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50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50
“대형께서 말씀하셨잖아? 넌 내공이 두, 세 배 더 커졌다고. 이젠 네 앞길에 밝은 날만 있을 뿐이다. 됐지? 그럼 내가 질문을 할 차례군. 헤헤! 대형.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될까요?”
“안 될 것 같은데?”
“왜..왜요?”
“아직 종이랑 얘기가 안 끝났거든. 그리고 넌 새치기를 했으니까 질문을 하더라도 꼴찌다.”
종이란 묵사회 금곡분타주 금종을 말한다.
“예에?”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런 비양심적인 행동을 하면 무조건 불이익을 받는다는 걸 명심해라. 그리고 나이는 니가 더 많지만 영원히 니들이 종이보다 더 고수일 거란 생각은 마라. 우리 가족의 무공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그걸 익히려면 먼저 가족이 돼야 한다. 형식적인 가족이 아닌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그런 가족 말이다.”
‘흥! 난 가족이나 형제 이딴 건 모른다. 그냥 대형의 무공을 배워서 절대고수가 되고 싶을 뿐이다.’
흑마의 생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무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그의 잘못이라기보다 그가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백마도 기본적인 생각은 비슷하지만, 그래도 변화된 상황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야! 넌 아직도 지하세계가 좋냐? 난 대형을 믿고 따를 테니까 넌 독자 노선을 걸어라. 이 시간 부로 흑백쌍마는 해체다. 해체!”
“무..무슨 소리야? 해체라니? 난 싫다.”
“난 니가 싫다. 아니, 너랑 같이 했던 지난 칠십여 년의 세월이 후회스럽다.”
“저..정말이냐?”
“내 친구 흑마야.”
“왜?”
“난 너랑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 너랑 대형을 모시고 한 세상 풍미하면 얼마나 좋겠니?”
“좋기만 하겠냐? 꿈이 실현되는 건데. 근데 왜?”
“솔직히 그 동안 우리가 지은 죄를 생각하면 그런 걸 꿈꾸는 것도 죄악다. 죄악!”
“그래서 나더러 떠나라는 거냐.”
“그래. 과거처럼 살고 싶으면 떠나라. 그게 명예를 지키는 일이다.”
“나도 더 이상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살고 싶진 않다.”
“그런데?”
“내 본성이 악질인가 봐.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이기적인 생각을 하게 돼.”
“오라버니, 세상에 본성이 악한 사람은 없어요.”
호란이다. 그녀는 흑마가 안쓰러워 끼어든 것이다.
“아가씨! 우린 고금제일의 악마란 소릴 듣고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악질적이었는지 아가씬 상상도 못할 겁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우리 손에 죽은 사람이 천 명에 가깝습니다. 비록 어린이와 여인은 해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것만으론 절대 합리화 할 수 없습니다.”
“오라버니들이 아이들이랑 여자를 해치지 않은 것만 봐도 본성이 악하다고 할 순 없어요. 또한 50년 가까이 무림을 떠나 있었던 것도 그런 생활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잖아요?”
“그걸 아가씨가 어떻게 아십니까?”
“호호호! 그건 나중에 설명을 드릴 게요.”
“형님! 앞으로 누님 앞에서 이상한 상상을 하거나 나쁜 마음을 먹으면 안 됩니다.”
곤일이 설명을 한다.
“그러니까 아가씨께서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단 거잖아?”
“사실입니까?”
백마까지 나선다.
“걱정 마세요. 요즘은 읽으려고 애써야만 가능해요.”
“그런 건 걱정 안 해요. 대신 나중에 저한테도 가르쳐 주셔야 해요.”
“호호호! 정랑과 약속을 잘 지키고, 수련만 열심히 하시면 그렇게 될 수 있어요.”
“그럼 전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흑마는 호란의 몇 마디에 바로 꼬리를 내린다.
“미친놈! 대형이 말 할 땐 질문을 늘어놓더니 아가씨 한 마디에 깨갱이네.”
