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86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86
“멍청한 놈! 지금에 와서 그런 말을 하면 뭐해? 설사 실패했더라도 보안은 지켰어야지. 이게 뭐냐?”
“죄송합니다. 잠잠하기에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미친놈!”
“사형!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방주가 쫓아오는 게 사실이라면 시간이 없소.”
“방주가 우릴 노린다면 개방으로 돌아가긴 어렵다. 이젠 선택해야 한다.”
“어떻게 말이오?”
“무림을 떠나 은거를 하던가? 아니면 태양장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난 태양장으로 간다.”
“저도 사형을 따르겠소.”
“그렇게 합시다.”
“찬성이오.”
모두 동의하자 제일장로는 주위를 살핀다.
“저걸 이용해서 이동한다.”
그들이 서 있는 강가의 수풀에 작은 배가 숨겨져 있다. 일행은 그걸 타고 강을 따라 이동한다. 근데 그들은 얼마 가질 못한다.
“무..물이 찹니다.”
“구멍이 뚫렸어.”
“그럼 빨리 막아야지.”
그들이 막 강의 중앙에 접근했을 때 갑자기 배에 물이 차기 시작한다.
“씨발! 구멍이 너무 많다. 배를 버려야겠다.”
“여기서 버리면 어떡해?”
“사형!”
“개자식들, 끝까지 애를 먹이네. 어어!”
제일장로는 방주를 욕하지만 몸은 물속으로 계속 가라앉는다. 이때부터 일행은 헤엄을 치며 물길을 따라 내려간다.
“어푸! 어푸! 사..사형, 대체 얼마나 더 가야되는 거요?”
오 장로는 머리를 간신히 물 위로 내밀고 말한다.
“놈들의 추적을 피하려면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
“그게 어디까지냔 말이오?”
“야! 같이 도망치는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아냐? 갈 수 있는 데까진 가야지.”
장로들의 계속된 질문에 제일장로 조철이 짜증을 낸다.
“사형! 저기로 올라갑시다.”
“그게 좋겠다. 저기부턴 숲이니까 놈들 추적도 피할 수 있을 거야.”
오 장로의 말에 조철이 앞장선다.
“잠깐!”
막 뭍으로 올라서려는 순간 팔 장로가 소리친다.
“왜? 뭔 일이야?”
“저길 보시오. 독이 뿌려진 게 분명하오.”
팔 장로가 가리킨 곳으로 모든 시선이 집중된다.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만한 통로에는 모든 풀들이 시커멓게 죽어 있다. 독이 뿌려졌다는 증거이다.
“씨발! 더 이상은 못 참는다.”
“그럼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놈들은 지금 심리전을 펴는 거야. 거기에 말리면 우린 죽는다. 일단 여길 벗어나서 태양장까지만 가자. 아무리 개방이라도 태양장으로 들어가면 어쩌진 못한다.”
오 장로가 화를 내자 조철이 다독거린다. 일행은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서 이동한다. 이렇게 이들은 천신만고 끝에 태양장의 개봉 분타로 피신한다.
개봉제일루(開封第一樓).
이름대로 개봉에선 가장 유명한 술집이다. 일단 3층 건물 모두가 주루이고,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일하는 점원만 해도 50명이고, 기녀는 무려 200명이 넘는다. 지금 이곳 2층의 특실에선 질펀하게 술판이 벌어지고 있다. 태양장의 소장주를 위시한 정파의 후기지수들이 벌써 두 시진 째 놀고 있다.
남궁세가 이공자 남궁철과 여동생 남궁린
사천당가 삼공자 당형과 여동생 당서현
하북팽가 이공자 팽문과 여동생 팽가희
제갈세가 이공자 제갈홍과 여동생 제갈령
특히 팽가(彭家)의 팽문과 팽가희는 소장주의 좌우에 앉아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으음!”
태양장의 소방주가 허벅지를 만지자 팽가희는 몸을 비비꼬며 신음소리를 낸다. 그걸 곁눈질로 쳐다보는 다른 후기지수들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린다.
