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73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73
“그..그게... 죄송합니다. 제가 한 동안 운정을 떠나 있어서...”
“이 새끼가 어디서 변명을 하고 지랄이야?”
“아..아닙니다. 안 그래도 지금 방주님과 소방주님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 두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방금 연락을 보냈으니 소방주께선 내일 중으로 오실 겁니다.”
“그놈도 혼이 좀 나야 해. 대체 분타주를 어떻게 교육시키는 거야?”
“대..대협! 모두가 제 불찰입니다. 처벌은 이번 일을 정리한 다음 달게 받겠습니다. 부디 제자들은.....”
분타주가 말하는 동안 번개는 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꼼짝을 못한다.
“제자들을 챙기는 걸 보니까 그래도 의리는 있는 놈이네. 소개가 따로 한 말이 있느냐?”
“소방주님께선 대협을 개방의 최고 어른으로 모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좋다. 그럼 개방의 최고 어른으로서 명을 내린다. 분타주는 들어라!”
“예, 대협!”
“지금 당장 운정의 모든 문파에 개방 방주 이름으로 서신을 보내라. 만약 지금부터 일문회와 금혼회의 다툼에 끼어드는 문파는 개방의 적으로 규정하겠다고. 알았느냐?”
“예, 대협!”
“그리고 현령에도 서찰을 보내라. 일문회가 개방 최고 어른의 여동생 결혼식을 무산시키고, 그 신랑과 신부를 납치해 갔으니 당장 해결해달라고. 만약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하지 않으면 승상과 중원대장군부는 물론이고, 황제께 고할 것이라고. 알았느냐?”
“예,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일문회로 향할 것이다. 저 놈을 앞세워라!”
“예, 대협!”
“삼촌, 숙모. 가시지요.”
“그..그래.”
일초는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두 사람을 앞세우고 일문회로 향한다.
“정랑! 일초 오라버니가 언제부터 저렇게 연기를 잘 하셨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자미의 입가에 미소가 가득하다.
“그러게 말이오. 나도 놀랐소.”
“너만 놀랐겠냐? 난 걱정이다.”
곤일에 이어 태운도 끼어든다.
“왜요?”
“경극단을 만들자고 할 것 같아서 말이다.”
“호호호! 일초 오라버니 성격으로 봐선 그러고도 남죠.”
“근데 이번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진 않을 것 같은데, 니들 생각은 어떠냐?”
“현령 때문입니까?”
“그래. 태양장과의 연관성 때문에 잘못하면 일이 커질 수도 있다.”
“과연 태양장이 그럴 여유가 있을까요?”
“물론 현재 태양장이 이런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에 유석이 이곳에서 현령을 하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다면 상황이 다르지 않을까?”
“저도 오라버니 생각이랑 비슷해요. 유석은 태양장의 핵심인물이에요. 중앙의 고위관료가 아니라 지방 현령을 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워요.”
태민에 이어 자미까지 유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를 한다.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 막내가 오면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을 거다.”
“그래도 전 이번에는 재미난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 기대가 되요.”
“나도 같은 생각이다.”
“시작부터 분위기가 좋아서 그런가 봐요.”
곤일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일초를 따라간다.
골목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일초가 손을 들어 올린다.
“멈춰라!”
일문회는 아직 한참을 더 가야 한다.
“대협! 완전히 포위당했습니다.”
“어떤 놈들이냐?”
“태양장의 통제를 받는 세 개의 중소문파들입니다.”
“서찰은 보냈느냐?”
“아마 모두 받았을 겁니다.”
“그럼 지금부터 저들은 모두 개방의 적이다.”
“알겠습니다. 즉시 저들을 공격하겠습니다.”
“호오! 그런 생각까지 했단 말이냐?”
분타주는 제자들을 동원해서 이곳을 포위한 문파들을 공격할 생각이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제 별명이 꾀주머니입니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잘 어울린다. 니 생각대로 해라.”
“예, 대협!”
“무인이 칼을 뽑을 때까진 신중해야 하지만, 일단 뽑으면 뿌리를 뽑아야 한다. 알았느냐?”
“예, 대협! 서찰을 보내라.”
“예, 분타주!”
휘이이이익!
분타주가 손짓을 하자 번개가 즉시 휘파람을 분다. 그러자 수십 마리의 새가 날아오른다.
“어! 비둘기가 아니네?”
“예, 제 이름이 솔개라 저흰 매를 전서구로 사용합니다.”
“후후후, 우리 분타주가 상당히 재밌는 분이시구먼. 아까 내가 한 행동을 사과해야 할 것 같소.”
일초는 이때부터 분타주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아닙니다. 일초 대협을 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하하하! 형님이 분타주께 제대로 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앞으론 사람을 대할 때 더 조심해야 겠다.”
“저희도 좋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분타주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동생들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아이고, 너무 좋게 봐 주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분타주는 물론이고, 번개까지 허리를 직각으로 꺾어서 인사한다. 순간 번개는 눈물을 글썽인다. 보통 무림에서 좀 잘 나간다고 하면 어깨에 힘이나 주고, 군림하려 한다. 하지만 일초와 동생들은 자신의 잘못을 금방 인정하고, 상대에게 허리를 숙이니 감동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런 것이야 말고 진정한 무인의 풍모이다. 난 앞으로 무공은 뒤떨어질지 모르지만, 품성만큼은 이분들을 뒤따를 것이다.’
번개는 굳게 결의를 다지면서 매의 다리에 서찰을 묶어 날려 보낸다.
“금룡장주,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거요? 학운장주와 명성장주도 그만 나오시오.”
