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79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79
“저런 고수가 이런 곳에서 집사 노릇이나 하다니... 재미난 곳이군요.”
일초는 집사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며 혼잣말을 한다.
“니 눈에도 그렇게 보이냐?”
“황실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그것도 보였어?”
“왜 이러시오? 무림에서 황실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서 다섯 손가락도 되지 않소.”
“겨우 개구멍 하나 안다고 큰소리치기는?”
“그럼 형은 개구멍이라도 아시오? 아니지... 옛날엔 방문 드나들 듯이 뻔질나게 다녔겠지. 이번엔 내가 졌소. 그럼 난 애들이랑 한 바퀴 돌고 오겠소.”
일초는 황실 문제가 나오자 꼬리를 내린다.
“일이만 데려 가거라.”
“그러죠 뭐. 일아, 가자!”
“예, 형님.”
“우리도 들어가자.”
방에 들어온 무진은 곧바로 자리에 앉는다.
“이혼령을 펼칠 생각이십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니들이 호법을 서줘야겠다.”
“염려 마십시오.”
무진은 즉시 명상에 든다.
여긴 운명장의 장주인 수련(垂蓮)의 방이다. 방안에는 여러 명이 앉아 있다. 방의 가장 상석엔 이십 대 초반의 아리따운 소녀가 앉아 있고, 그 앞엔 적마교의 총사인 운고와 구룡단의 오룡, 그리고 태양장의 총관인 유원의 모습도 보인다. 유원은 태양장주인 유진의 사촌동생으로 태양장의 실권자 중 한 명이다.
“그러니까 장주는 알면서도 말해줄 수 없단 뜻이요?”
유원이 수련을 노려보며 협박을 하고 있다.
“그렇게 물으시니 소녀가 대답하기 곤란하네요. 총관께서도 천기누설이란 말을 잘 아시잖습니까? 제 좁은 소견으로 미래를 살짝 엿볼 수 있다 해도 그 미래란 놈이 워낙 변화무상한 지라 장담 할 수도 없지만, 그걸 입 밖에 내는 순간 운을 다해버릴 수도 있답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약간이라도 불리한 쪽에서 운명에 해를 끼칠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수가 있지요.”
“그게 그 말이 아니오. 알지만 말해줄 수 없다. 반대로 우리에겐 말을 안 해도 제3자에겐 말 할 수 있단 뜻이기도 하지요.”
“잘 보셨어요. 저도 사람인지라 때론 협박을 받거나, 제 이익을 위해서 천기누설을 할 때가 있죠. 그게 마음에 걸리시면 절 제거하셔도 됩니다.”
수련은 정공법을 선택한다. 어차피 상대가 자기를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아무리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장주! 우린 당신을 해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오. 다만 우리에 대한 얘기가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 곤란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당분간 운명장은 우리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될 거란 것이요. 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라오.”
적마교의 총사 운고가 완곡하게 표현한다. 하지만 그걸 못 알아들을 수련이 아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이 뜻을 이룰 때까지 절 인질로 삼겠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 더 이상 우리가 장주께 결례를 범하지 않게 주의해 주시면 고맙겠소.”
“이번엔 오룡이 나선다. 근데 조금 이상한 건 세 사람은 중원무림에서 최고 권력자에 속한다. 그런데도 일개 점쟁이 소녀에게 깍듯이 대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수련이 오히려 상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으음! 어린 나이에 가슴에 슬픔을 많이 가진 아이구나.’
이혼령을 펼쳐 방안으로 들어온 무진은 수련을 보고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느낀다. 그만큼 그녀가 사연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으잉? 내가 보인단 말인가? 후후, 어리다고 우습게 볼 일이 아니군.’
수련은 무진이 방안을 들어온 이후로 계속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령의 기운을 볼 줄 안다는 건 령을 다스릴 줄 안다는 건데.... 으음! 상대가 누구든 최소한 그의 과거에 대한 건 알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저들의 미래를 안다고 말한 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진은 수련을 유심히 살핀다.
‘후후! 제법일세. 내가 마음을 읽지 못한 첫 번째 사람이다. 강제로 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겠지.’
무진은 그녀의 마음을 읽으려다 실패한다. 그런데도 그는 그다지 기분 나빠하진 않는다.
“그건 마음대로 하세요. 제가 거부한다고 해서 안 할 것도 아니니까요. 대신 제가 하는 일을 방해하진 마세요.”
계속해서 손님을 받겠다는 뜻이다.
“그건 알아서 하시오. 하지만 만약 누군가에게 의도적으로 우리 얘길 하면.... 그땐 황실의 질책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불이익을 줄 수밖에 없단 걸 잊지 마시오.”
태양장의 총관 유원의 말에 의하면 수련이 황족 출신이란 것이다. 그래서 무림의 실력자들이 그녀를 존중하는 것이다.
“호호호! 재미가 없네요. 다른 사람들에겐 황실의 황자만 꺼내도 먹히는데, 태양장엔 통하질 않으니 말이에요. 하긴 적마교나 구룡단도 마찬가지겠지요?”
“그걸 아신다면 괜히 딴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요.”
오룡이 다시 한 번 더 다짐을 받는다.
“걱정 마세요. 원래 점쟁이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천기누설이에요. 천기누설로 인해 자신에게 돌아올 재앙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그럼 우린 이만 물러가리다. 가능하면 마주볼 일이 없었으면 하오.”
“세 분도 항상 건강하세요. 다른 건 몰라도 여러분의 올 해 운세가 그다지 좋질 못하거든요.”
세 사람은 밖으로 나가다가 동시에 몸을 돌려 수련을 쳐다본다.
