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적유성탄 - 1
“공주님 이대로 가다가는 공주님까지 위험하십니다.”
주소연은 왕진의 말을 들으면서도 가타부타 입을 열지 않았다.
“공주님, 이대로 계시면 안됩니다.”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황상께 독대를 청하십시오. 황상은 현명하신 분입니다. 힘을 좀 달라고 하십시오. 분명 공주님께 힘을 주실 것입니다.”
“황상을 만날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여러번 독대를 신청했지만 연락이 없어요. 제 짐작이 맞다면 황상은 제가 독대를 청한 것 조차도 모르시고 계실겁니다.”
영락제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여자로서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던 주소연이었지만 갑작스런 영락제의 죽음과 역시 자신을 예뻐하던 주고치의 급사로 급속도로 힘을 잃기 시작했다.
어릴 적 선덕제 주첨기는 두 살 위인 주소연을 누나 누나 하면서 무척 따랐다. 거기다 여인이지만 무공 익히기를 즐겨하고 강호행을 자주한 주소연의 입담을 좋아했다,
주첨기가 황제가 된지 이제 육개월, 영락제가 주고치의 몸이 너무 약한 것을 알면서도 태자의 자리에서 내치지 않은 이유가 주고치의 아들인 주첨기때문이라고 할 정도로 주첨기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강북의 정치세력을 배경으로 권력을 잡은 영락제는 경제를 틀어 쥔 강남세력과 사이가 극도로 나빴다.
황도를 강남인 남경에서 강북인 연경으로 옮긴 것도 남경에 계속 머물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던 이유도 한 몫을 했다. 이후 패황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권력으로 강남의 세력들을 눌러오던 영락제가 죽은 후, 강남세력은 연경을 정점으로 한 강북세력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항우와 비견될 정도로 용맹한 한왕 주고후가 있었다.
주고치가 조금만 더 살고 주첨기가 태자로서 자리를 확고히 다졌다면 주소연 역시 이런 곤경에 빠지지 않았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너무 빠른 주고치의 죽음으로 주첨기가 믿을 수 있는 친위대는 동창과 금의위만이 남게 된 것이다.
아무리 영민하다하나 아직 약관이었고 그의 권력기반은 무척 불안했다.
동창과 금위의의 권력욕과 부정은 황실의 큰 골치거리였고 주첨기도 문제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황상의 총애를 잃는 순간 모든 힘을 잃는 그들의 황제에 대한 충성심만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주소연과 동창의 사이가 나쁜 것은 대내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전 황제때부터 주소연은 줄기차게 동창의 권력을 축소해야한다고 주청했고 어느 시기에는 그녀가 동창을 꺽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동창의 운이 좋은 것인지 주소연의 운이 나쁜 것인지 정치상황이 급변하는 큰 사건이 벌어져 동창은 다시 살아나곤 했다.
지금도 주소연이 완전 끈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전황제인 영락제가 임명해준 대내 수석감찰관이라는 직위가 있었고 여전히 동창을 포함한 모든 신하를 감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동창에게는 목의 가시같은 존재가 바로 주소연이었던 것이다. 결국 동창에서는 주소연의 지위를 빼앗기 위한 정치공작을 여러번에 걸쳐 시도했다. 하지만 주첨기는 선황이 임명한 사람을 특별한 과(過)도 없이 바꿀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믿을 곳이 동창이지만 그들을 어느정도 견제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 놓고 주소연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없었던 주첨기는 주소연만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동창의 월권을 묵인한다.
그리고 일어난 사건이 팔지신타의 습격이었다.
주소연의 버팀목이자 사부와 같던 팔지신타가 갑작스런 괴한의 습격으로 큰 부상을 입은 것을 시작으로 곧 이어 그녀의 오른팔이었던 대내제일고수였던 황지용이 천호대장군으로 영전하여 북방으로 떠난다. 분명 영전이었지만 주소연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거기다 감찰단장으로 감찰관의 일을 보좌하던 용대철까지 금의위 총사로 옮겨가면서 그녀에게는 가용할 힘이 사라져버렸다.
거기다 그를 옹호해주던 고위 간부들이 둘이나 옥에 갇히면서 그녀를 돕는 사람들은 극도로 위축이 되어버렸다.
