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41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41
자미의 물음에 쌍마는 묵묵부답이다. 두 사람은 지금 고민에 빠졌다. 자미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이기엔 두 사람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번복할 수도 없다. 만약 소문이라도 나면 자신들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쫘악!
“아악!”
갑자기 흑마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그 새끼 그거 되게 분위기 파악 못하네.”
흑마가 몰래 태운을 공격하려다 뺨을 맞은 것이다.
“야, 이 새끼야! 아직도 모르겠냐? 나이가 많고 이름만 좀 있으면 누구든지 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에게나 니들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냐고? 이 개자식아!”
퍽! 퍽! 퍽! 퍽!....
태운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흑마를 발로 그냥 밟아버린다. 수십 대를 맞는 데도 흑마는 단 한 번도 피하지 못한다. 그걸 보는 백마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
‘마..말도 안 된다. 흑마 정도면 천하제일고수라고 우겨도 부정할 사람이 없을 거다. 근데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무방비 상태로 맞고 있다. 그렇다고 이놈이 대장도 아니다. 잘못하면 여기서 세상을 하직해야할 지도 모른다.’
그는 곧바로 도주를 시도한다. 모든 시선이 흑마와 태운에게 집중된 상황에서 몰래 뒷걸음질을 치며 몸을 날린다. 하지만 그건 마음뿐이고, 몸은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영감탱이! 살고 싶으면 죽은 듯이 있어.”
곤일이다. 그가 백마의 낌새를 차리고 침을 날려 제압한 것이다. 어딜 어떻게 맞았는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살고 싶니?”
“예에? 예! 무...물론입니다.”
태운의 질문에 흑마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을 한다.
“넌?”
“저..저도 살고 싶습니다.”
백마도 똑 같다. 그는 단 한 대도 맞지 않았는데 오히려 더 겁을 먹는다. 이런 걸 보면 고문기술자가 고문을 제일 무서워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쌍마는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혀 봤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결을 결심하지 않는 한 맞서 싸우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내가 누구냐?”
“그..그건.... 크아아아악!”
태운의 질문에 대답이 조금 늦자 흑마는 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지른다. 그렇다고 태운이 그의 몸을 건드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전신에 식은땀을 흘리며 바닥을 구른다.
“제...제발! 아아아아악! 차..차라리 죽여...주시오. 아아아악! 아..아닙니다. 시..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제..제발!”
흑마는 고통 속에서도 태운의 다리를 잡고 애원한다. 그걸 보는 백마의 전신이 계속 흔들린다.
“가..감사합니다. 다신 안 그럴 게요.”
흑마는 고통이 사라진 뒤에도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인다.
“내가 누구냐?”
태운이 이번에는 백마에게 묻는다.
“주..주인님입니다. 주인님!”
그는 바닥을 엎드리며 즉시 대답한다. 침이 사라졌는지 몸이 자유로워졌다.
“좋다. 난 너희를 괴롭힐 생각이 전혀 없다. 하지만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땐.... 알아서 해라.”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태운이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흑백쌍마는 벌벌 떤다. ‘고금제일의 악마’란 별호를 가진 자들이 너무 쉽게 항복을 한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라. 조금이라도 내 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시에는 조금 전보다 몇 배 더 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궁금하면 당장 확인해 줄 수도 있다.”
“아..아닙니다. 반드시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흑마는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백마도 덩달아 고개를 숙인다.
“지금부터 제1로군 본단으로 들어가 비무대회의 진행과정을 조사해서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그 외에는 저희 생각대로 해도 됩니까? .... 아..아닙니다. 자중하겠습니다.”
흑마는 딴 소리를 하다가 금방 자세를 낮춘다.
“니들 생각이 뭐냐?”
이번에는 곤일이 나선다.
“저흰 군부와 무림이 가까이 지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황실과 무림이 맺은 평화협정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좋다. 그런 취지라면 마음대로 해도 좋다. 단, 불필요한 살생은 절대 금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흑백쌍마는 마치 수십 년 동안 남의 밑에서 일해 온 사람들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오히려 자신들의 뜻이 관철된 것에 만족하는 눈치다.
“시작하라!”
“예!”
쌍마는 즉시 인사를 하고 사라진다.
“이야! 보셨죠? 이게 바로 우리 공자님의 본 모습이에요. 고금제일의 악마라는 흑백쌍마가 꼼짝을 못하잖아요. 지도자의 위엄이 장난이 아니에요.”
자미는 태운 띄우기에 여념이 없다. 누가 봐도 곤일은 태운을 약간 거들었을 뿐인데 말이다.
“쯧쯧, 아무리 사내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넌 운이와 일이가 무 대협의 도움 없이 저 늙은이들을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장문인은 자미의 그런 모습이 창피했던지 괜히 핀잔을 준다. 자미라고 왜 그걸 모를까? 다만 오랜만에 연인을 만나서 기분을 내 본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장문인이 그런 말을 하자 입을 삐죽이며 반격을 한다.
“죄송해요. 저희 언니가 노처녀다 보니 남녀상열지사에 대해선 워낙 문외한이랍니다. 널리 이해해주시기 바래요.”
“허억! 자..자미 낭자.”
태운도 보통 장난꾸리기가 아니다. 근데 자미의 행동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일행의 관계로 봐선 아미파의 장문인을 언니라 부르는 것까지는 봐 줄 수 있다. 근데 노처녀란다. 아마 아미파의 제자들이 들었다면 기겁하며 자미의 입을 틀어막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장문인은 아무 말도 안 한다. 오히려 그녀를 걱정한다.
