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58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58
“대형?”
“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자네가 대형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은 한 사람뿐인데, 두 사람이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네.”
“저도 대형이 어르신 얘기를 해서 놀랬습니다.”
“그래. 잘 지내시는가?”
“예. 저보다도 더 건강하신 걸요.”
“그래야지. 암! 단장.”
“예.”
“이 친구에게 새로 만든 작품을 평가받는 건 어떤가?”
“당연히 그래야죠. 중원천지에 형님만큼 훌륭한 평가자는 어디 있겠습니까?”
“하하하! 어째 축객령처럼 들리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농일세. 그보다 어르신.”
“말씀하시게.”
“한 가지 부탁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부탁? 혹시 자네 등룡장에 관심 있나?”
“후후후, 역시 어르신의 눈을 속일 순 없군요.”
“일단 작품을 보고 판단하세.”
“예. 참, 제 동생들도 같이 왔습니다.”
왕명이 몸을 돌리자 두 사람이 다가온다.
“안녕하십니까? 어르신.”
“너무 건강하신 거 아닙니까?”
추개와 조충이다.
“니들은 어쩐 일이냐?”
두 사람 다 행수와 잘 아는 사이다. 물론 단장과도 잘 안다. 워낙 경극단이 사방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오며 가며 자주 만난 모양이다.
“거지야 가끔 만나지만 네놈은 어쩐 일이냐?”
“친구도 만날 겸 어르신을 뵈러 왔습니다.”
조충과 단장 청원은 친구 사이다.
“만나면 싸우는 것들이 친구는 무슨...”
“어르신이 친구는 싸우면서 정이 드는 거라고 항상 말씀하셨잖습니까?”
“껄껄껄! 그랬었나? 근데 명이 자넨 얼마나 큰일을 벌이려고 천하의 말썽쟁이들을 다 데리고 왔나?”
“얘들이 하도 심심하다고 해서 큰 놀이판을 한 번 만들어볼까 해서 왔습니다.”
“잘됐다. 새 작품에 배우가 몇 사람 부족했는데, 자네들이 해보는 건 어떤가?”
“저희들이요?”
“좋습니다. 안 그래도 전 어릴 적부터 경극배우가 꿈이었거든요.”
추개는 반색한다.
“야, 대체 넌 꿈이 몇 가지냐? 황제도 꿈이었고, 장군도 꿈이고, 예쁜 마누라를 얻는 것도 꿈이라며? 뿐이냐? 부자도 꿈이었고, 심지어 땡땡이중도 꿈이었댔지? 근데 이제 경극배우까지?”
“그게 어때서? 그럼 형은 꿈이 하나뿐이었소?”
“그래. 난 하나뿐이었다.”
“기생오라비?”
“허억!”
가만히 지켜보던 청원이 결정타를 날린다.
“하하하하!”
“헐헐헐헐!”
“새 작품은 어떤 겁니까?”
“단순한 줄거릴세. 한 여인이 스물에 남편을 잃고 복수를 하는 얘기지.”
“하하하! 복수극은 관객들이 제일 좋아하는 얘기죠. 근데 우리 역할은 어떤 겁니까?”
“여인의 손에 맞아 죽는 무사 역할일세.”
“예에? 첫 연기에 죽는 역할이라고요?”
“하긴 복수극이니 죽는 사람이 많겠죠.”
“어르신. 가능하면 일찍 죽는 역할을 주시죠.”
“헐헐헐! 빨리 죽고 다른 재미난 일을 하겠다는 건가?”
왕명에 말에 행수가 핀잔 아닌 핀잔을 준다.
“하하하! 그게 보였습니까?”
“자넨 원래 거짓말을 못하잖나?”
“죄송합니다. 천마경극단에 피해가 가지 않아야 할 텐데, 그게 걱정입니다.”
“그건 괜찮네. 대신 우리도 조건이 있네.”
“조건이라면?”
“그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청원이 나선다.
“혹시 자네가 말한 원수가 바로 등룡왕인가?”
“그렇습니다.”
“으음!”
순간 모두가 긴장한다.
“자세한 건 다음에 말씀드리고, 우리는 등룡장을 치기 위해서 20년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려서 아직도 실마리를 풀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냥 철수해야 하나 하고 고민하는 중에 형님과 친구들이 온 걸 보고, 어르신과 전 기대 아닌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형님의 계획이 등룡장을 치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 천마경극단은 전부를 걸 것입니다.”
“그게 어르신과 자네만의 생각인가? 아니면....”
“잘 아시겠지만 우린 모두 한 가족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같은 마을의 생존자들입니다.”
“생존자?”
“예. 등룡왕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어르신의 따님을 범한 다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당시 마을에 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우린 타지에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 등룡왕의 짓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나?”
“타지에 있다가 마을로 돌아간 사람들이 열 명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저와 어르신이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으음!”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 잘못하면 단원들이 희생될 수도 있을 텐데.”
“부족한 게 많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버렸지만, 우린 미소야입니다.”
“으음!”
왕명과 형제들은 무진에게서 천마경극단이 천하삼대살수집단인 미소야란 걸 들었다.
“거기다 형님과 친구들이 도와준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많이 준비한 모양이군.”
“무진 대협, 아니 대형의 도움이 컸습니다.”
청원도 무진을 대형이라 부른다.
“형님이?”
“예, 지난번에 저희에게 책을 한 권 주셨습니다. 대형께선 우리 사정을 알고 계셨는지 필요한 것만 적어주셨습니다.”
“쩝! 너도 당했구나.”
조충이 다시 농을 한다.
“당하다니?”
“아니, 그런 게 있어. 우리 대형이 한 번 찍으면 아무도 헤어나지 못하거든.”
“미친 놈, 그걸 당했다고 표현해?”
“우린 그렇게 해.”
