욱! 뭔 놈의 거시기가... 우욱! 이러다간 큰일 나겠다. 정신 차려야지.’
백발마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흡정대법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러자 왕명의 단전에 모여 있던 기운이 서서히 거시기를 통해서 그녀의 몸으로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호호호호! 천운이다. 내력이 이렇게 강한 놈인 줄은 몰랐다. 단숨에 11성의 경지에 오르고 있다. 흐흐흐흐, 놈의 기운을 모두 흡수하면 대성을 이룰 수도 있겠다.”
백발마녀의 말대로 그녀의 머리카락이 백발에서 조금씩 흑발로 변하고 있다. 근데 모든 게 그녀의 뜻대로만 되는 건 아니다.
“허억! 왜 이러지? 중요한 순간인데, 으음!”
그때까지 순조롭게 빠져나오던 왕명의 기운이 갑자기 멈추더니 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녀의 기운이 왕명에게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왕명이 어떤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다. 그냥 기운이 그렇게 흘러갈 뿐이다.
“뭘 그렇게 고민하시오?”
“허억!”
갑자기 왕명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그걸 듣고 놀란 백발마녀는 기혈이 막혀서 움직이질 못한다. 잘못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왕명에게로 빠져나갔던 기운이 다시 그녀의 몸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것도 단순히 돌아오는 게 아니라 몸 구석구석에 흩어져 있던 기운을 모두 끌어 모아 다시 왕명에게로 빠져나간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십 회. 마지막에 백발마녀의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갈 때는 앙상한 뼈만 남게 된다. 그리곤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
“아! 개운하네. 미세혈관까지 다 씻어낸 듯하군.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원래 자연으로부터 온 것을 돌려줬을 뿐이니까.”
왕명의 말은 백발마녀의 기운으로 자신의 전신 혈도의 통로를 넓힌 다음 나쁜 기운들을 모두 자연으로 돌려보냈다는 뜻이다.
파라라라랑!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발마녀의 몸은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린다. 옷과 장신구는 물론 주변을 가리던 하얀 천까지도 남기지 않는다.
“우욱! 콜록! 콜록!
이상한 것은 왕명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더니 갑자기 피를 토한다. 이전보다 훨씬 더 맑고 투명하던 피부도 시커멓게 변했다. 누가 봐도 중독증상이다. 그런 상태에서 산 정상을 향해 몸을 날린다.
“노..놈이 도주한다.”
“언덕을 넘게 해선 안 된다. 잡아라!”
수십 명의 여인들이 그를 따라서 언덕으로 달려간다.
낭인촌의 촌장 곽정은 호란이 사라진 후 매일 같이 만두를 먹기 위해 낭인촌과 가장 가까운 주루로 향한다. 호란이 만든 것만큼의 맛을 내진 못하지만 그 때의 추억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매일 찾는다. 오늘도 그는 청사와 함께 만두를 시켜놓고 먹고 있다.
“호란 누님이 만든 것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만두 맛을 말하는 거냐?”
“예.”
“후후후, 그걸 어떻게 비교하겠니?”
“그 정도로 차이가 난다는 말씀입니까?”
“차이가 난다기보다 완전히 다른 음식이라고 봐야겠지.”
“같은 만둔데 차이가 나면 얼마가 난다고 그러십니까?”
“하긴 네가 뭘 알겠냐? 우리 아가씨가 만든 만두는 단순한 만두가 아니라 먹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오리고기 맛도 나고, 새우튀김의 맛과 탕수육의 맛도 난단다. 이래도 이해하기 어렵겠지?”
“오히려 궁금증만 더 합니다.”
“근데 여기 만두가 오늘따라 더 맛이 없네. 약간 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호란 누님이 만든 만두를 생각하시니까 더 그렇죠.”
“그런가? 오늘은 이 정도로 먹어야겠다.”
곽정은 그만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그러자 청사도 따라 한다.
“왜?”
“저도 그만 먹을래요.”
“부용이 때문이냐?”
“예, 요즘 자꾸 입맛이 없다고 해서. 몸도 자꾸 야위는 것 같고.”
“입맛이 없고, 몸이 야윈다고?”
“예.”
“예끼, 이놈아!”
곽정이 청사의 머리에 꿀밤을 준다.
“아야! 왜 그러세요?”
“무식한 거냐? 아님 무심한 거냐?”
“무슨 말씀이세요?”
“이 자식아, 지나가는 똥개한테 물어봐라. 여자가 입맛이 없고, 몸이 야위는 게 무슨 증상이냐고?”
“큰 병인가요? 아얏! 촌장님! 제가 맞는 거 싫어하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래서 때리는 거다. 이놈아! 대체 네놈이 무공 말고 아는 게 뭐냐?”
“그거야 뭐.... 대체 뭡니까? 설명을 해주셔야 알죠. ... 설마 둘째를?”
