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28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28
“당신은 말로만 형제고 가족인가요? 혼자서 위험을 감수하고, 난관을 헤쳐 나가는 게 진정으로 형제와 가족을 위한 거냐고 묻는 거예요. 그런 게 가족이라면 전 여기서 그만둘래요.”
“..... 미안하오. 내 생각이 짧았소. 우리 가족 모두 함께 합시다.”
무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호란의 말에 수긍한다.
“고마워요. 언니, 가요. 니들도.”
“예, 아가씨.”
“예.”
호란은 왼손으론 무진, 오른손으론 미홍의 손을 잡는다. 이렇게 태민사형제와 곤일까지 가족이 모두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간다.
“크하하하하....!”
무진 일행이 지하 10층에 도착하자 지하 공간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큰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웬 떡이냐? 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인간 냄새냐?”
“그러게 말이야. 오랜만에 손맛을 제대로 볼 수 있겠군.”
사방에서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정작 놀란 사람은 목소리의 주인공들이다.
“호호호호! 200년이 더 흘렀건만 네놈들의 싸가지는 여전히 없구나.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진리라는 게 확인되는 순간인가? 넌 어떻게 생각하니?”
“글쎄요? 전 삼촌들을 오랜만에 만나서 좋은 걸요.”
월미공주와 가려의 목소리다.
“좋기도 하겠다. 저 인간들이 니 서방의 등에 칼을 꽂고, 니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걸 잊었냐?”
“저도 한 땐 저 양반들 생각만 하면 피가 끓고, 마음속으로 수천 번도 더 난도질을 했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정랑이 그런 말을 하시더군요. 우리가 삼촌들을 배신하도록 만들었다고. 사실 우리의 미래만 생각하느라 형제들의 미래는 생각을 못했어요. 우리는 은퇴하면 그만이지만 삼촌들은 상황이 달랐어요. 나쁘게 말하면 우린 누릴 것 다 누리고, 부와 명예를 다 가졌어요. 하지만 삼촌들은 고생만 하고 아무 것도 없었어요. 오히려 고금제일인자의 형제란 이유로 불이익을 당했고, 급기야는 일선에서 물러나야만 했어요. 그런데 우린 삼촌들과 의논 한 마디 없이 은퇴하고 말았어요. 솔직히 말하면 배신은 우리가 먼저 한 거죠.”
“으음!”
월미공주는 가려의 말을 부정하지 못한다.
“자..잠깐! 이것들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새파랗게 젊은 놈은 대형이고, 계집은 형수라는 거지. 월미공주의 목소리도 들리고.”
“그걸 지금 믿으라는 거냐?”
“뻥치고 있네.”
“어이가 없다. 200년 전에도 대형을 제외하곤 적수가 없다던 우리를 찾아와서 사기를 친다는 건데... 왜? 무엇을 얻기 위해서?”
“미쳤겠지. 아니면 죽고 싶어 환장했거나. 승이 네 생각은 어떠냐?”
“둘째 형이 말하지 않았소?”
“내가 뭘?”
“대형이거나 죽으려고 환장한 놈이라고. 형이 보기에 죽으려고 환장한 놈 같소?”
“으음!”
“그는 대형이 분명하오.”
“내가 보장하지.”
둘째라는 자 대신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지하 5층과 7층에 있던 자들이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
“몸으로 직접 부딪혀 보면 알 거요.”
“저 놈이 대형의 무공을 익히고 있단 거냐?”
“아니오.”
“아니라니? 그러면?”
“그는 우리가 모두 덤벼도 이길 수가 없소.”
“뭐라고?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딨냐?”
“그렇소. 초일도 우리 둘을 이길 순 없으니까.”
초일은 무진의 친구이자 그를 살해한 인물이다. 무진이 찾고자 하는 배후의 인물이기도 하고.
“그건 대형도 불가능해.”
