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72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72
“아미는 이미 우릴 자기편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럴 땐 우리에 대해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게 좋다. 물론 네 자신을 평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대형은 저의 움직임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무인에게 몸과 마음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너의 경우는 분리해서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을 다잡지 못해서....”
“그래서 배우는 거다. 무림은 하루에도 몇 번씩 천당과 지옥을 왕복하는 곳이다. 그런 것에 비하면 네가 아까 처한 상황은 오히려 평온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넌 몇 번이나 마음이 흔들렸다. 인정하느냐?”
“예.”
“같은 실력이라도 평상심을 유지하는 자와 상대의 심리전에 말려서 쉽게 흥분하는 자는 천양지차의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넌 오늘 상, 중, 하로 친다면 중의 하에 속한다.”
“죄송합니다.”
“그에 비해 몸 상태는 제법 괜찮았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운기조식을 열심히 한 덕분에 단전의 기운을 많이 녹였다. 그래서 내공이 배 이상 증가했다. 생사무도 많이 향상되었다. 발전 속도는 형제들 중에서 가장 빠르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게 온전히 네 혼자의 힘이 아니다. 형들의 수련하는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시행착오를 많이 줄인 덕분이다.”
“누님, 형님들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일초는 고개를 끄덕인다.
“문제는 앞으로다. 지금 넌 내공에 비해서 무공실력이 현저히 낮다. 빠른 시간 내에 균형을 맞춰야 한다. 해서 당분간은 일초가 전적으로 맡아서 일이를 가르쳐라. 여기엔 일고의 인정과 형제애가 개입돼서는 안 된다. 냉혹한 무림의 세계를 배울 수 있도록 엄히 가르쳐야 한다.”
“염려 놓으시오. 그런 거라면 나만한 사람이 무림엔 없을 거요.”
“일이는 작은 형을 사부라 생각하고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곤일의 눈가엔 이슬이 맺혀 있다. 조금 전 자미와의 비무는 그에겐 큰 시험이었다. 그걸 무사히 통과했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한 것이다.
“근데 아미가 우리를 자기편으로 만들기로 했단 건 무슨 뜻입니까?”
태민의 질문이다.
“지금 아미는 꽤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미는 구파일방에서도 변방에 있는 문파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속한 무림맹이 무너지고, 적마교의 공격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고 정파의 정신적인 기둥인 태양장이 자신들의 편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한 마디로 사면초가에 처해 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대장로가 구룡의 일원이면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구룡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게 그들의 전통이다. 만약 그게 공식화되면 태양장으로부터 공공연하게 견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진은 얘기를 하다 잠시 머뭇거린다. 말을 할지를 고민하는 눈치다. 그의 고민을 호란이 정리해준다.
“혹시 두 사람의 마음을 읽으셨어요?”
“그렇소. 대장로는 구룡이 분명하오. 그리고 어떤 이유에 의해서 일룡을 비롯한 구룡과 등을 진 모양이오.”
“그럼 아미가 손을 내밀면 잡아야겠군요.”
“우리로선 손해 볼 일은 아니다. 너와 자미의 관계를 봐서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겠지.”
“가..감사합니다.”
곤일은 인사를 하면서도 얼굴을 붉힌다.
“그 자식 그거 참 얼굴 두껍네. 나도 저 나이에 저 정도로 내 감정에 솔직했으면 벌써 손자를 봤을 텐데....”
“그래서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게 있다는 거야.”
일초는 또 핀잔을 듣는다.
“숙소로 가자. 최대한 시간을 아껴서 수련 시간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
“예!”
일행은 모두 숙소로 향한다. 그들이 막 등을 보이자 건물 뒤편에서 한 사람이 고개를 내민다. 자미다.
‘내상이 괜찮아야 할 텐데.... 근데 이해가 안 된다. 내공은 나보다 월등한데, 실전능력은 초보수준이다.’
자미는 곤일에 대해서 비교적 잘 판단하고 있다. 두 사람은 불과 두 번 밖에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정도 판단하려면 관심 있게 지켜보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이상하다. 금방 헤어졌는데 벌써 눈에 어른거린다. .... 크..큰일났다. 난 승려다. 근데 사내를 마음에 두고 있으니... 사부가 알면 파문이다. 파문! .... 파문? 근데 그게 왜 나쁘단 생각이 안 들지?’
자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라진다.
천인문(千人門).
한 때 천인문엔 무인뿐만 아니라 일반인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고금제일인자에 대한 공경심(恭敬心) 때문이기도 하지만, 혹시라도 천인문 안에 고금제일인자가 남긴 유물이나 비급이 있지 않을까 해서 몰려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후 백 년 정도가 지나자 시들해지더니 이젠 일 년이 가도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끼이이익!
성벽만큼이나 높고 큰 철문이 열리자 눈앞에 거대한 협곡이 나타난다. 철문만큼 폭이 넓은 길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이어져 있다.
“문은 언제 만들어졌소이까?”
무진이 장문인에게 한 말이다. 안내는 장문인이 하고, 그 다음 무진 일행이, 마지막에 자미와 제자들이 따르고 있다.
“약 오십 년 전에 세워졌습니다. 사람들이 많았을 땐 필요성을 못 느꼈는데, 뜸해지자 관리하기가 어려워져 무림맹에서 만들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천인문과는 많이 다르군요.”
“그렇습니다. 무림맹에서 철문을 만들면서 내부를 미로처럼 만들었습니다. 외부세력이 들어와서 무림평화비를 훼손할까봐 그런 모양입니다.”