“아이, 소장주님! 자꾸 이러시면 소녀가 부끄럽잖아요?”
“그래서 싫어?”
“그건 아니지만 언니들의 눈빛이 무서워서....”
“쟤들이 왜? 야, 니들 지금 질투하는 거냐?”
“그야... 당연하죠? 저희에게도 소장주님의 옆자리에 앉을 기회를 주셔야죠.”
“야, 당서현. 그럼 너도 얘처럼 예쁘게 꾸며! 아님 니 아버지한테 부탁해서 좀 고치든지. 니들도 마찬가지고.”
소장주는 노골적으로 다른 여인들을 무시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런 대꾸도 못한다. 단지 팽문과 그 여동생인 팽가희를 노려볼 뿐이다.
“소장주님, 최근 무림의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팽문이 황급히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이상한 쪽으로?”
“예. 이상한 놈이 출현해서 물을 흐리는 것 같습니다.”
“무진이란 놈을 말하는 거냐?”
“그렇습니다.”
“그래봤자 한 놈인데 뭔 걱정이냐?”
유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하지만 무진이란 이름을 듣는 순간 화가 오르기 시작한다.
“소문에 의하면 놈은 내공도 없으면서 무림의 절대고수 여러 명을 이겼다는 말이 있던데....”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소장주는 무진을 애써 무시한다.
“하지만 무당이 놈을 지원하고 있고, 개방의 방주도 그놈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너희 남궁세가도 놈을 지지하겠다는 거냐?”
드디어 유현의 목에 핏대가 선다.
“아..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흰 영원히 태양장의 그늘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럼 죽은 듯이 가만히 있어!”
남궁철은 괜히 나섰다가 핀잔만 듣는다.
“소장주님, 이럴 게 아니라 내기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내기?”
“예. 각자의 장기를 발휘해서 그 중에서 가장 잘한 사람에게 소장주님이 상을 내리시는 겁니다.”
“그거 좋다. 그럼 각자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장기를 한 가지씩 해봐. 상금은 금화 천 냥이다. 또한 일등은 나와 같은 숙소를 사용한다.”
“와아!”
“오라버니! 오늘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해봐요.”
“일등은 무조건 우리 오라버니 차지야.”
“호호! 이거 왜 이러셔? 지난번에 우리 오라버니한테 졌잖아?”
“호호호! 그건 말 그대로 비무에 불과해요. 봐줬다는 생각은 왜 못하실까?”
“뭐..뭐라고?”
사내들보다 여인들의 신경전이 더 치열하다. 근데 이상한 건 상금은 이해가 되는데 숙소를 같이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여인들의 눈빛은 소장주가 상금보다 그 말을 할 때 더욱 빛난다.
“소장주님, 너무 자유롭게 하면 평가하기가 곤란하니까 내공 대결로 좁히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거 좋다. 어차피 실내서 하는 거니까 그렇게 하지. 평가의 기준은 내공의 정교함이다.”
제갈홍의 제안에 소장주가 동의한다.
“그럼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당형이 먼저 나선다. 당형은 비록 친형인 당문에게 밀려서 후계자가 되진 못했지만, 사천당가의 후기지수들 중에선 내공이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지어 장로들조차도 그에게 밀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좋아. 기대가 된다. 시작해.”
“예, 소장주님.”
당형은 자기 앞에 놓은 술잔을 들더니 공중으로 날려 보낸다.
“야압!”
술잔이 천정에 닿을 정도로 높이 오르자 그는 오른손을 뻗어 소릴 지른다.
“허엇!”
“어..어디 갔지?”
여인들이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살핀다. 손에서 뻗어나간 기운이 감싸는가 싶더니 술잔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대단하군. 대단해.”
소장주는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으음! 내공으로 술잔을 가루로 만들어버렸군.’
‘흠! 자신이 있어서 먼저 나섰군. 만만치가 않아.’