“200년이 흘렀소. 대형의 능력이면 우리 같은 인간은 수십, 수백 명이 덤벼도 옷자락도 건드리기 힘들 거요.”
“다 좋다. 저 인간이 대형이라 치자. 그럼 지금까지 뭐하다 이제 나타난 거야?”
“그건 직접 물어보시오.”
“당신이 정말 대형이라면 설명해주시오.”
“오래전 일이지만 내가 형제들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나네.”
“200년 전에 했던 말을 어떻게 기억해?”
“어차피 우린 기억을 못할 테니 했다고 하면 그만이지.”
“그래도 이건 기억이 날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해 봐!”
“난 주둥이만 놀리는 것들은 안 믿는다. 궁금하면 몸으로 확인해라.”
“자..잠시만...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그러게. 내가 자주 쓰는 말인가?”
“멍청아! 대형이 우리랑 수련하기 전에 항상 했던 말이잖아!”
“으음!”
“.....”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래도 난 못 믿겠다.”
“당시 대형은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크고 작은 상처가 수십 군데였다. 치명상도 여러 곳이었고.”
“호호호호호!”
다시 월미공주가 나선다.
“멍청한 것들. 오라버니가 힘이 없어서 니들에게 당했다고 생각해?”
“그게 뭔 소리요?”
“질문은 내가 했다. 니들은 오라버니의 진정한 실력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어?”
“그럼 우리한테도 숨겼다는 거야?”
“멍청아! 그건 숨긴 게 아니라 겸손하다고 하는 거야.”
“그럼 우리 공격을 그냥 받았다는 건데, 왜 그랬지?”
“너 같으면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던 친구와 형제에게 배신을 당했는데 살고 싶겠냐?”
“그만!”
월미의 말을 무진이 가로막는다.
“말이 필요 없다. 무사는 몸으로 말해야 한다. 간다!”
우르르릉...!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서자 지하공간의 기운 전체가 같이 움직인다.
“우욱!”
“크으윽!”
어둠 속 인물들은 내장이 뒤틀리는 고통을 느끼며 뒤로 밀려난다.
“초일 그놈이 너희에게 무슨 짓을 했느냐?”
“.....?”
“저..정말 대형이오?”
“대..대형!”
쿠아아앙!
“이 놈들아! 내가 묻고 있잖아! 그놈이 니들에게 무슨 짓을 했냐고?”
파라라라랑!
무진과 동생들이 얘기하는 사이 호란이 손을 들어 올린다. 그녀의 손에서 밝고 투명한 기운이 흘러나와 지하 공간을 밝힌다. 순식간에 칠흑 같던 공간이 대낮처럼 밝게 변한다.
“허억!”
“괴..괴물이다!”
“저..저게 사람이냐?”
분명 목소리는 사람인데 몸이 괴물이다. 숫자는 모두 다섯 명으로 그 중 한 명을 제외하곤 차마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괴기스럽게 생겼다. 어떤 이는 머리가 완전히 일그러져 있고, 어떤 이는 팔과 다리가 무려 열 개나 된다. 그 정도는 귀엽다고 할 정도의 사람도 있다. 머리가 두 개고, 팔은 아예 없다. 뿐인가? 다리는 무려 다섯 개나 된다. 마치 문어처럼 생겼다.
우우우우웅!
무진의 몸에선 알 수 없는 기운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대신 지하공간의 기운이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대형!”
“대형! 크흐흐흐흑!”
“우릴 죽여주소서!”
“이 새끼들아! 날 죽이고 살아남았으면 배터지게 잘 먹고 잘 살았어야지!”
“알고 계셨소?”
무진의 말에 그 중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 말을 한다.
“초일이 그 놈은 오랜 세월 준비했다. 그 정도 준비 없이 날 노렸겠냐?”
“미안하오. 놈은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사용했소. 세상을 지배해도 어차피 혼자선 다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주변국들을 우리에게 나눠주겠다고 했소. 또한 충성의 증명하라면서 우리의 자손들 중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들을 데려갔소.”