“무 대협, 죄송해요. 제가 잘못 가르쳐서 버릇이 없답니다. 아가씨께서 많이 가르쳐 주세요.”
“하하하하! 뭔 걱정이야? 귀엽기만 하구먼.”
장문인의 걱정과는 달리 무진은 좋아한다. 하지만 호란이 강력하게 반대한다.
“안 돼요. 자미는 교육을 좀 받아야 돼요.”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계속 저렇게 귀엽게 행동하면 우리 집 사내들이 모두 자미만 예뻐할 거잖아요? 그럼 우린 어떡해요?”
“으하하하하!”
“호호호호!”
“하하하! 그럼 안 돼지. 안 돼!”
갑자기 주루 안이 화기애애하게 변한다. 잠시 후, 일행은 모두 객잔 2층으로 올라간다.
그 날 오후.
오전부터 제1로군 본부의 정문이 활짝 열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오만 평이 넘는 거대한 연무장 중앙에 수백 명이 한꺼번에 올라갈 수 있는 비무장이 만들어 지고, 그 주위에 수천 명의 무림인들이 모두 의자에 앉아 있다.
“무림동도 여러분! 지금부터 제25회 제1로군 비무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와아!”
“멋지다!”
군복을 화려하게 차려 입은 제1로군 제1대장군 고대영이 개회를 선언하자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며 좋아한다. 고대영이 내려오자 다시 한 사람이 올라간다.
“감사합니다. 저는 많은 무림 동도 여러분을 모시고 비무대회를 진행할 제1로군의 제3대장군 을지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을지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기억 안 나? 십 년 전, 그러니까 15회 때 우승한 점창파 속가제자 을지수 말이야.”
“그 을지수란 말이야? 결승전에서 소림속가 제자인 홍경수를 십 수만에 이겼지.”
“그래. 그 을지수야.”
“근데 불과 10년 만에 대장군이야?”
“그러니까 무림인들이 환장하지. 주위를 봐. 대문파의 제자를 포함해서 무림에서 방귀깨나 낀다는 자들은 다 모였어.”
“누가 아니래나? 과거엔 그래도 대문파의 제자들의 관심이 덜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더 한 것 같다. 소림은 물론이고, 화산에 곤륜까지... 사대세가에서도 꽤 많이 왔군.”
“이러다가 무림 인재들을 몽땅 군부에 뺏기는 건 아닌지 몰라.”
“요즘 같은 풍토가 계속되는 한 어쩔 수가 없어.”
“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무림도 실력보다는 돈과 연줄을 중요시하는 풍토가 되었네. 그러다 보니 뒷배가 없는 실력파들이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
구경꾼들은 곳곳에서 무림과 관련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규칙은 단 두 가지뿐입니다. 첫 번째는 절대 반칙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출전자는 패할 때까지 계속 비무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초반 출전자가 불리하다는 말도 있지만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전통이기 때문에 그대로 하겠습니다. 또한 다섯 번 이상 연속으로 승리한 분은 자연스럽게 제1로군의 용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반 참석자들이 무조건 불리하지만 않다는 점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첫 번째 출전자는 앞으로 나와 주세요.”
을지수가 규칙을 설명한 뒤, 첫 번째 출전자를 호출한다.
“근데 자네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흑백쌍마가 나타났대.”
“누구?”
“흑백쌍마도 몰라?”
“뭔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들이 사라진 지가 언젠데?”
“본 사람이 많다던데.”
“잘못 본 거겠지. 생각을 해보게. 그 자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적어도 칠, 팔십은 넘었을 걸세. 설사 살아 있다고 해도 제대로 무공이나 쓸 수 있겠어?”
“그렇겠지?”
“당연하지.”
“야, 시작했다!”
“벌써 올라갔는데... 어라?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냐?”
“그럼 어때? 작년에도 50이 다 된 복거준이 우승했잖아!”
“그렇긴 한데 저 자는 60은 된 것 같은데?”
“어차피 떨어질 건데 뭔 걱정이야?”
“하긴 그래.”
이렇게 구경꾼들이 얘기를 하는 사이 첫 번째 대결자들이 무대에 오른다. 한 명은 노인이고, 상대는 20대의 젊은 무사다. 한편 무진 일행은 뒤쪽에 같이 앉아 있다.
“대형, 아무래도 흑마가 분탕질을 할 모양입니다.”
노인은 바로 흑마이다.
“모처럼 재밌는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무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대신 호란이 설명을 한다.
“민아, 사람은 어려움을 겪으면 본성이 드러난다는 말 들어봤지?”
“예. 특히 남자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하죠.”
“여기도 문제가 생기면 적과 친구의 구분이 명확해질 거야.”
“으음! 혹시 쌍마가 비무를 통해서 사람을 해치려는 건 아닐까요?”
“운이가 내린 교육이 약했다면 그럴지도 모르지.”
“아까 얘기한 거로 봐선 쌍마는 처음부터 비무대회를 무산시킬 생각으로 온 것 같습니다.”
“무림에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쌍마가 잔인하긴 해도 제법 경우에 밝은 자들이었답니다.”
“아이와 아녀자는 해치지 않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어요.”
장문인과 자미가 보충 설명을 한다.
“벌써 끝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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