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80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80
“이 오라비는 말이다. 삼백여 년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단다.”
“호호호! 제가 운이 좋네요. 삼백 년을 살아오신 분의 삶의 진수를 배우게 됐으니 말이에요.”
“진수랄 것 까진 없고, 경험을 통해 배운 작은 교훈은 인생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거야. 너만 해도 그렇다. 이제 겨우 이십 년 정도 살았을 뿐이고, 살아갈 날은 그 몇 배가 된다. 설사 지난 이십 년이 고통스러웠다 해도 남은 인생을 소개와 함께 행복하게 살면 되지 않겠니?”
“고마워요. 저도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요.”
“이 오라비가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호호호! 큰 오라버니 앞에선 마음을 숨길 수거 없군요. .... 사실 제가 걱정하는 건 아버지가 큰 오라버니가 하시는 일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니?”
“확실하진 않지만 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 황제와 가깝게 지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심복이란 소릴 들었어요.”
“내가 알기론 니가 집을 나간 후론 황제와 연을 끊었다.”
“저도 그렇게 들었지만, 황실이란 곳이 워낙 은밀한 곳이라서....”
수련은 부친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며 말을 잇지 못한다.
“알았다. 니 아비에 관한 건 내가 좀 더 관심을 가지도록 애쓰마.”
“수련이 큰 오라버니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수련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무진을 향해 큰 절을 올린다. 근데 그녀는 엎드린 채로 일어서질 못한다. 아니, 일어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 실컷 울어라. 소리도 내고, 원망도 하면서.”
“흐흐흐흑! 오라버니! 전 불효녀예요. 불효녀. 아버지가 혼자 외롭게 되신 걸 알면서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어요.”
“그럼 당장 내일이라도 찾아뵙고 인사드리면 되겠네. 소개랑 같이 가면 좋아하실 게다. 왜? 그것도 내가 나서야겠냐?”
“예. 전 무서워요.”
“혹시라도 니 아비가 널 외면할까봐?”
“예.”
“쯧쯧, 니가 아이를 안 낳아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부모는 절대로 자식을 외면할 수가 없단다. 내 장담하건데 진천왕은 매일 널 그리워하며 밤을 지새울 거다.”
“흐흐흑! 아..버..지!”
수련은 거의 통곡을 하듯이 울부짖는다. 하지만 무진이 모든 음파를 차단해서 바깥에서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때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가씨, 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죄송해요.”
“아니다. 난 널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서 기쁘단다. 소개도 내 동생이지만, 너 또한 내 동생이란 걸 잊지 마라.”
“가..감사해요. 저도 큰 오라버니를 모시게 되어 기쁘기 한량이 없어요.”
“그래. 또 보자.”
그렇게 무진의 영혼은 수련의 방을 빠져나온다. 근데 그가 막 방을 나오다 낯익은 사람과 마주친다.
‘엉? 영감이 어쩐 일이지?’
수련의 방으로 들어서는 이는 바로 황금상단의 단주인 천호상이다.
“어서 오세요. 너무 많이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니요. 다급한 사람이 기다리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소?”
“아니, 중원제일갑부이신 황금상단의 단주께서 무슨 다급한 일이 있으신지요?”
“헐헐헐! 앉아서 천리를 내다본다기에 믿지 않았더니 사실이었군. 들어올 때 내 신분을 밝히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소?”
“호호호! 그건 영업비밀이에요.”
“헐! 그건 내가 자주 쓰는 말인데. 역술인들은 그런 것도 맞히시오?”
“단주님도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 점쟁이에 대해서 오해를 하시군요.”
“오해요?”
“예,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지녔어도 의뢰인의 모든 걸 알 순 없답니다.”
“그 말은 의뢰인의 뒷조사라도 한단 말이오? 그건 불가능할 텐데...”
“모두는 어렵겠지만, 단주님 정도면 뒷조사를 하죠. 보다 정확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기초 자료들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래서 미리미리 준비를 해둔답니다.”
“듣고 보니 그럴듯하구려. 근데 그런 말을 하면 의뢰인들이 싫어하지 않소?”
“아무에게나 그런 말을 하나요?”
“하하하! 이 늙은이가 오늘 큰 배움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후회가 막심하오.”
“왜요?”
“장주를 좀 더 일찍 만나 동업자가 됐다면 지금처럼 골머리를 앓진 않았을 테니 말이오.”
“황금상단의 후계 구도에 문제라도 있나요?”
“역시 예리하시구려.”
천호상은 중원제일갑부로서 황제가 부럽지 않을 정도의 화려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자식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아들이 한 명 있었지만, 딸을 하나 낳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고 인척들 중에서 황금상단을 맡길만한 인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무진이 나타나서 주인임을 증명하는 문서를 내놓았을 때 아예 넘기려는 마음도 있었다. 근데 무진마저 거부하자 고민에 빠진 것이다.
“그 문제라면 저 말고도 도움을 주실 분이 계실 텐데요.”
“사람이야 많지만.... 누굴 말하는 거요?”
순간 천호상은 당황한다. 이런 문제를 의논할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다. 있다면 무진뿐이다.
‘설마 이 아이가 그 분에 대해서 안단 말인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장주가 그 분에 대해서 어떻게 아시오?”
“호호호! 점쟁이에게 그런 말을 하시면 제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요?”
“장주! 내 말을 잘 들으시오. 장주가 뛰어나다는 건 내 눈과 귀로 확인했으니 부정하진 않겠소. 하지만 그분은 장주의 능력으로 감지할 수 있는 분이 아니오. 당신은 누구요?”
천호상도 보통 인물이 아니다.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수련을 노려보며 다그치듯 말한다.