“호호호! 그냥 해본 소리예요. 아무리 힘없는 점쟁이라지만 이 정도 농도 못한다면 무슨 맛으로 살겠어요?”
세 사람은 동시에 속으로 ‘미친 년!’을 외치며 문을 나선다.
“이제 그만 내려오세요.”
세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사라지자 수련이 무진을 쳐다보며 말을 건다.
“이런 모습으로 인사를 하게 되어 미안하구려. 무진이라고 하오.”
“수련이 큰 오라버니께 인사를 올려요.”
무진이 자리에 앉자 수련이 일어나 그를 향해 큰 절을 올린다.
“하긴 아무리 내 동생이지만 낭자처럼 아름다운 여인에게 혼이 안 빼앗길 순 없겠지. 반갑소.”
“말씀을 낮추세요. 소방주님이 아시면 제가 많이 혼난답니다.”
“하하하! 그놈 참, 형들에겐 애기처럼 굴면서 정인에겐 사내 행세를 곧잘 하는 모양이네.”
“제가 지금껏 다른 이의 영혼을 읽지 못한 적이 없었어요. 근데 큰 오라버니의 영혼은 희미하게만 보일 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애써 절 거부하시는 것도 아닌데. 그것만으로도 큰 오라버닌 보통 분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어요.”
“그래. 나도 제수씨보단 여동생이 더 좋아. 특히 너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녀라면 대환영이야.”
“그 말씀은 큰 오라버닌 제 마음을 읽을 수 있단 뜻인가요?”
“세상을 오래 살다 보면 꼭 마음을 읽어야만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단다.”
“저도 그걸 배우려는데 쉽지가 않네요. 큰 오라버니께 한 수 배워야겠어요.”
“나도 가끔 다리 밑에 돗자리를 깔라는 말을 듣긴 하지.”
“호호호! 그래도 큰 오라버닌 안 돼요.”
“왜?”
“이게 그냥 되는 게 아니거든요.”
“비법이라도 있는 거니?”
“다른 건 아니고, 사기꾼 기질이 좀 있어야 해요. 아는 건 하나뿐인데 잘 포장해서 열 가지, 스무 가지를 아는 것처럼 해야 속아 넘어가죠.”
“저 놈들에게도 그렇게 한 거냐?”
“호호호! 사실 제가 어떻게 미래를 알겠어요? 특히 저들처럼 기가 센 사람들이 많은 조직은 미래를 알기가 어려워요.”
“근데 왜 저들에겐 아는 것처럼 말했어?”
“재밌잖아요.”
“재밌다?”
“예. 자칭 중원제일 세력이라는 자들이 제 앞에서 쩔쩔매는 거 보셨잖아요? 언제 이런 경험을 해보겠어요?”
“그러다 놈들이 해코지를 하면 어쩌려고?”
“큰 오라버니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하하하! 갑자기 네가 무서워지는구나.”
“그게 참 웃기더라고요. 제가 원래 겁이 많거든요. 근데 소방주님을 만나고 나서부터 무서운 게 없어졌어요.”
“사랑의 힘이구나.”
“그러게요. 저도 말은 들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 뒤에 소방주님이 있단 생각이 드니까 정말 용감해지는 거 있죠?”
“큰일 났다. 이제 우리 막내가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네. 너 혹시 막내의 미래를 보고 찍은 거냐?”
“당연하죠. 소방주님을 처음 보는 순간 내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사주를 보는데... 큰 오라버니를 비롯한 형제들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고백했어요. 잘했죠?”
“그래. 잘했다. 근데 네 아버진 잘 계시냐? 들리는 말로는 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힘들어 한단 소리가 있던데.”
“오랫동안 은거하셨다더니, 그런 건 어떻게 아셨어요?”
“글쎄?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영업비밀인가요?”
“그런 것도 있고, 사실 지금까지 네 부모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전해 오는 소식을 접수만 하고 있었지. 이젠 진천왕부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
수련은 황제의 외사촌 동생인 진천왕의 무남독녀이다. 진천왕은 황실에서 독특한 존재이다. 황제의 외사촌이라 실세는 아니지만, 가장 친분이 두터운 인물이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고, 황제가 권좌에 오른 뒤에도 힘든 일이 생기면 항상 진천왕을 불러서 위로를 받곤 했다.
정작 진천왕 본인은 참으로 불행한 인물이다. 부인은 나이 사십에 세상을 떠났고, 무남독녀인 딸은 십 년 전 어린 나이로 집을 등졌다. 딸 수련은 어린 시절부터 신기(神氣)가 너무 강해서 열 살 때 남해 보타암으로 보냈다.
부인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족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진천왕으로선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국 신기를 다스리는 데 실패했고, 마음고생이 심했던 부인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실지 모르지만 전 열 살에 집을 떠나 열다섯에 어머니를 잃었어요. 그때 결심했어요. 난 절대로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그래서 어머니 장례식만 치르고 집을 나왔어요. 이상한 건 아버진 미안하단 말만 하시고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다시 5년이란 시간이 지났어요. 당시에는 황제와 황족들의 눈치만 보는 아버지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어요. 근데 세월이 지나면서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아버지란 걸 알게 됐어요. 불쌍한 분이시죠. 아내를 일찍 여위고, 하나뿐인 자식까지 떠나보내야 했으니까요. 만약 그때 아버지의 미래를 점쳐 봤다면 결코 집을 떠나진 않았을 거예요. 점쟁이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과거와 미래를 봤으면서도 정작 자기 가족의 미래를 보지 못했으니.... 돌팔이란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죠.”
“수련아!”
“예. 큰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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