“어떤 놈들이 고금제일인자가 세운 무림평화비를 훼손한단 말이오?”
일초가 따지듯이 묻는다.
“꼭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냥 고금제일인자의 뜻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한 것 같습니다.”
“장문인께선 이런 미로에 들어오면 존경심이 생기는 모양입니다?”
일초는 노골적으로 비꼰다.
“으음!”
장문인은 인상을 찌푸리지만 반박을 하진 않는다.
“이곳 관리는 어떻게 합니까?”
무진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보면서 말한다. 낙엽뿐만 아니라 각가지 쓰레기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 그는 서서히 분노지수가 올라간다.
“보시다시피 찾는 사람이 없는 관계로 별다른 관리는 하지 않습니다.”
순간 협곡에 돌풍이 불며 협곡 위에서 돌무더기들이 우두둑 떨어진다.
“자...장문인! 뒤로 물러나세요?”
자미를 비롯한 제자들이 자혜선사를 뒤쪽으로 잡아당기며 위기를 넘긴다. 하지만 무진 일행은 그대로 걸어간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미로처럼 얽혀 있던 협곡이 대부분 무너져 내린다.
“자..장문인! 어떻게 할까요?”
“들어간다!”
자미의 다급한 목소리에 장문인은 간단히 대답하곤 안으로 걸어간다.
“우리도 장문인을 따른다!”
“우우웃!”
장문인은 말은 들어간다고 했지만, 막상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다. 엄청난 양의 흙더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문인!”
“자미만 따라오너라!”
제자들은 안전을 위해 그 자리에 두고 두 사람만 안으로 들어간다. 내공을 끌어올려서 몸을 보호한 다음에야 간신히 움직인다. 얼마쯤 들어갔을까? 흙더미와 돌풍이 줄어들며 서서히 눈앞의 광경이 드러난다.
“자..장문인! 미로가 완전히 사라졌어요.”
“아..아미타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수 년 간의 공사 끝에 어렵게 만든 미로가 불과 반각 만에 허공으로 흩어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을 놀라게 한 건 다른 것이다.
“사..사저!”
전면에 있는 거대한 비석을 보는 자미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무진 일행 모두 같은 상황이다.
“자..자미야, 저게 어떻게 된 일이냐?”
“저도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지난달에 왔을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저 정도 큰 비석이 부셔지면 산사에서도 들려야 하지 않느냐?”
“미로 때문에 안 들렸을 수도 있습니다.”
장문인과 자미의 말처럼 전면에 있는 이십여 장 높이의 거대한 비석이 깨져 반 토막이 나 있다. 그게 바로 무림평화비이다. 구룡이 직접 만들어 고금제일인자에게 바친 일종의 충성서약서이다.
우우우우웅!
갑자기 주위에 또 다시 돌풍이 분다.
“대..대형!”
무진이 흥분해서 자신도 모르게 자연무예를 펼친 것이다. 그냥 단순히 자연무예를 펼친 게 아니라 이성을 잃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혀..형님!”
“저..정랑! 정신을 차리세요. 정랑!”
동생들은 물론 호란까지 나서보지만 무진은 진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상태가 더 안 좋아진다.
“아가씨! 위험합니다. 일단 피하셔야겠습니다.”
“안 돼요. 이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지체하다간 동생들까지 모두 위험해집니다.”
파팟!
일초는 호란의 혈도를 제압하고는 들쳐 업고 뒤쪽 물러난다.
“어서 피해라. 어서! 장문인도 따라오시오!”
일초를 선두로 일행은 모두 철문을 향해서 전력을 다해 달린다.
“아앗!”
얼마나 달렸을까? 멀리 철문이 보이는 지점에 이르자 자미가 그만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진다.
“스..스님!”
즉시 곤일이 그녀를 안아서 계속 달린다. 앞 뒤 상황을 살필 입장이 못 되기 때문이다. 이미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일행의 뒤로 덮치고 있다.
우르르르르릉!
협곡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고, 아미산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산사태는 물론이고, 산의 일부분이 주저앉을 수도 있다.
“자혜야!”
철문을 열고 나오자 밖에서 대장로가 기다리고 있다. 그도 상황이 심상찮다는 걸 느꼈는지 제자들은 데리고 오지 않았다.
“사..사부! 무림평화비가, 무림평화비가....”
“무림평화비가 어떻게 됐단 말이냐? 우우욱!”
대장로가 말하는 사이 엄청난 양의 바위들이 떨어져 철문을 넘어뜨려버린다.
쿠아아아앙!
“대..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사..사부!”
“그래 자혜야.”
“무림평화비가 부셔졌습니다.”
“그..그게 무슨 소리냐? 멀쩡하던 무림평화비가 부셔지다니? 산사태 때문이냐?”
“아닙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반 토막이 나 있었습니다.”
“뭐라고? 그럼 사람이 부셨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근데 이건 무슨 일이냐?”
“그..그건 말씀 드려도 믿지 못하실 겁니다.”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위험하니 일단 내려가자.”
“안 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려? 뭘?”
“.....”
장문인은 다시 입을 닫는다.
‘저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무림평화비가 부셔졌단 건 뭐고, 멀쩡한 곳에서 산사태는 왜 일어났지? 그리고 기다린다는 건 누군가가 안에 있단 건데, .... 무진이란 아이가 없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이런 일을 일으켰다고 할 수 없지 않는가? 그래도 기다린다는 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단 건데...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미타불!’
대장로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자 협곡 안쪽을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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