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42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42
일행이 얘기하는 사이 흑마가 젊은 무사를 간단하게 제압했다. 예상과는 달리 잔인한 수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냥 발로 상대의 옆구리를 정확하게 가격하자 끝나버렸다.
“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젊은 놈이 검은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발길질 한 방에 떨어지냐?”
“너 저 친구가 누군지 아니?”
“저런 놈을 알게 뭐야?
“쯧쯧, 저래도 명색이 용문각의 수제자야. 수제자.”
“뻥치시네. 용문각의 수제자가 힘도 없는 늙은이에게 당했다고? 누굴 바보로 아냐?”
“믿기 싫으면 말고.”
비무가 너무 싱겁게 끝나자 곳곳에서 구경꾼들이 실랑이를 벌인다. 근데 두 번째, 세 번째에 이어 네 번째 비무에서도 흑마가 이긴다. 그것도 별로 어렵지 않게. 이렇게 되자 장내는 술렁이기 시작한다.
“자넨 저 노인네가 쓰는 수법을 봤나?”
“자넨?”
“그냥 뭔가 휙 지나가는 것 같았는데, 쓰러져 버리니 알 수가 있어야지.”
“설마 짜고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어?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근데 저 늙은이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까 소개할 때 문호라고 했던 것 같아. 저 정도면 꽤 이름이 있을 텐데, 무림에 그런 자가 있었나?”
“글쎄? 난 못 들어봤어.”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노인네야.”
“자, 무림동도 여러분! 여기 계신 문호 선배께서 연거푸 네 번을 이겼습니다. 한 번만 더 이기시면 제1로군의 용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게 됩니다. 자, 이제 다섯 번째 출전자는 올라오십시오.”
의외로 이번에는 네 사람이나 나선다. 흑마가 지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순번이 정해지고 다섯 번째 출전자가 비무대로 올라온다.
“송화 대협이다.”
“와! 송화다. 송화!”
관중들 속에서 출전자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꽤 많다.
송화(松花)
‘1인 군단’이란 별호를 가진 인물이다.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특정의 문파에 속하거나 대문파에서 무공을 배우진 않았다. 하지만 무림 출도 이후 오백 번에 가까운 비무를 통해서 실력을 향상시켰다. 초기 백여 번의 비무에선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대가 약했던 것도 아니다. 마지막 백여 회는 대부분 대문파의 장로급에 육박하는 실력자들이었다. 나이도 불과 30대 중반에 불과한데도 무림인에서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꽤 많다.
그런 그도 채 십 초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왼쪽 정강이뼈가 부러지고, 오른쪽 팔꿈치가 뒤로 꺾여서 상당 기간 고생을 할 것 같다. 그러고도 다시 네 번의 비무에서 모두 흑마가 이겼다. 승패를 떠나서 늙은이의 체력에 사람들이 혀를 내두른다.
“정말 지독한 노인이야. 어떻게 아홉 번을 싸우면서 땀 한 방울을 안 흘리냐?”
“만약에 말이야.”
“뭔데?”
“정말 만약인데...”
“뭐야? 뭔 소릴 하려고 뜸 들여? 너 지금 저 양반을 흑백쌍마라고 말하려는 거지?”
“어떻게 알았어?”
“니가 아까 흑백쌍마가 나타났다고 했잖아? 그리고 나이도 많고,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자고.”
“그렇지?”
“그렇지는 무슨 놈의 그렇지 야? 저게 팔십 먹은 노친네의 얼굴이냐?”
“아니지. 그래서 헷갈리는 거야.”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소리친다.
“흑백쌍마다!”
이쯤 되면 장내는 소란이 벌어질 만도 한데, 사람들의 반응이 별로다. 그건 아마도 나이 때문인 것 같다. 방금 구경꾼들이 얘기한 것처럼 흑백쌍마가 살아 있다면 비무대에 있는 노인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열 번째 상대가 비무대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논란은 사라진다.
“적마대군이다!”
“적마대군이 나타났다.”
“와아!”
한 동안 구경꾼들의 환호가 이어진다. 그들은 그를 적마대군이라고 부른다. 외모는 겨우 삼십대 중반 정도인데 대군이란 별호가 붙은 것으로 봐선 예사 인물은 아니다.
적마대군(赤魔大君)
35세.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한때는 적마교도였다. 어린 시절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적마교에 몸을 의탁했지만,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그들의 악행을 보고 도망쳐 나왔다.
그 역시 앞서 흑마와 싸운 송화와 마찬가지로 홀로 무공을 익혔고, 실전무예의 달인이다. 소문에 의하면 100년 전 천하제일인자였던 소림의 무애선사(無涯禪師)의 무공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무림동도 여러분! 이번이 한 개인이 싸울 수 있는 마지막 열 번째 비무입니다. 이번에도 문호대협이 승리하면 오늘의 비무대회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반면 적마대군이 승리하면 다시 열 번의 비무가 계속될 것입니다. 자! 열 번째, 문호대협과 적마대군의 비무를 시작하겠습니다!”
을지수가 시합을 선언하고 내려가자 두 사람은 정중하게 인사한다.
“조훈이라고 합니다. 선배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적마대군은 마치 흑마에 대해서 아는 것처럼 말한다.
“날 알고 있느냐?”
“나이도 어린 제가 어찌 선배님을 외모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문호란 이름은 마음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제가 어린 시절부터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 있습니다. 부친께서 다섯 살인 제게 유언으로 남기신 이름입니다.”
“흠! 조훈이라면.... 혹시 조마가 네 조부였더냐?”
“그렇습니다.”