팽형과 제갈홍은 인상을 찌푸린다. 이때 남궁철이 나선다. 그는 소장주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다음 오른손을 앞으로 내민다. 그러자 손에서 뻗어 나온 뿌연 기운이 바닥에 흩어져 있는 술잔의 가루들을 끌어 모은다. 이어 가루들이 천천히 회전을 하며 술잔 모양을 만들어 나간다.
“와아!”
남궁린은 술잔이 탁자 위로 내려오자 손뼉을 치며 좋아한다. 순간 여인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된다. 그걸 보는 남궁린의 눈엔 승리자의 여유가 넘친다.
“당형의 내공이 뛰어나단 건 알고 있었지만, 철이가 저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단하군. 대단해.”
소장주의 이 말로 두 사람의 승부는 끝났다. 남궁철의 승리다.
“이번에는 제가 해보겠습니다.”
제갈홍의 차례다. 그는 일어나서 앞쪽의 빈 공간으로 걸어 나간다.
“단검을?”
“내공을 사용하기엔 불리할 텐데?”
그가 단검을 뽑아들자 주변에서 걱정과 안도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그가 단검을 공중으로 던지는 순간 표정이 반대로 바뀐다. 걱정하던 자의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안도하던 자는 당황한다.
“이..이기어검술!”
허공에 떠오른 단검은 그의 손짓에 따라서 방안을 날아다닌다.
“제갈세가에 검신이 탄생했군. 검신이.”
소장주 조차 경계하는 눈치다.
“소장주님, 정말 이기어검인가요?”
옆자리에 앉은 팽가희의 질문이다.
“초입단계이긴 하지만 분명히 이기어검술(以氣御劍術)이다. 저 정도 실력이면 대문파의 장문인들도 쉽게 할 수 없다.”
“소장주님은 요?”
“하하하! 난 이미 오 년 전에 저 정도 경지를 넘어섰다.”
“호호호! 역시 소장주님은 대단하시군요.”
“근데 넌 네 오빠가 걱정되지 않느냐?”
“전 오라버니보다 소장주님을 더 믿어요.”
“하하하! 그건 좋은 판단이다. 네 오라비보단 날 믿는 게 더 현명하지.”
순간 세 여인의 날카로운 눈빛이 팽가희에게 집중된다.
“그렇다고 이 오빠를 너무 무시하진 마라.”
마지막으로 팽문의 차례이다. 그는 제갈홍처럼 앞으로 나서진 않는다. 앉은 채로 손을 들어 올리자 젓가락 두 개가 공중에 떠오르며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다.
“소장주님! 저것도 이기어검술인가요?”
이번에는 제갈령이 질문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짜증이 섞여 있다. 팽문이 자기 오빠와 비슷한 수준의 무공을 펼치기 때문이다.
“네 오빠와 비슷한 수준의 무공이다.”
“그럼 누가 더 뛰어난가요?”
“그건 문이가 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지.”
소장주가 말하는 사이 두 개의 젓가락은 방안을 몇 바퀴 돌더니 서로를 향해서 날아온다.
“저..저러다 부딪히겠다.”
“오라버니!”
팽가희와 당서현이 소리친다.
팟! 하고 부딪히기 직전에 젓가락은 사라진다. 그러더니 잠시 후 젓가락이 양쪽 벽면에 꽂힌다.
파팟!
젓가락이 사라진 것은 가루가 된 것이고, 벽면에 꽂히기 직전에 다시 뭉쳐서 원래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팽문은 처음엔 제갈홍의 이기어검을, 마지막엔 당형과 남궁철의 수법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짜짜짜짝짝....!
방안은 손뼉소리로 가득하다. 누가 보더라도 이번 내기는 팽문의 승리다. 헌데 정작 팽문은 굉장히 곤욕스런 표정이다.
‘이..이게 뭐야?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사방에서 들려오는 칭찬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신을 못 차린다.
“문이 네가 이렇게 실력이 좋은지 몰랐다. 잘못하다간 나도 밀리겠다.”
“문 오라버니, 오라버니 대에 와서야 하북팽가가 빛을 발하겠군요. 축하드려요.”
남궁린도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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