“당연하지. 무공에 관한한 대형은 경쟁자인 반면 아가씬 구원자니까.”
“지랄한다. 니 입으로 악마라며? 그래서 변하기도 힘들고. 아니냐?”
“너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게 얼마나 높은 경지의 무공인지 모르냐?”
“알지.”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해? 그런 무공을 배울 수만 있다면 내 이름까지도 다 버릴 수 있다.”
흑마는 뜬금없이 이름을 거론한다. 그걸 무진이 놓칠 리가 없다.
“그 말 잘했다.”
“무슨 말을 요?”
“이참에 니들 이름을 바꾸고 얼굴도 조금 손보는 게 어떠냐? 그럼 활동하기도 수월할 텐데.”
“예에?”
“이름을 바꾸는 건 그렇다 치고, 얼굴을 어떻게 바꾼단 말입니까? 가벼운 변장술 정도는 저희도 할 수 있습니다만....”
백마는 말을 하다가 태민이 고개를 가로 흔들자 말꼬리를 흐린다.
“이건 어떻습니까?”
태민은 의아하게 쳐다보는 흑마를 향해 고개를 살짝 내민다.
“뭐가? ... 허억!”
흑마는 순간 의자에 앉은 채로 뒤로 넘어간다. 백마가 잡지 않았으면 넘어졌을 거다.
“어..어떻게 한 거냐?”
태민의 얼굴이 저절로 바뀌었다. 내력을 사용한 것이다.
“저 정도 경지에 오르면 이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그 경지에 오르기 전엔 무림에 출도하지 말라는 거냐?”
“하하하하! 흑마 형님은 소문과는 달리 굉장히 영민한 분이군요.”
“소문이 어때서?”
“그건 제 입으로 말씀드릴 순 없고, 대형! 그만 수련할 시간입니다.”
“그래. 수련 장소는 호가 안내 할 거다.”
호는 흑마의 이름이다.
“제가요?”
“그래. 흑마정은 이제 정상화 되었다. 아마 그만큼 수련하기에 좋은 곳도 없을 거다.”
“솔직히 믿긴 힘들지만, 대형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하하! 너처럼 사람을 잘 믿을수록 수련의 효과가 잘 나타나는 법이지. 반대로 훈이 넌 사람을 너무 의심하면 안 된다. 알았니? 모든 일에 부정적이고, 너무 신중하다 보면 진취적인 생각을 가지기가 힘들어진다.”
적마대군의 이름이 조훈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네 재능은 천하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에?”
“하지만 그 재능만큼 적극성이 떨어진다. 만약 그것만 극복하면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을 거다.”
“대형! 혹시 훈이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건 아닙니까? 쟤가 얼마나 도전적이고, 깡다구가 좋은 데요?”
흑마가 적마대군에 대해 다른 평가를 한다.
“그건 훈이만의 생존법일 뿐이다.”
“맞습니다. 전 굉장히 소심하고, 겁이 많습니다. 그걸 감추기 위해 일부러 더 강한 척 행동해 왔습니다.”
“쩝! 그럼 우리가 그 동안 네놈에게 속았단 말이냐?”
백마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오라버니, 우리에게도 관심을 좀 가져주세요.”
자미가 기다리다 끼어든다.
“너흰 기초가 튼튼해서 열심히만 하면 큰 문제가 없을 거다. 다만...”
“문제가 있나요?”
“아주 큰 문제지.”
“예예? 그게 뭐예요?”
문제란 말에 자혜도 나선다.
“자만심이다.”
“아, 예.”
“대문파 출신이란 게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한계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정파 출신들은 남의 무공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내 무공만 배울 게 아니라면 각자 가지고 있는 무공을 최대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하찮은 무공이라도 배울 게 있다는 걸 명심하란 뜻이다.”
정파인들이 사파나 마교의 무공을 무시하는 걸 지적한 것이다. 순간 자혜는 큰 깨우침을 얻는다.