“헐헐헐! 내 평생 유일한 적수였던 조마의 손자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네 조부는 내가 지금껏 만났던 최고의 무인이었다.”
“부친께서도 조부께서 정당한 비무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그분의 손자로서 정정당당하게 비무를 하고 싶습니다.”
“껄껄껄! 조마의 후인이라면 자격이 충분하지. 그럼 시작하자. 조부를 생각해서 세 수를 양보하마.”
“감사히 받겠습니다.”
적마대군은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검을 뽑더니 즉시 몸을 날린다.
“흑마가 정색을 하는 걸 보니 조마란 사람이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조마는 물론이고, 무애선사의 무공도 만만찮지. 만약 적마대군이 두 사람의 무공을 대성했다면 흑마도 고전을 면치 못할 거다.”
무애선사는 백 년 전 천하제일인자로 잘 알려졌지만, 조마는 재야의 고수로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구파일방과 사대세가에서는 모두 그를 존경할 정도로 고수였다.
“대문파 출신도 아니고, 무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대문파의 장문인이나 가주들도 항상 그를 선배 대접했다.”
“이유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그는 특히 무공 이론에 해박했다. 천하제일이란 말로도 부족할 정도로 말이다. 내가 알기론 정파의 대부분 문파는 그를 통해 가문의 독문무공을 보완했다. 그건 우리 아미파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민의 물음에 호란에 이어 아미 장문인이 설명을 한다. 이때 무진 일행의 뒤쪽이 약간 소란스럽다. 일단의 사람들이 새롭게 도착한 모양이다. 숫자는 백 명이 넘지만 모두 평범한 옷차림이다.
“대형! 태양장의 무사들이 도착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셨소?”
“저길 봐라.”
곤일의 물음에 태운이 앞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거기엔 태양장의 소장주와 그의 사부인 우호법이 장군들의 안내로 자리에 앉고 있다.
“우호법이 왔으니 흑마의 신분도 곧 탄로 나겠군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하긴 나이가 많다고 모든 사람들을 다 아는 건 아닐 테죠.”
“그럴 가능성이 높다. 우호법은 오랜 세월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무진 일행의 대화 내용처럼 자리에 앉은 우호법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사부, 아는 잔가요?”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혼자서 열 번째 비무를 하고 있습니다. 상대는 적마대군입니다.”
옆자리의 제1대장군이 설명을 한다.
“적마대군?”
“예.”
“그런데도 저렇게 여유를 부린단 말이야?”
“예.”
제1대장군은 우호법을 존대한다. 그만큼 그의 위상이 높다는 걸 의미한다.
“이름은?”
“문호라고 합니다만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문호라.. 재미난 친구로군. 일단 지켜보지. 너도 잘 봐둬라.”
“예. 사부.”
이렇게 소장주와 우호법은 비무에 집중한다. 한편 무대 위에선 적마대군이 일방적으로 흑마를 몰아세운다.
“우웃! 무애선사의 진전을 이어받았다는 소문이 사실이구나. 하지만 아직은 멀었다. 무애선사는 부드러움 속에 강함을 추구한다. 마치 무당의 무공처럼. 근데 넌 부드럽기만 할 뿐 강하지 못하다. 이크! 이놈아, 그렇다고 갑자기 몰아치면 어떡해?”
적마대군은 강약을 조절하면서 밀어붙인다. 하지만 수십 차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흑마의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한다.
“선배! 계속 피하기만 하면 선배의 신분을 공개할 수밖에 없소.”
“바보 같은 놈, 내 공격이 시작되면 넌 최소한 중상이다. 알겠냐?”
“죽어도 좋으니 공격하시오. 안 그러면 당신이 흑....”
“아..알았다. 성질머리는 지 조부랑 하나도 안 닮았네.”
“당신도 다섯 살 부터 혼자 무림 생활을 해보시오. 살아남기 위해 하루에도 다섯 번을 살인하고, 심지어 인육을 뜯어먹었소. 근데 어찌 미치지 않겠소?”
“부모에 조부까지 다 기억하는 놈이 찡찡대기는. 이놈아, 그 정도면 금수저야. 금수저!”
“그래서 계속 이렇게 시간을 끌 거요?”
‘네놈이 한 가지만 약속하면 금방 끝내지.’
이때부터 흑마는 전음으로 말한다.
‘무슨 약속이오.’
‘내가 이기면 넌 내 제자가 되는 거다. 아..아니다. 그건 안 되겠다. 대신 약속해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좋소. 제자가 되는 게 아니라면 당신 뜻에 따르겠소.’
‘나중에 딴소리 하면 그땐 죽음이다. 자, 간다!’
그때까지 계속 피하기만 하던 흑마가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흑마가 끝낼 모양입니다.”
“그 전에 적마대군과 전음을 주고받았습니다.”
“흑마가 적마대군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러네요. 죽일 생각은 아닌가 봐요.”
“흑백쌍마가 적마대군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들인가요? 운이 오라버니와 싸울 땐 맥도 못 추던데.”
태민과 무진의 대화에 자미가 끼어든다.
“그만큼 운이의 실력이 많이 향상됐다는 거지.”
“아니에요. 전 그냥 대형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정식으로 붙으면 간신히 이길 정돕니다.”
“운이가 쌍마를 이길 수 있다고?”
태운의 설명에 자혜사태가 깜짝 놀란다. 그냥 무진의 도움으로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이길 수 있다니 놀란 것이다.
“장문인도 곧 그렇게 될 거야.”
“제가 어떻게?”
무진의 말에 자혜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언니 몸속에 있는 기운을 모두 흡수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두 배의 능력을 가지게 되는 거예요. 근데 못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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