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15
배신과 모함이 난무하는 세상 그 혼란을 잠재울 자는 누군가? 여기 복수를 위해 200년을 기다려온 자가 있다. 그의 이름으로 처절하게 복수하고, 따뜻하게 용서하는 얘기가 시작된다.
세상 속으로 뛰어들다 – 15
“장주님, 전 그런 표현은 부담스러워요. 앞으론 친구이자 가족처럼 대해주셨으면 해요.”
“알겠습니다.”
“근데 서희낭자는 올해로 나이가 몇인가요?”
번쩍!
순간 왕명이 눈을 크게 뜨며 무진과 양문, 그리고 추개까지 쳐다본다. 당연히 세 사람도 비슷한 눈빛을 보낸다.
“스물 둘입니다. 헌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적당한 나이군요.”
왕명의 답변에 호란은 흡족한 표정이다.
“적당하다는 건 어떤 의민가요?”
“그야 당연히 시집가기에 좋은 나이죠. 혹시 장주님께선 따님을 오랫동안 품고 계실 생각이세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마음은 그렇습니다만, 저보다는 짝과 함께 보내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엄마 없이 외롭게 컸는데 시집이라도 제때 보냈으면 합니다.”
“사위는 고려인을 고집하시나요?”
“그건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든 이 아이를 아껴주기만 하면 됩니다.”
“좋은 생각이신 것 같네요.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중매를 서도 될까요?”
“방금 중매라고 하셨습니까?”
“그래요. 혹시 제가 나서는 게 마음에 안 드세요?”
“그..그럴 리가 있습니까? 감사,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네 지금 뭐하고 있나?”
“예에? 무슨 말씀이신지?”
갑자기 왕명이 양문을 다그친다.
“이 사람아, 이런 날에 술이 빠지면 되겠나? 어서 술상을 봐 오게. 어서!”
“당연히 준비해야죠. 이런 날에 안 마시면 언제 취해보겠습니까?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서희가 시집을 간다니 밤새 술을 마셔도 안 취할 것 같습니다.”
양문과 추개는 벌써 술에 취한 것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은 무진에 의해서 한 순간에 무너진다.
“됐네. 자네들에게도 할 얘기가 있으니 앉아 있게.”
“저희들에게도 요?”
무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말없이 자리에 앉는다.
“혹시 생각해두신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사실 서희낭자를 처음 봤을 때 그 아이들이 생각났어요. 저와 정랑이 동생처럼 생각하는 아이들이에요.”
“무 대협이 동생처럼 생각하는 분들이라고요?”
“그래요. 한 가지 걸림돌이 있긴 한데 그 문제는 정랑이 책임지고 해결하실 거예요.”
“근데 둘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그 아이들의 의견도 물어야 하고, 무엇보다 서희낭자의 뜻이 중요해서요.”
순간 모든 시선이 서희에게 집중된다.
“네 생각은 어떠냐?”
부친이 묻자 서희는 잠시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리더니 입을 연다.
“전 아직 결혼 문제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버님과 은공께서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어요.”
좋다는 뜻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무조건 부모의 뜻에 따르는 건 좋지 않다. 나중에 직접 만나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그렇게 할 게요.”
“그 문제는 그렇게 하고, 분타주!”
무진은 추개에게 시선을 돌린다. 갑자기 추개의 얼굴이 굳어진다. 왕명의 말이 사실이라면 상대는 고금제일인이다. 몰랐을 때도 약간 부담스러웠는데, 알고 나니 눈빛만 쳐다봐도 오금이 저린다.
“예, 어르신!”
“쯧쯧, 어르신이 뭐냐?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
“예에?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제가 고금제일인을 형님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싫단 말이지?”
“싫다는 게 아니라..”
“그럼 그렇게 해. 장주!”
“예, 무 대협!”
“우린 모두 한 가족이다. 동의 해?”
“물론입니다. 우린 모두 한 가족입니다.”
“좋다. 집안에는 평화와 단결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동의해?”
“그렇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위계질서가 뚜렷해야 한다는 것도?”
“물론입니다. 어떤 조직이든 지도자가 있어야 하니까요.”
“해서 지금부터 우리도 서열을 정한다. 대형은 내가 먹어야겠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장주가 둘째를 하고, 그 다음 양문이, 그리고 추개가 막내다. 물론 여기 있는 사람들 기준이다. 아마 가족은 좀 더 늘어날 거야. 이의 있나?”
“없습니다.”
왕명을 선두로 동의한다. 근데 양문이 손을 든다.
“할 말이 있니?”
“직접 확인을 해보고 싶습니다.”
“내가 고금제일인이냐 하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250년 전에는 분명 그렇게 불렸다.”
“그럼 전 반대입니다.”
“이유가 뭐냐?”
“개인적으론 어르신을 형님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보지 않을 겁니다. 그들 눈엔 제가 분수를 모르는 놈일 테니까요.”
“니가 하는 말은 이해한다. 하지만 우린 가족이다. 가족의 유대감은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설사 니가 살인마라고 해도 내 동생인 이상 우린 운명을 같이한다. 그게 가족이다.”
“아!”
양문은 무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어나 큰 절을 올린다.
“양문이 대형을 뵙습니다!”
“왕명이 대형을 뵙습니다.”
“개방의 추개가 대형을 뵙습니다.”
무진이 가족을 강조하는 건 소속문파의 구속에 억매이지 않기 위해서다.
“당신이 서희와 함께 술상을 좀 봐 오시오. 형제들과 기쁨의 잔을 들고 싶소.”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준비할 게요.”
