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9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나를 숨겨 적을 끌어내다 – 9
“사실입니다. 소회주께서 스물이 될 때까지 대부인께서 회주직을 맡을 겁니다.”
“그럼 사실이란 말이오?”
“예.”
“크크크, 결국 매형껜 사과도 못했구려.”
“너무 자책하지 마라. 오히려 매형이 네게 사과의 말씀을 남겼단다.”
“크흐흐흑! 매형!”
조충은 선 채로 눈물을 흘린다.
“자, 앉아서 얘기하자. 부회주도 앉으세요.”
“예. 회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감정이 격해져서... 근데 애들은 어디 갔습니까?”
“납치 사건도 있고 해서 한 달간 폐관에 들어갔다.”
“예. 그건 그렇고. 천년회의 도움이 좀 필요합니다.”
“도움?”
“예. 태양장의 북경비밀지부를 공격할 계획입니다.”
“그럼 당연히 우리도 참여해야지. 안 그런가요?”
“맞습니다. 금제가 풀린 이상 오히려 우리가 부탁드려야 할 입장입니다.”
“감사합니다. 저희 계획은 이렇습니다. .....”
이렇게 조충이 설명하고, 천년회의 의견을 반영해서 계획을 약간 수정해 확정한다. 근데 대부인이 이상한 말을 한다.
“우리도 네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
“제게요?”
“정확하게 말하면 너의 형제들이지.”
“말씀해 보시오.”
“부회주가 말씀하세요.”
“예, 아무래도 제가 해야겠지요.”
“뭔데 어려워하십니까?”
“혹시 회주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천년회의 전통 중에 하나가 여인은 절대 혼자 살 수 없다는 규율이 있습니다. 물론 스물이 된 이후를 말하는 겁니다.”
“천년회에 그런 규율이 있었습니까? 그런데요?”
“대부인께선 혼자가 되신 지가 한참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장로회의에서 상당히 강한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하하하! 그러니까 누이가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장로들 중에는 올 해 안으로 하지 않으면 천년회에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니?”
“천년회의 규율이면 지켜야죠.”
“그럼 나더러 재혼이라도 하란 말이냐?”
“그걸 부탁하려는 게 아닙니까?”
“그렇긴 하다만.... 영 내키지가 않는구나.”
“그런 거라면 당연히 제가 나서야죠.”
“혹시 주위에 적당한 분이 있습니까?”
“사람이야 있지요.”
“정말입니까? 어떤 분입니까?”
“혹시 천년회에선 집안사람과의 결혼은 금기시 합니까?”
“형제만 아니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 혹시 청운장주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나이도 누님과 비슷하고, 형수가 오래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인품이나 능력으로 친다면 전혀 부족함이 없는 분입니다. 제 형님이라서가 아니라 천하제일의 신랑감이죠.”
“으음!”
대부인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는 걸로 봐선 크게 싫진 않은 모양이다.
“누이 생각은 어떻습니까?”
“나야 뭐....”
얼굴까지 붉힌다.
“근데 아이들도 얘기는 들었을 텐데.... 반응이 어떻습니까?”
“천년회의 남자들은 그런 문제에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하겠습니다. 일주일 후에 뵙겠습니다.”
그 말을 하고 조충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음 날 아침.
북경 외곽의 조용한 주택가. 왕명 일행은 이곳에 작은 장원을 얻어 숨어 지내고 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어제 밤까지만 해도 이상이 없었잖아?”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한 놈도 남김없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흔적도 하나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게 가능해?”
조충과 추개의 설명에 왕명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태양장의 북경비밀분타가 텅 비었다는 말이다.
“저희들이 방심한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개방과 묵사회는 중원제일의 정보조직이잖아?”
“죄송합니다. 우리가 상대를 너무 과소평가 하고, 자만한 것 같습니다.”
“흠! 막내는?”
“조사 중입니다.”
“막내가 나섰으니 흔적은 찾을 수 있겠지. 하지만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해야겠네.”
“그렇습니다. 일단 보안 문제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혹시 정보가 누설되지 않았는지. 누설됐다면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반대로 순수하게 태양장의 판단이라면 그들이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정보도 누설되고, 판단도 우리보다 한 수 위일 수 있죠.”
“일단 모든 계획은 취소한다. 상황을 정확하게 점검한 다음 결정해도 늦지 않다.”
왕명은 계획을 전면 중단시킨다. 하지만 두 사람은 생각이 다르다.
“그보다 여기를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길?”
“예. 좀 있으면 놈들이 치고 들어올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일단 가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덜컹!
갑자기 방바닥이 꺼지면서 세 사람은 모두 밑으로 떨어진다. 상당히 깊다.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바닥에 닿는다.
“언제 이런 걸 준비했니?”
“원래 여기가 묵사회의 안가 중의 한 곳입니다.”
“후후, 그랬군. 보아하니 정보기관과 문파들 간의 신경전이 대단하군.”
“그렇습니다. 사실 오래 전에 태양장의 움직임이 감지됐습니다. 그래서 묵사회와 저희 개방이 준비를 했습니다만, 정말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다음 단계는 어떻게 하는 거냐?”
“일단 당해주는 겁니다.”
“당한다는 건.... 이런 일엔 문외한이라 감이 안 잡히네.”
“위에선 지금 난리가 났을 겁니다. 우왕좌왕하고, 전서구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닐 겁니다.”
“그 사이에 은밀하게 놈들을 추적하는 거죠.”