감찰관에게는 직접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군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힘을 있을 당시에는 어디든 연락만 하면 군사를 빌려주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군사를 빌려주는 기관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심중에 가장 비정한 인심이 정치인심이라고 했다. 그녀가 입을 열면 열심히 여론을 만들며 힘을 주던 신하들도 그녀가 힘을 잃는 것 같자 순식간에 입을 닫기 시작했다.
정치싸움에 중요한 것은 여론이었다. 그리고 그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돈과 힘은 필수였다. 그러나 힘을 잃은 그녀에게 돈과 힘을 줄 세력은 연경에 더 이상 없었다. 그녀의 마지막 힘이었던 아버지 창왕도 지금은 몸을 바짝 웅크리고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황제와 한왕 주고후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지금 함부로 나섰다가는 양쪽 모두에게 당할 수 있는 것이다.
“한왕 전하가 정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연경을 다 덮고 있습니다. 정변이 일어나면 동창의 입김이 더 커질 것입니다. 그 안에 공주님께서 어떻게든 세력을 되찾아 동창을 견제하지 못한다면 황상은 허수아비 황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왕진의 말에 주소연이 고개를 저었다.
“황상은 선황제께서 극찬을 할 정도로 영민하십니다.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두고보지만 절대로 동창의 말에 휘둘릴 분이 아닙니다.”
실지로 주소연은 황상과 자신의 만남이 계속 무산이 되고 있는 상황도 이해가 안되었다. 그녀가 아는 주첨기는 절대로 눈과 귀를 막고 있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휴우... 어쨌든 이분들의 의기는 알겠지만 모두 일개 한림원 학사들이야... 힘이 안돼...’
현재 그녀를 지지하는 소장학자들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평화시에는 한림원 학사의 상소는 큰 힘을 발휘하지만 지금같은 격변의 시기에는 학사들은 아무리 많아도 힘이되지 못했다.
“여러분들의 의기는 알겠어요. 하지만 어제도 저를 지지하던 분이 옥에 갇히셨어요. 더 이상 저와 가까이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만약 내가 당한다면 이후 동창을 견제하실 분들은 여러분들 밖에 없어요. 오늘 이후 저를 찾아오지 마세요.”
주소연의 말에 앞에 앉아있던 학사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금 연경에서 정치적으로 동창에 반대를 하는 고위인사들이 현 정치상황과 맞물려 연달아 숙청을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주소연을 지지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던 것이다.
“저희들이 힘이 없어 도움이 못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아니예요. 제가 동창을 어느정도 제어할 힘을 갖춘다면 그때부터는 여러분들을 보호할 수 있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여러분의 붓의 힘이 무력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숨을 죽이고 기다려달라는 것입니다.”
“공주님, 금의위의 용총사는 공주님과 아주 가깝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분께 도움을 청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동창이 어떤 자들인데 그정도를 짐작 못할까요. 용총사와의 연락이 두절된지 이미 한 달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용대철정도의 지위라면 얼마든지 그녀를 한 번은 보러올 수도 있었다. 주소연은 용대철같은 강골이 동창이 무서워서 그녀를 피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용대철은 그녀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지만 팔지신타나 황지용과는 달리 황제의 명만 들었다, 그녀를 도운 것도 황제의 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보러오지 않는 것도 황제의 암묵적인 명때문일거라고 그녀는 믿었다.
“지금 현재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힘을 만드는 방법뿐이예요. 황상은 저를 믿고 아주 영민하신 분예요. 현재는 믿을 곳이 동창 밖에 없고 실질적으로 그들의 힘이 필요해서 동창에게 힘을 실어주고 계시지만 내게 힘이 생긴다면 분명 황상께서 나를 동창과 같은 위치에 올리시고 서로간에 견재하게하는 방법을 택하실겁니다.”
“하지만 지금 공주님께서 힘을 만들 방법이 전혀 없지 않습니까?”
“아니요.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예요. 하지만... 그를 불러들이는 즉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나조차도 감당이 안되니...”
주소연은 뭔가 고민이 있는 듯 말을 흐리다가는 입술을 앙 다물고는 결심한 듯 말했다.
“하지만 동창이 나를 자꾸 구석으로 몰고 숨 쉴 여지를 주지않는다면! 나도 그냥 죽을수는 없으니 지옥의 불길이라도 끌고 와야겠지요.”
주소연의 머리에는 세상만사가 모두 자기를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한 명의 막무가내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그래... 유성탄 그만이 나를 이 난관에서 구해줄 수 있어. 그리고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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