청사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째를 낳은 지가 몇 개월 되지 않아 긴가민가한 것이다.
“까불지 말고, 부용이가 먹고 싶은 게 뭔지 물어보고 밤이고, 낮이고 사줘라.”
“왜 안 해봤겠습니까? 하지만 입맛이 없다는 데 어떻게 합니까?”
“이놈아, 입덧을 하면 여잔 다 그런 거야. 그러니까 군말 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고 먹고 싶은 거 많이 사줘라.”
부용은 첫째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는다.
“첫째를 가졌을 땐 입덧 없이 잘 넘어갔는데.”
“그거야 애를 가질 때마다 다르지.”
“어째 장가도 안 가신 촌장님이 저보다 더 잘 아십니까? 혹시 숨겨 놓은 자식이 있는 거 아닙니까?”
“미친 놈! 그런 거라도 있으면 좋겠다. 근데 너 안 가고 계속 있을 거니?”
“예? 아닙니다.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촌장 어른! 부용이가 둘째를 가진 건 분명하겠죠?”
“궁금하면 의원을 데려가서 진맥을 해보든지. 아니다. 부용이가 이미 의원에게 확인했을 거다.”
“예. 감사합니다.”
그렇게 청사는 달려가고 촌장은 천천히 걸어 나온다.
“낄낄낄! 이제 사람이 다 됐네. 낭인촌을 맡겨도 되겠어.”
그는 밝은 미소로 낭인촌을 향해 걸어간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내게 볼 일이 있으면 나와서 얘기하지?”
그는 왼쪽 숲을 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하지만 상대는 말이 없다.
“더럽게 재미없는 놈이네. 말하기 싫다면 할 수 없지.”
곽정은 무시하고 그냥 계속 걸어간다. 멀리 낭인촌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상대방이 앞으로 나선다. 흰 복면을 한 사내다.
“퇴엣! 이걸 기다렸어?”
촌장은 입에서 시커먼 물질을 뺏어낸다. 아마 독 기운을 모아 입으로 빼낸 모양이다.
“호오! 제법이네. 내가 널 잘못 본 모양이다. 그렇다고 달라지진 않겠지만.”
목소리만으론 나이를 알 수가 없다.
“볼 일이 있으면 절차를 밟아야지. 예의를 모르는 놈이군.”
“곧 죽을 놈이 예의 타령이냐?”
“후후, 그렇긴 하네. 날 찾아온 걸 보면 우리 집에도 손님들을 보냈겠군.”
“오늘로 낭인촌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희망사항이냐?”
“크크크, 하긴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 시작해라!”
복면인은 명령을 내리고 뒤로 물러난다. 그러자 사방에서 수백 개의 화살이 날아온다.
“이크!”
곽정은 몸을 구르며 윗옷을 벗어서 화살을 막는다. 이어서 그걸 되돌려 보낸다.
“크아악! 케엑!”
숲속에서 수십 명의 비명이 들려온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직접 숲속으로 뛰어든다.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낭인의 실력을 그대로 보여준다.
잠시 후, 그가 다시 공터로 나오기까지 무려 백여 명이 목숨을 잃는다. 그런데도 곽정은 호흡조차도 흐트러지지 않고 차분하다.
“으음!”
그를 마주한 복면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낸다.
“자, 그럼 우리도 시작해볼까?”
곽정은 천천히 복면인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자 복면인은 다시 손을 들어올린다.
“쯧쯧, 여긴 내 구역이야. 이런 장난은 안 통한다니까.”
쿠아앙!
촌장은 오른 발로 땅바닥을 차고, 연이어 검을 뽑아 앞으로 몸을 날린다.
“크아악! 으악!”
발로 바닥을 찍듯이 누르자 땅속에서 일곱 명이 뛰어오르고, 그걸 검이 지나가면서 모두 목을 날려버린 것이다. 땅속에서 암습을 하려다 도리어 당한 거다.
“어..어떻게...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는데.”
“멍청한 놈, 여기가 낭인촌이란 걸 잊었니? 그건 우리 주특기야.”
“그래도 그렇지.”
“개소리는 그만하고. 여기서 끝내자. 우욱! 콜록!”
촌장은 복면인을 공격하려다 갑자기 피를 토한다.
“무..무슨 짓을 했느냐?”
“무..무슨 소리냐? 난 모르는 일이다.”
“독을 안 뿌렸다고? 우욱!”
곽정은 다시 피를 토한다.
“흐흐흐, 네놈이 아까 독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한 거겠지.”
“그럴 리가 없다. 크으윽! 울컥!”
촌장은 시커먼 핏덩이를 토한다.
“네 말대로 여기서 끝내자. 화살을 쏴라!”
복면인이 숲속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수십 개의 화살이 다시 날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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