“거짓이오! 둘째 형의 말은 틀렸소.”
지하 7층에 있던 사람이 반기를 든다.
“그건 핑계에 불과하오. 우린 모두 대형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소. 솔직히 말하면 잘 먹고 잘 살고 싶었던 거요. 그래서 대형을 배신했소. 아마 초일이 그 놈이 아니라도 대형의 등에 칼을 꽂았을 거요.”
“몸은 어떻게 된 거냐?”
“중원 무림을 장악한 우린 승리에 도취해서 일주일 동안 잔치를 벌였소. 근데 그것도 초일 그놈의 음모였소. 놈은 조금씩 우리를 중독 시켰고, 우리가 눈치 챘을 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소.”
“크크크, 형제를 배신한 놈들의 말로가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소?”
“약물로만 그렇게 될 순 없다.”
“역시 대형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구려. 여기가 어떤 곳인 줄 아시겠소?”
“흑빙정(黑氷晶)이냐?”
“크크크, 역시 대형은 대형이오.”
“누님, 흑빙정이 뭐죠?”
태운이 미홍에게 질문한다.
“빙정이 음기의 제왕이란 건 알지?”
“예!”
“정확하게 말하면 음기 중에서도 맑은 기운이지. 그래서 빙정의 정기를 취하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음공을 펼칠 수가 있다. 흑빙정도 빙정만큼이나 강한 음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음기다. 그게 이곳 지하에 있는 모양이다. 약물을 치유하기 위해서 흑빙정의 기운을 흡수했고, 그게 저분들의 몸을 괴물로 만들어버린 거야.”
태운의 물음에 호란이 설명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가려와 월미가 가진 지식을 호란이 전한 것이다.
“걱정 마라. 내가 치료해주마. 초일이 그 놈만 처리하면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무진은 동생들이 자신을 배신했음에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병까지 고쳐줄 생각이다.
“우리라고 왜 대형과 살고 싶지 않겠소? 하지만 그럴 순 없소.”
“배신은 니들만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동생들을 돌보지 못한 나의 잘못이다.”
“대형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맙소. 사실 우린 한 번 만이라도 대형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버텨왔소. 하지만 대형을 보는 건 고사하고, 번번이 초일 그놈에게 이용만 당했소. 그건 우리 병이 나아도 마찬가질 거요.”
“맞소. 이번 황세손 문제도 마찬가지요. 놈은 시키는 대로 하면 금옥의 문을 열어주겠다고 했소. 우린 모두 대낮엔 나갈 수 없단 걸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었소. 조금이라도 더 지상으로 올라가고 싶었기 때문이오.”
“대형! 우린 세상에 이로울 게 하나도 없는 인간들이오. 아니, 괴물이오. 대형을 뵌 것만으로도 충분히 웃으면서 갈 수 있소. 우리를 조금이라도 용서하신다면 보내주시오.”
“안 돼! 그럴 순 없다. 나라고 니들을 원망 안 했겠냐? 가려와 정이를 내 손으로 묻고 내 자신에게 맹세했다. 초일이와 니들을 찢어죽이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백 년이 지나자 정작 배신은 내가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니들을 먼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곤 난 견딜 수가 없어서 수백 번도 더 자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난 그 땐 이미 영원히 죽지도 못하는 괴물이 돼 있었다. 그런데 니들을 내손으로 죽이라고? 절대로 그럴 순 없다. 절대로!”
무진은 평소 그 답지 않게 악다구니를 쓴다. 그도 알고 있다. 자신이 동생이라고 해도 똑 같은 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래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정랑! 오라버니들의 몸과 마음은 이미 당신과 하나가 됐어요. 당신의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이별의 슬픔을 다 이해하고 있어요. 몸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나도 마음은 항상 당신과 우리 곁에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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