“쯧쯧, 하여튼 책에는 여러 가지의 내용이 적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가장 절실하게 원했던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게 뭡니까?”
추개도 책에 대해서 관심을 보인다.
“화약 제조법이었다.”
“화약?”
왕명은 물론 동생들도 눈이 휘둥그레진다.
“예. 우린 지금 등룡장을 수십 번 날려 버릴 수 있는 화약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겁이 없는 거야, 아님 용감한 거야? 그러다간 반역죄로 몰린다는 걸 몰라?”
“그 정도면 많긴 하네요.”
조충과 추개는 천마경극단의 무모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천마경극단은 지난 2년 동안 중원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화약의 재료를 마련하는데 주력했다. 그리고 최근 6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화탄을 만들었다.
“그만큼 절박하단 말이겠지. 대신 화약의 사용은 최대한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자네의 지시에 따르겠네.”
“감사합니다. 근데 아무리 경극단이지만 화약을 왕부 내로 반입하기가 쉽진 않을 텐데, 복안이라도 있습니까?”
“지난 일 년 동안 연구한 결과 최근에 방법을 찾았네.”
“어떤 방법입니까?”
“그건 끝난 다음에 설명하지.”
행수는 혹시 생길지도 모를 보안 문제 때문에 입을 다문다.
“저희도 그게 좋습니다. 자, 그럼 오랜만에 경극 구경을 해볼까요?”
“절 따라 오십시오.”
단장 청원이 왕명 일행을 안내한다. 근데 행수는 따라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생각에 잠긴다.
‘경아! 이제 널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구나.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비는 여기서 끝내려 한다. 더 이상 너 없인 견딜 수가 없구나. 그 동안 난 참 많이 후회했었다. 너를 그렇게 보내고 엄마까지 따라 갔을 때 나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그래도 기다린 보람이 있구나. 성공여부를 떠나서 그 짐승 같은 놈에게 복수의 칼날을 겨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애비는 지금 한 없이 기쁘고 들떠 있단다. 경아, 조금만 기다려라. 곧 너와 니 엄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마.’
그는 망부석처럼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때 그의 귓가에 청명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영감탱이,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누..누구시오?’
‘쯧쯧, 겨우 2년 지났다고 내 목소리도 잊은 거야?’
‘대..대협!’
‘쓸데없는 생각 말고 내가 갈 때까지 살아 있어. 알았지?’
‘예에? 그게...’
‘왜 대답을 못해? 정말 내 말 안 들을 거야? 니 마누라와 딸만 가족이고, 경극단에서 수십 년을 같이 지내온 아이들은 남이냐? 경극단원들은 태어날 때부터 널 삼촌, 할아버지라 부르며 커왔다. 근데 이번 일로 그 아이들이 잘못되면 그 가족은 누가 돌 볼 거야? 그러고도 죽는다는 말이 나와?’
‘하지만...’
‘까불지 말고, 내 말 들어. 안 그러면 이번 일을 무산시켜버릴 거야. 이건 결코 협박이 아니다. 내 성질 알지?’
‘대..대협! 제가 어찌 대협이 절 아끼시는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널 아끼는 게 아니라 경극단의 아이들이 불쌍해서 그런다. 그러니까 그건 니가 책임져.’
‘좋습니다. 대신 대협께서 이번 일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자식이 나이를 먹더니 잔머리만 늘었구나.’
‘허허허! 저도 이제 어딜 가나 할아버지 소릴 듣는 답니다.’
‘그래서 좋니?’
‘대협의 넓은 아량과 보살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까는 소리 말고. 앞으론 너도 손자, 손녀들 재롱을 보며 행복하게 살아라.’
‘명심하겠습니다.’
‘진즉 그럴 것이지. 아이고, 힘들어. 네놈 하나 설득하는데 온몸이 다 저리다.’
‘근데 지금 어디에 계신 겁니까?’
‘불알에 요령소리 나도록 뛰고 있다. 네 놈 살리려고.’
‘헐헐헐!’
‘지금 웃음이 나오니? 등룡장이 어떤 곳인지 알고 움직인 거냐?’
‘한 가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등룡왕이란 놈은 저와 단원들의 원수란 걸 말입니다.’
‘잘났다. 잘났어. 하여튼 내가 갈 때까지만 버텨라. 아니, 내가 가기 전엔 일을 벌이면 절대로 안 된다. 알았지?’
‘참고는 하겠습니다.’
‘뭐라? 참고만 하겠다고? 니미, 정말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너 지금 내가 안 보인다고 제법 쎄게 나오는데, 금방이다. 저기 장안이란 팻말이 보이네.’
‘아..아닙니다. 대협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무진은 아직도 천 리나 떨어져 있다. 행수를 붙잡아 두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 있다. 행수도 그걸 알면서도 티를 내지 않는다.
‘부탁한다. 난 더 이상 내가 아끼는 이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
‘대..대협!’
‘금방 갈 테니까 우리 같이 하자. 알았지?’
무진은 몇 번이나 확인하고, 또 다짐한다. 혹시라도 행수가 엉뚱한 행동을 할까봐 그런 것이다. 물론 왕명에게 얘기할 수도 있다. 아니, 벌써 했을 것이다. 하지만 행수의 고집은 왕명이 쉽게 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직접 얘기하기 위해 천 리 먼 곳에서 전음을 보내는 것이다.
“예.”
결국 행수는 무진의 정성에 고집을 꺾는다.
‘휴우! 하여튼 너 내가 도착하기 전에 일을 저지르면 죽을 줄 알아라!’
‘대신 대협도 약속은 꼭 지키셔야 합니다.’
‘무슨 약속?’
‘정말 이러시깁니까?’
‘아..알았다. 복수는 반드시 너희 손으로 할 수 있도록 해주마.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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