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73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73
지금 협곡은 전체가 거대한 폭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감히 인간의 힘으론 감당하기 어려운 위대한 자연의 힘이 협곡 전체를 짓누르고 있다.
‘분명 저 안에는 엄청난 기운이 준동하고 있다. 근데 너무나 조용하다. 이건 태풍 속의 고요함이다. 위..위험하다!’
대장로는 본능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끼고 장문인과 자미를 찾는다.
“자혜야!”
“예, 사부!”
“자미는 어딨느냐?”
“자..잘 모르겠습니다.”
“어서 피하자. 어서! 모두 피하시오. 어서!”
대장로는 어서! 란 말을 연발하면서 장문인의 손을 잡고 밑으로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무진의 형제들은 그 자리를 지킨다.
“사..사부!”
장문인은 달리다 말고는 대장로의 손을 잡아당긴다.
“위험한데.. 왜 멈추느냐?”
“저들을 보십시오.”
“저들? 엉? 쟤들은 위험한데 왜 저기에 있지? 저건 자미가 아니냐? 자..자미야!”
대장로는 곤일과 같이 있는 자미를 보곤 소리친다. 하지만 곧바로 장문인이 제지한다.
“사부! 저들은 지금 무진이란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죽은 놈을 기다리면 뭐하냐?”
“그게 아니에요.”
“아니면 뭐란 말이냐? 저곳에서 살아나올 수가 있단 말이냐? 인간이?”
“그게 아니라... 그 자가 저렇게 만든 겁니다.”
“그놈이 만들었다니? 화약이라도 사용했단 말이냐? 터지는 소린 못 들었는데?”
“사부!!!”
대장로가 이해를 못하자 장문인이 소리친다.
“얘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솔직히 말해봐라. 지금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사실 두 눈으로 직접 본 저도 이해를 못하는데 안 계셨던 사부가 어찌 믿겠어요?”
“자혜야!”
대장로가 심각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장문인을 부른다.
“난 지금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긴장해 있단다. 무슨 말이든 진지하게 받아들일 테니 자세히 말해봐라.”
“예, 사부. 사실 복잡하진 않습니다. 그 자가 무림평화비가 부셔진 걸 보더니 극도로 흥분해서 이렇게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어떤 한 인간이 너무 흥분해서 산을 통째 무너뜨리고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이 살아나올 거라 믿고 기다리는 멍충이들이 있고.”
“그렇습니다.”
“네 이년!!”
대장로는 흥분해서 제자이자 장문인인 자혜선사에게 욕을 한다.
“네년이 지금 내가 늙었다고 놀리는 거냐?”
“사..사부!”
“아무리 네년이 장문인이 됐다고 해도 그렇지, 사부인 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농락해?”
“사부,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입니다.”
“미친 년! 저런 건 설사 고금제일인자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 자..자혜야.”
대장로는 말을 하다 말고는 갑자기 멍하니 하늘을 쳐다본다.
“예, 사부!”
“방금 내가 고금제일인자라고 했더냐?”
“그렇습니다.”
“만약 고금제일인자가 죽지 않았다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니, 정말 무진이란 자가 저런 일을 했다면 당연히 그 자가 고금제일인자겠지?”
“그렇겠지요. 사..사부! 제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그건 아니다. 하지만 왠지 이상한 생각이 든다. 난 요즘 이상한 꿈을 꾸곤 한단다. 아니, 상상을 한단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자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전에 말했더냐?”
“.....”
“구룡에 대해서 말이다.”
“예. 제가 장문인이 됐을 때 하셨지요. 절대 함구하란 말씀과 함께.”
“으음! 난 요즘 모든 것에 회의를 느끼고 있단다. 얼마 전 구룡단을 만들었을 때만 해도 난 무림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란 꿈와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그게 헛된 욕망이란 걸 깨닫는 순간 무력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단다. 팔십이 넘도록 살아온 인생도 허무하고.... 근데 이 순간 고금제일인자란 소릴 들으니 갑자기 피가 끓는구나. 이유가 뭘까?”
“사부!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지난 백여 년 동안 우리 아미는 외톨이자 동네북이었습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존재가치가 돋보이는 것도 아닌, 그저 그런 문파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전 제 대에서 과거의 명예를 되찾고 싶습니다. 무공은 하루아침에 발전하지 않겠지만, 정신적인 문제, 즉 자존심은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당장이라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림맹에 태양장, 그리고 이젠 구룡단과 적마교에까지 휘둘리고 있습니다. 설사 봉문 하는 한이 있더라도 명예를 지키고 싶습니다.”
“쉽진 않을 게다. 힘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남의 먹잇감이 되는 세상이니까.”
“근데 그게 고금제일인자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글쎄다. 나도 모르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으응? 저건 또 뭐냐?”
대장로가 말을 하는 사이에 상황이 변했다. 협곡에선 돌풍이 잠잠해졌고, 산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사..사부! 협곡이 완전히 옛날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저...저건 사람이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연의 힘으론 저렇게 정교하게 만들 수가 없다.”
“그렇다고 누가 저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문제지. .... 만약에 말이다. 만약에 저 안에 있다는 그 아이, 아니 그 분이 했다면... 어떻게 되는 거냐?”
“사..사부! 그건....”