“그걸로 끝나는 거냐?”
“아닙니다. 놈들도 여러 가지 수를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그게 뭐냐가 관건이죠.”
“그걸 최대한 많이 알아내는 쪽이 이기는 겁니다.”
“그럼 니들도 여러 가지 수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냐?”
“죄송합니다. 형님과 의논하지 않고 우리끼리 준비를 해봤습니다.”
조충이 작은 서류를 하나 왕명에게 건넨다.
“으음! 고생이 많았구나. 후후, 이건 제법 재밌겠다.”
“형님을 번거롭게 하는 일이라 저희도 조심스럽습니다.”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재미있을 것 같다고. 평생을 고지식하게 살아왔지만 마음 한 구석엔 이런 모험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많았다. 오히려 이런 기회를 준 니들이 고맙기 까지 하구나.”
“하하하! 다행입니다.”
“앞으론 형님에게 이런 일을 자주 부탁드려야겠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하하하하하!”
뭐가 그렇게 좋은 지, 세 형제는 지하통로를 걸어가면서 호탕하게 웃는다.
“자..잠깐!”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왕명이 걸음을 멈춘다.
“왜 그러십니까?”
“자네 이 계획을 누이에게 말했나?”
“아닙니다. 참! 큰일이네. 누이에게 알릴 수도, 안 알릴 수도 없고. 네 생각은 어떠냐?”
“누님이야 좀 놀라시겠지만, 보안을 위해선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나중에 제가 대신 혼나죠 뭐.”
“아닐세. 혼나도 내가 혼나야지. 안 그런가?”
“그렇게 되는 건가요? 하하하하!”
“두 분은 좋겠습니다. 친척에다 처남 매부 사이가 돼서.”
추개가 입을 삐쭉 내밀며 심술을 부린다.
“처남 매부라니? 아직은 아닐세.”
왕명은 손사래를 친다.
“아직 아닌데도 그 정도면 앞으론 전 어떡합니까?”
“왜?”
“지금도 심보가 터질 지경인데, 정말 처남 매부가 되면 그땐 심장이 터질 거 아닙니까?”
“아..알았어. 앞으론 조심할 게.”
“미안하이. 앞으론 더.... 재밌게 놀아줄 테니까.”
“하하하!”
“히히히!”
세 사람은 다시 웃음보가 터진다. 근데 이번에는 세 사람이 동시에 걸음을 멈춘다.
“벌써 시작인가?”
우르르르릉....!
지하통로가 멀리 앞쪽에서부터 무너져 오기 시작한다.
“예상보다 강력한데요.”
“이쪽으로!”
추개가 황급히 왕명의 손을 잡고 달리더니 갑자기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쪽엔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컴컴하지만 사람 몸 하나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대체 놈들이 이런 정보를 어떻게 얻었을까?”
왕명은 어둠 속으로 걸어가면서 의문을 제기한다.
“형님, 이건 한,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하루 이틀에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아니고요.”
“그 말은 자네들도 그렇게 정보를 얻었다는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이런 지하 정보를 하나 얻기 위해선 수 년 동안 여러 사람들이 희생돼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이번 싸움은 반드시 성공해야겠군.”
“그건 놈들도 마찬가지겠지요. 다만...”
“다만? 또 다른 뭔가가 있나?”
“놈들의 정보 수집 방식은 우리와는 다릅니다.”
“납치, 고문 이런 건가?”
“비슷합니다만 그것보단 훨씬 더 잔인하죠.”
“여자를 이용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저희 조직원들의 부인이나 딸을 찾아내 겁간을 한 다음 정보를 빼내는 방법입니다. 우리보다 빠르고, 훨씬 더 쉽게 정보를 얻어내곤 합니다.”
“흠! 사악한 놈들이군.”
“세심각과 태양장은 우리 정보조직들 입장에선 반드시 제거해야 할 세력입니다.”
“흠!”
왕명은 연신 신음소리를 낸다. 상상은 했지만 실제로 그런 짓을 할 거라곤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다 왔습니다.”
그 사이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번에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지하밀실로 들어간다. 밀실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고,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
“막내도 와 있었구나.”
“예,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나야 유람삼아 돌아다니지만 넌 위험하지 않니?”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게 제 주특기잖습니까?”
“하하하! 그런 가? 그래, 일은 잘 되고?”
“예. 놈들의 목적지는 확인했습니다.”
“다행이다. 어디더냐?”
“지금 우리가 있는 바로 위입니다.”
“위라면 저길 말하는 거냐?”
왕명은 손가락으로 천정을 가리킨다.
“예.”
“여긴 황실과 가까운 곳인데... 설마 지난 번 그 자리냐?”
지난번 그 자리란 병부시랑의 대저택을 말한다.
“조금 떨어졌습니다. 황실과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있는 곳입니다.”
“자금성과 담벼락을 사이에 둔 곳은 모두 장군부인데.... 설마 중원대장군부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형님, 원래 안 좋은 예감은 꼭 맞는 법이랍니다. 그치?”
“불행하게도 그렇습니다.”
추개에 이어 소개도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해준다.
“병부시랑에 이어 중원대장군까지?”
“예. 놈들이 100만 군부를 송두리째 먹어 버렸습니다.”
중원대장군(中原大將軍).
한 마디로 중원의 군부를 한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이다. 병부시랑이 행정상의 실권자라면 중원대장군은 실질적인 실세이다. 황제와 병부시랑이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그가 거부하면 단 한 명의 군인도 움직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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