‘이거다. 항상 다른 문파의 무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단점만 찾으려 했다. 오히려 그 무공의 장점을 찾아서 내 걸로 만들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졌을 텐데 말이다.’
“후후후, 그래. 그런 맘으로 수련에 임하면 많은 발전이 있을 거다. 얘긴 그만하고 종이를 따라 가라.”
“예, 대형!”
“예, 오라버니!”
동생들은 대답을 하고는 문을 나선다. 그때 청천벽력과도 같은 무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참! 매 주 점검을 위한 수련이 있다. 한 명 당 한 시진씩 나랑 실전비무다.”
“예에?”
지도를 맡은 태민 사형제와 곤일을 제외한 사람들이 기겁한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무진은 그 말을 하곤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 가버린다.
“하하하! 지금까지 당하기만 하다가 구경하는 재미도 괜찮네.”
“아마 가르치는 재미도 솔솔 할 겁니다.”
“저도 기대가 큽니다.”
반면에 태민 사형제와 곤일은 즐거워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들이 당한 걸 모두 돌려줄 태세다. 무진은 그걸 노리고 이들에게 맡긴 것이다. 수련이 끝난 뒤 형제들이 얼마나 달려져 있을 지가 궁금해진다.
금곡이란 곳이 대도시는 아니라도 주위에 큰 도시들이 없기 때문에 인근의 여러 고장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 무진 부부는 시간 나는 대로 시장에 들러서 식사도 하고 구경도 한다. 오늘도 장터를 구경하고 만두 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 이곳은 크진 않지만 호란이 만두 맛에 반해 자주 찾는다.
“아주머니! 꽃은 누가 파는 거예요?”
호란은 가게 앞에 진열돼 있는 화분들을 보면서 가게 주인에게 묻는다. 주인아주머니는 50대 초반 정도로 상당히 곱게 생겼다. 다만 고생을 많이 했는지 표정이 어둡다.
“내가 집에서 기르던 걸 내 놨다오.”
“저걸 다 직접 기르셨다고요?”
“실은 내 딸이 기르던 건데 시집을 가면서 놓고 갔지.”
“근데 왜 파시려는 거예요?”
“꼭 팔려는 건 아니야. 새댁도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가져가도 돼.”
“전부 다 마음에 드는데요?”
“호호호! 그럼 전부 다 가지면 되지 뭐.”
“정말이에요? 전 지금껏 저렇게 잘 키운 꽃들은 처음 봐요.”
화분들이 크진 않지만 꽃들이 예쁘고, 정성들여 가꿔서 이런 작은 도시에서는 쉽게 접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근데 나중에 따님이 와서 찾으면 어쩌시려고요?”
“.....”
호란은 꼭 대답을 들으려고 물은 건 아니다. 근데 지금껏 말을 잘 하던 아주머니가 입을 열지 않는다.
“왜요? 따님이 몸이 안 좋아요?”
“.....”
이번에도 대답이 없다.
“아주머니!”
호란은 주인에게 다가가서 손을 꼭 잡아준다. 주인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미안하이. 주책없이 자꾸 눈물이 나네.”
“아니에요. 그보다 아주머니. 오늘은 장사를 그만해야 될 것 같아요.”
“장사를? 왜?”
“따님을 보고 싶어서요.”
“새댁이?”
“제 남편도 보고 싶은가 봐요.”
“병들어 꼼짝도 못하는 아이를 봐선 뭐하게?”
“실은 우리 낭군님께서 의원이시거든요.”
“의원?”
“예.”
주인아주머니는 무진은 찬찬히 살핀다. 지금까지 봐온 것과는 다른 눈빛이다. 근데 금방 고개를 숙인다. 무진의 오른팔이 없는 걸 보고는 실망한 모양이다.
“의원은 팔로만 환자를 치료하는 게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호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주인아주머니는 여전히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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