“호호호! 기분이 묘하군요. 절 높이 평가하는 건 좋지만, 그분을 거론하시니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이럴 땐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죠?”
수련은 허공을 쳐다보며 말한다. 그녀는 무진이 다시 들어온 걸 알고 있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영감탱이! 이 아인 내 동생이야.”
“허억! 저..정녕 대협이십니까?”
“세상에 단주를 영감탱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나밖에 더 있어?”
“그..그렇지요. 근데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가까운 곳에 있어. 기다려 봐. 집사가 안내해 줄 테니까.”
“예, 안 그래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대양상단 때문이야?”
“알고 계셨습니까?”
“일단 만나서 얘기해. 그리고 단주가 왔으니까 수련이 네 생각대로 해보자.”
“나 참! 너무 재미없다.”
“뭐가?”
“큰 오라버니가 다 알고 있으니까 짜잔! 하고 놀래 킬 수도 없고, 좋은 계획이 있다고 자랑할 수도 없으니 당연히 재미가 없죠.”
“그건 장주의 말씀이 맞소. 나도 제법 재밌는 사람인데, 대협과 같이 있으면 긴장이 돼서.... 죄..죄송합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우리 큰 오라버니도 알고 보면 상당히 재밌는 분이세요. 전 앞으로 어리광도 부리고 때도 쓸 거예요. 그래도 오라버닌 충분히 받아주실 거예요. 단주님도 그렇게 해보세요.”
“그래도...”
“어때요? 설마 나이가 삼백 살이 다 된 분이 새까만 후배를 나무라겠어요?”
“그럴까요?”
“수련이 너 어째 말은 큰 오라버니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씹는 것 같다. 그럼 소개가 힘들어진다.”
“흥! 그럼 호란 언니에게 다 고해바치죠 뭐.”
“아이고, 일초 그 놈 하나만으로도 힘든데 너까지 왜 이러냐?”
“호호호! 아니에요. 그냥 농담이에요. 농담.”
“넌 농담이라고 말하는데 난 왜 이리 마음이 무겁지?”
“헤헤헤! 그래도 제가 있으니까 좋죠?”
“그래. 좋다. 좋아서 미치겠다. 단주!”
“무진은 갑자기 화제를 돌린다. 순간 단주의 표정이 굳어진다. 수련에게 당한 걸 자신에게 풀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예, 대협!”
“이 아인 어때?”
“뭐가 말입니까?”
“후계자 말이야. 난 이 아이가 딱 마음에 드는데.”
“예에? 그게 가능합니까?”
“큰 오라버니! 지금 복수하시려는 거죠? 그죠?”
“복수는 무슨? 가능하니까 하는 말이지. 싫으면 말하고.”
“아..아닙니다. 저도 딱 마음에 들어요.”
“그럼 됐어. 이 아이를 수양딸로 삼고, 개방의 소방주와 결혼시켜. 그럼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해결될 테니까.”
여러 가지란 후계자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세력들이 황금상단을 넘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개방의 소방주라면... 대협의 막내 동생분이 아닙니까? 껄껄껄! 그렇게 된 거였군요.”
“나도 몰랐어. 둘이 거시기한 사이인 줄은. 하지만 어쩌겠어? 둘이 벌써 그렇고 그런 사이가 돼 버렸는데 안 된다고 할 수도 없고.”
“전 사실 장주를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었습니다. 냉정하고, 차분하게 사물을 직관하는 능력은 장사꾼에겐 절대적으로 필요하거든요. 탐은 났지만 감히 말을 못했는데, 대협께서 말씀하시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큰 오라버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에요?”
수련은 농담으로 받아들이다 깜짝 놀란다.
“그럼 천하제일의 상단을 날로 먹는 일을 농으로 하겠니?”
“그런 중요한 문제를 제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결정하시면 어떡해요?”
“그래서 넌 싫다는 거냐?”
“헤헤헤, 그럴 리가 있나요? 전 사실 점쟁이 생활이 지긋지긋했거든요.”
“영감탱이, 들었지? 지금부턴 당신이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근데 아까 장주 생각대로 해보라고 하신 건 무슨 뜻입니까?”
“그건 우리 숙소로 가서 얘기하지.”
“예.”
그걸 끝으로 세 사람은 무진의 숙소로 향한다.
다음 날.
산서제일루(山西第一樓).
태원(太原)에서 가장 유명한 주루이다. 오전인데도 1층 주루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 붐빈다.
“헐헐헐! 이게 누구요? 총사를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소이다.”
황금상단의 단주인 천호상의 목소리다. 그가 반갑게 맞이한 사람은 바로 적마교의 총사인 운고(雲高)이다. 총사는 부하들과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왔다가 우연히 천호상을 만난 것이다.
“단주님이 아니십니까?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사업 때문에 왔다가 누굴 좀 만나고 오는 길이오.”
“황제보다 더 만나기 어렵다는 단주님이 손수 찾아올 정도면 대단한 분이겠군요.”
“자, 자. 그런 얘긴 천천히 하고 일단 앉읍시다.”
부하들은 안쪽에 따로 마련된 자리로 가고, 총사는 단주의 권유에 따라 옆자리에 앉는다.
“실은 말이오. 내가 사업이 잘 안 되면 가끔 찾는 곳이 있다오.”
“사업이 잘 안 되면 찾는다? 그럼 점쟁이를 만나고 오시는 길이란 말입니까?”
“점쟁이라고 부르기에는 고결한 분이지요. 난 그분을 그냥 장주라고 부른다오.”
“혹시 단주님이 가셨다는 곳이 운명장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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