두 사람이 나가자 무진은 형제들과 무공에 관해서 얘기를 나눈다. 그 동안 자기가 만든 무공을 형제들의 체질에 맞게 적절하게 나눠준다. 다만 심법이나 격권, 그리고 신법은 똑 같이 가르칠 계획이다.
“명심할 것은 무공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혹자들은 12성의 경지에 오르면 대성하는 것이고, 이후엔 아무리 노력해도 실력향상이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생각이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아무리 노력해도 새로운 단계로 올라갈 수 없다.
생각을 해봐라. 십년 동안 3성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무공이 있다면 그걸 백 년 동안 꾸준히 익히면 어떻게 될까? 단순하게 생각해도 30성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물론 1성을 향상시키는 데도 백 년의 세월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단 1 년 만에 10성의 경지에도 오를 수가 있다. 내가 장황하게 설명을 했는데, 요지는 스스로 대성이란 벽에 갇히지 마라는 것이다.”
“생각만 바꾸면 되는 건가요?”
추개의 질문이다.
“좋은 질문이다. 니 말대로 생각만 바꾸면 된다. 대신 그에 따르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
“.....”
동생들은 모두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마음은 내가 1성의 경지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수련할 때는 3성 수준으로 하면 어떻게 될까? 여기에 같은 경지에 있는 두 수련자가 있다고 치자. 그 중 한 사람은 난 이제 겨우 기초단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조금만 더 수련하면 대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하자 동생들의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골치 아픈 얘긴 이 정도로 하고, 지금부턴 한 잔 하면서 편하게 얘기하자.”
마침 호란과 서희가 술을 들고 안으로 들어온다.
“예, 대형!”
“자, 모두 잔에 술을 채워라!”
이렇게 일행은 모두 연속 세 잔의 술을 단숨에 마신다.
“이것으로 우린 한 가족이 되었다. 우린 비록 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서로 존중하며 의리를 다해야 한다.”
무진이 외치자 왕명이 뒤이어 말한다.
“위로는 대형을 모시고, 아래로는 동생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다.”
“전 형님, 동생들과 함께 원 없이 한 번 세상을 질타하고 싶습니다.”
“전 형님들과 함께 거지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양문과 추개도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당신은 할 말이 없소? 서희는?”
“전 당신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전 빨리 몸을 회복해서 큰 숙부의 무공을 익힐 거예요.”
“호오! 그래서?”
“무공을 익혀 고금제일인이 되겠어요.”
“여자 고금제일인이 아니라 날 뛰어넘어 명실상부한 고검제일인이 되시겠다?”
“예!”
“와! 그렇게 되면 한 집안에 고금제일인이 두 명이 나오는 거네?”
“하하하! 이런 걸 가문의 영광이라고 하는 거겠죠?”
“가문의 영광! 야, 그거 듣기 괜찮다.”
형제들은 한 동안 즐거운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약 한 시진 정도가 지나자 무진이 화제를 바꾼다.
“그건 그렇고. 아까도 말했지만 내게는 동생들이 있다. 그 얘들은 다음에 소개하고, 추개야!”
“예, 대형!”
“최근 무림의 동향에 대해서 알 수 있겠니?”
“물론입니다.”
“자세한 얘기는 따로 하고, 큰 줄기만 정리해다오.”
“예, 대형께서 말씀하셨듯이 최근 무림엔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세 가지는 꼭 알아야 할 일입니다.”
“세 가지?”
왕명이 추임새를 넣는다.
“예. 첫째는 무림맹과 관련된 일입니다. 총사 팽도수를 비롯한 무림맹의 핵심인물들 모두 은퇴를 결정하면서 무림맹은 이미 해체된 거나 마찬가집니다. 구파일방과 사대세가의 핵심인물들은 대부분 본가로 돌아갔습니다.”
“두 번째는?”
왕명이 얘기를 독촉한다.
“살인교에 대한 소식입니다.”
“살인교?”
“예! 놀라지 마십시오. 살인교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살인교가?”
“그게 무슨 말이냐? 살인교가 사라지다니?”
“사라졌다는 게 무슨 뜻이냐?”
살인교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오자 모두 놀란다.
“개방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살인교는 지난 한 달 동안 누군가로부터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아왔다고 합니다.
“공격한 게 아니고 받았다고?”
“예. 그러다가 얼마 전 교주를 위시한 핵심인물들이 모두 살해됐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살인교의 핵심인물들이 암살당했다고? 그건 무림맹도 하지 못한 일인데.”
“무림에 그런 일을 할 세력이 있었어? 믿을 수가 없군.”
“천하제일살수인 일초살수란 분이 한 일이에요.”
“일초살수! 그가 살아 있었나요?”
“물론이죠. 정랑의 동생이기도 한 걸요.”
“일초살수가 대형의 동생이라고요?”
“예, 이제 오라버니의 동생이기도 하죠.”
“허! 추개야. 일초살수가 내 동생이란다.”
“형님 동생이면 내 동생이기도 하겠네요.”
“그건 모르겠어요. 누가 더 나이가 많은지?”
“그거야 만나서 확인을 해보면 알겠죠. 그럼 살인교는 형님과 관련됐겠군요.”
“그것만이 아니에요. 무림맹도 정랑의 작품이에요.”
“예에? 대형, 사실입니까?”
추개가 화살을 무진에게 돌린다.
“자세한 건 일초가 오면 자세하게 물어보고, 나머지 한 가지도 들어보자. 혹시 구룡과 관련된 것이냐?”
“대형도 알고 계셨습니까?”
“그냥 추측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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