상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분타주가 나서서 그들을 부른다.
금룡장, 학운장, 명성장.
이들은 운정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문파들이다. 앞서 번개가 설명했듯이 이들은 모두 태양장 소속의 군소 문파로 현령의 지시를 받는다.
“일문회가 현령에게 연락하고, 현령이 다시 세 문파에 명을 내렸군.”
“대단하지 않소? 이 정도 조직력은 군대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건데.”
“훈련을 많이 했나?”
“훈련을 했다기보다 평상시에 한 몸처럼 움직인다는 거지.”
“이들이 평상시에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게 우리가 파악해야 할 일이지.”
“후후후, 역시 우리 동생들의 눈치는 십 단이야. 내가 말하지 않아도 벌써 사건의 핵심을 파악했구나.”
“형님이 괜한 일에 끼어들진 않았겠지요.”
“그런가? 하여튼 놈들도 손발이 잘 맞지만, 우리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대형이 이번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걸 가르치려는 게 아닐까요?”
‘으음! 그렇다. 우리가 언제까지 형님에게 의지할 수만은 없다. 그래서 형님이 이런 고육책을 썼구나. 무정한 양반,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잘 계시는지 모르겠소? 아가씨도.’
일초가 무진을 생각하자 눈가에 이슬이 촉촉이 맺힌다. 그건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다. 그때 분위기를 깨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흐흐흐흐, 역시 분타주의 코는 특별하오. 이름을 솔개 대신 개코로 바꾸는 게 어떻소?”
모습을 드러낸 흑의인은 처음부터 분타주를 자극한다. 하지만 시비를 먼저 건 것은 그의 실수다. 특히 상대는 개방에서도 말발이 세기로 소문난 솔개이다.
“그대들이 풍기는 똥냄새를 못 맡는다면 그건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지. 우리 개방에서도 그대들만큼 역한 냄새를 풍기는 제자들은 없소. 어디 똥밭에라도 다녀왔소?”
상대가 연타를 때렸다면 이것은 강타이다. 상대는 처음부터 결정타를 맞고 잠시 주춤한다.
“호호호호! 오늘 분타주님에게 여러 가지를 배웁니다. 전 오늘에야 칼싸움보다 무서운 게 말싸움이란 걸 깨달았어요.”
자미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나선다.
“아가씨가 얻은 게 있다니 제가 영광입니다.”
“이 싸움은 보나마나 예요. 보세요. 한 방에 정신을 못 차리잖아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워낙 잔머리를 잘 굴리는 인간들이라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솔개! 네놈이 무슨 배짱으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지만, 태양장의 노여움을 감당할 자신이 있느냐?”
“금룡장주 금학, 네놈의 그릇이 겨우 그 정도였냐? 네놈은 태양장이 아니면 뒷골목 건달패 하나도 처리를 못하지?”
“뭐라? 거지새끼가 정녕 죽고 싶은 거냐?”
“네놈이 날 죽인다고? 지나가는 똥개가 웃겠다. 겨우 태양장의 힘을 빌어서 장주가 된 놈이 누굴 죽여?”
“저...저 냄새나는 거지새끼가....”
“자, 자! 그만 하시오. 분타주! 그간의 정리를 생각해서 이 정도로 합시다. 만약 여기서 돌아간다면 오늘의 일은 없었던 거로 하리다. 어떻소?”
“학운장주 김생,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인간. 내가 여기서 돌아가면 가장 먼저 활을 쏠 놈이지. 네 놈은 십 년 전 그 일을 잊었는지 모르지만, 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십 년 전의 일이라니, 무슨 말이오? 십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허억! 네..네놈이 그걸 어떻게 아느냐?”
“멍청한 놈, 혼자서 똑똑한 척하지만 금룡장주나 명성장주에게 물러봐라. 그 일을 모르는지.”
“마..말도 안 돼. 정말이오?”
학운장주 김생은 두 사람에게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아마 운정에서 알 만 한 사람은 다 알 거요.”
“현령도 안단 말이오?”
“장주는 그것 때문에 현령에게 발목이 잡힌 게 아니었소?”
“그럼 당신들도 약점이 잡혔단 거요?”
“안 그러면 우리가 미쳤다고 이런 짓을 하겠소?”
“볼만 하네. 볼만 해. 근데 언제까지 말장난만 할 거야?”
보다 못해 일초가 나선다.
“네놈은 누구냐?”
명성장주 길수가 검을 빼들고 나선다.
“죽었다!”
솔개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뱉는다.
빠악!
“크악!”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명성장주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진다. 다른 곳은 문제가 없다. 정수리에 주먹 만 한 혹이 생기며 기절한 것이다. 일초가 던진 돌멩이가 그의 정수리를 정확하게 맞췄다.
“어..어떻게 된 거요?”
“무슨 짓을 한 거냐?”
“경고하는데 이승을 하직하고 싶으면 주둥이를 놀려도 좋다. 그게 아니면 조용히 물러나라.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건방진 놈, 감히 운정의 주인인 우리에게 물러가... 크악!”
금룡장주는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군다. 가슴에는 풀잎이 하나 꽂혀 있다. 역시 일초의 작품이다.
“이젠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니들은 오늘 여기서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이다.”
솔개는 말을 하면서 뒤로 물러난다. 대신 태민 사형제와 곤일이 앞으로 나선다. 자미는 일초와 함께 팔짱을 끼고 뒤에 서 있다.
“분타주.”
“예, 대협!”
“서찰을 보낸 일은 어떻게 됐소?”
“예, 분명히 보냈습니다만 이곳으로 오느라고 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 세 곳은 모두 개방이 접수했을 겁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