장문인은 차마 대답을 못한다. 이때 그 대답을 대신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모두 안으로 들어오너라!”
두 사람의 귀를 때리는 커다란 울림이다.
“사..사부,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일단 들어 가보자. 우려인지 기대인지는 만나보고 판단하자.”
“예.”
“너무 깨끗해서 마치 처음부터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일행은 협곡을 통과하고 있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돼 있다.
“50년 전엔 이런 모습이었다. 주위엔 사계절 꽃이 피고 바닥엔 잔디까지 깔려 있었지.”
“그런데 왜 미로를 만들었을 까요?”
“원래 뛰어난 사람은 많은 이들로부터 시샘을 받기 마련이란다.”
“그 말씀은 제자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힘이나 영향력이 있을 땐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하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찾는 사람도 없어지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지. 허허허! 그게 세상의 인심이란다.”
“결국 고금제일인자가 무림인들에게 걸림돌이 됐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지. 그래서 세상 밖으로 격리된 거야.”
“그럼 무림평화비 파손은 구룡단의 작품이겠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니?”
“구룡의 무림 진출에 무림평화비가 걸림돌이 됐을 테니까요.”
구룡은 무림평화비에 자신들은 물론이고, 후인들까지 무림지배를 위한 무림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다. 근데도 난 전혀 몰랐다.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날 무시하고 그런 일을 강행했다면 구룡단은 날 배척하고 있단 걸 의미한다.”
“그럴 가능성은 있나요?”
“일룡과 나의 관계로 봤을 땐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구룡단이 아니라는 건데... 그럼 한 곳뿐이군요.”
“태양장! 아니면 구룡단과 태양장을 궁지로 몰기 위한 제3세력의 음모이거나.”
“무림에 그럴만한 세력이 있나요?”
“내가 보기엔 없는데, 그건 알 수가 없다. 무림사의 격변기엔 항상 그런 세력들이 생기곤 했으니까.”
“사부! 꽃이에요. 꽃!”
일행이 걸어가는 길가에 작은 꽃들이 한 두 개씩 피어나고 있다.
“저게 말이 되나요? 어떻게 심지도 않은 꽃이 필 수가 있죠?”
“그렇게 따지면 지금 우리가 이 길을 가고 있단 사실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지.”
“그렇긴 합니다.”
“그나저나 자미는 어떻게 된 거냐?”
“그러게 말입니다. 저 아이들이랑 어울리는 게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마치 사형제들처럼.”
“저러다.... 아니다.”
“사부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린 저 아이의 미래를 결정할 아무런 권한이 없질 않습니까?”
“흐음! 만약 저 아이가 아미를 떠나겠다고 하면 넌 어쩔 거냐?”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약 고집을 부린다면 속가제자로 라도 남겨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아이들처럼?”
“그러고 보니 쟤들도 속가로군요. 무당은 어떻게 저 아이들을 놓아줬을까요?”
장문인은 앞서 걸어가는 태민 사형제를 보며 얘기를 한다.
“저 정도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라면 극양자의 결정 없인 속가로 내보낼 수가 없다.”
“극양자 어른도 우리와 같은 고민을 했을까요?”
“무당에선 극양자 선배에게 명령할 사람이 없으니 그렇다고 봐야겠지. .... 자..잠깐! 자혜야!”
“예, 사부.”
“고금제일인자가 무당 출신이 분명하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분이 극양자 선배에게 명령을 내렸고, 그래서 저 아이들이 속가가 됐다면....”
“그리고 극양자 어른께 명령을 내린 사람이 무진이란 사람이라면....”
“모든 얘기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무진이란 사람이 고금제일인자가 돼야 하는 건데, 가능한 일일까요?”
“그거야 잠시 후면 알게 되겠지. 이제 다 왔다. 근데 저게 뭐냐?”
“뭐 말입니까?”
“무림평화비가 반 토막 났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랬죠. 그런데... 저..저게 어떻게 된 일이죠? 윗부분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었는데.”
멀리 보이는 무림평화비는 멀쩡하다. 어느 곳 하나 부러지거나 긁힌 곳도 없어 보인다.
“저건 또 뭐냐?”
대장로가 무림평화비의 꼭대기를 손으로 가리킨다.
“글쎄요? 사람인 것 같은데...”
“저길 사람이 어떻게 올라간단 말이냐?”
대장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도 그럴 것이 수직이고, 높이가 이십 장이 넘는 비석을 도움 받을 공간도 없이 오르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때 무진의 동생들이 달려가는 것이 보인다.
“정랑!”
“대형!”
“형님!”
“사부! 아무래도 그 사람이 맞나 봅니다.”
“아..아미타불!”
결국 대장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것만 봐도 고금제일인자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봐야겠지. 문제는 반로환동(返老還童)을 한 건지, 아니면 후계자인가 하는 거다. 그에 따라서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만약 예상대로 극양자 어른이 저 분의 말씀을 듣고 두 아이들을 놓아줬다면, 반로환동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무림은 큰 혼란에 빠지겠군요.”
“그런 건 혼란이라고 하지 않고, 재탄생이라고 하는 거란다. 오히려 혼란은 크지 않을 거다. 저건 이전의 고금제일인자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경지다. 감히 누가 저 분에게 도전을 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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