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형사 된 사연 2

◆ 하늘아래 첫 동네 ◆
학교를 졸업하고 대기 중 처음 교직 발령을 받은 곳으로 가기 위해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에 상주읍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덜거덕 거리는 화북행 시골버스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1시간 달려갔다.
문장대 방면으로 가다가 하송1리에 내려 등에는 이불을 지고 오른손엔 옷 꾸러미, 왼손엔 책과 세면 도구등을 가지고 청계 마을을 거쳐 견훤산성을 지났다.
1시간 가량 걸어 해 질 녁에 큰 고개를 올라가니 발 아래 뛰엄 뛰엄 불빛이 보이는 곳 중간 비탈에 학교로 보이는 건물이 상주시 외서면 대전리 갈골리에 있는 전의초등학교 갈골 분교였다.(지금은 원래 살던 주민들은 시내로 이주했고 종교 단체가 들어와 있다)
조그마한 학교 옆에 떨어져 있는 관사에 도착하니 당시 나이가 50대 중반에 있는 두 분이 계셨는데 한 분은 분교장인 김0목 선생님과 자연을 벗 삼아 꿀을 키우는 박0주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 해주셨다.(대개 교감 승진을 위하여 점수 관리차 지원하는 곳으로 울릉도 근무 점수와 같음. 40년 전이니 이미 작고 하셨다고 생각됨)
젊은 교사들이 분교 발령을 싫어하거나 지원자가 없었고, 젊은 전임자는 치유차 왔다가 병세가 악화되어 여름방학 때 휴직을 신청하여 내가 긴급히 수혈 되어 발령기간이 아니였음에도 첫 부임을 하게 된 것 이었다.
교살 3칸과 떨어져 있는 관사는 방이 두 개였는데 두 분 연세가 비슷하고 가족들이 두 분 다 대구에 계셔서 같이 한방을 쓰고, 다른 방 하나는 청년인 내가 혼자 사용을 했다.
간신히 전기만 들어오고 난방은 부엌에서 군불을 지펴야 했는데 학교 청부가 맡아서 하지만 약주를 한잔 하거나 본교에 문서 수발차 갔을 때는 내 몫이었다.
처음에는 불을 지피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매캐한 냄새와 연기 때문에 이유 없는 눈물도 많이 흘렸다.
식사는 교실 옆에 있는 청부의 집에서 먹는데 조금 비쌌고, 매일 된장에 고추장, 간장이 기본이며 본교에 갔다 오거나 오일장을 갔다가 오면 고등어나 꽁치가 한번씩 올라 온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 할 만큼 백두대간 중간 지점이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빼꼼이 보이는 동네였다. 산비탈 중간 중간에 집과 그 옆에 지붕이 높은 담배 건조대가 있었으며 그 중간에 교실 3칸의 조그마한 학교가 있었다.
운동장에는 여러명의 여자 아이들이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 놀고, 그 옆에는 남자 아이들이 공치기를 하며 뛰어 놀고 있었는데 운동장이 손바닥만 하여 조금만 뛰어도 축대 밖으로 팅겨 나갈 것 같은 곳으로 화전민들이 사는 1980년도 산골 분교 운동장의 모습이다.
전교생이 36명이고 1학년 8명, 4학년 8명은 분교장인 김 0목 선생님이, 3학년 5명, 6학년 4명은 박 0주 선생님이 맡고 계셨고, 나는 2학년 5명, 5학년 6명등 11명을 한 교실에 타원형으로 앉혀 놓고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2학년을 가르칠 때는 5학년에게 자습을 시키고, 5학년을 가르칠 때는 2학년에게 자습을 시키는 그야말로 이원 교육이었다.
교실 안에는 큰 북, 작은 북등 타악기와 피리, 멜로디온등 금반 악기들이 있었지만 사용한 흔적들이 없었다.
나는 욕심에 전부 조금씩이라도 교육을 하고 싶었지만, 혼자 너무 열정적으로 하면 기존에 계신 선생님들에게 누가 될 것 같아 나는 수업 시간이나 방과 후에 태권도만 가르쳤다.
“땡 땡 땡”
조용한 산골에 적막을 깨는 종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이 종소리는 시골 분교의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골짜기를 울리는 종소리는 산골의 점심시간이기도 했다.
아이들이 점심을 먹으로 집에 가면 조그만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하던 부모님들도 같이 점심을 먹기 때문이다.
본래 11:50 되면 학교 청부가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는데 수업을 하고 있던 나는 시계를 보니 12시가 다되었는데도 종소리가 없어 청부가 어디 가서 일을 하느라고 까먹은 줄 알고 3칸 교실 중간에 있는 종을 내가 나가서 쳤다.
옆 교실에서 수업 중이셨던 김 선생님과 박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나오시며 “무슨 일이고?, ”김 선생 무슨 일입니까?“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종을 안치기에 제가 쳤습니다”
“뭐라고요? 내 시계는 아직 11신데..
“내 시계도 11신데..”
“어! 내 시계가 틀렸나?”며 교실에 있는 시계를 보니 내 시계가 고장이 나서 한 시간 빨리 간 것 이었다.
‘어이쿠 큰일 났다 싶어’ 조그마한 운동장을 지나 집에 밥을 먹으로 가고 있는 5학년과, 수업을 마치고 가는 2학년들을 급히 불렀다.
“야들아! 종을 잘 못쳤다. 아직 수업 안 끝났으니 삘리 돌아 온나..”
골짜기를 울리는 고함 소리를 듣고 집으로 가던 학생들이 다시 교실로 돌아왔다.
시골 학교가 아니면 일어 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선생님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더라도 같은 선생님에게는 아이들이 보고 있기에 항상 존대 말을 해주신다.
이곳 주민들 30여 세대는 대부분 고향이 이북이고 6. 25 전쟁 때 정감록에 나오는 난을 피하는 장소인 우복동을 찾아와 내려온 피난민들이었으며 제일 연장자 이셨고 평양에서 공직에 있다가 내려 오셨다고 하는 유노인을 정점으로 단결력이 대단했다.
우복동(牛腹洞)은 말 그대로 소의 배 안처럼 생긴 동네라는 뜻으로, 예부터 3재(災)가 들지 않는 명당, 즉 이상향으로 꼽혀 왔다. 만약 어느 특정 지역이 소의 배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면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는 널찍하면서도 주변에 완벽한 은폐 엄폐형 지형을 갖춘 마을로 연상될 것이다. 실제로 현재 전국에서 우복동이란 명칭이 붙은 지역은 하나같이 이런 마을형태를 갖췄다. 밖에선 들여다보기가 힘들지만 경관이 좋으며 농토 또한 넓고 기름지다. 때문에 3재 다시 말해 전란(戰亂)과 질병(疾病) 기근(饑饉)이 없는 최고로 안전한 동네로 회자되는 것이다.
우복동은 다분히 풍수지리설이나 도참설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내용에 따라선 조선시대 금서였던 정감록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 곳에 들어오면 3재를 피할 수 있는데다 자손들이 복을 받고 부자도 되면서 벼슬이 재상에 오를 수도 있다는, 한마디로 예언이나 주술적 성격이 강하다..(뉴스에서 캡쳐)
아직 차량이 들어오지 않는 5개면 경계 지역으로 첩첩산중이면서 주로 척박한 땅에 담배와 감자, 고추, 옥수수 생산이 주 생산물이고 골짜기를 따라 조그마한 계단식 논 들이 있으며 가을엔 송이, 능이등 각종 버섯 채취로 생활하는 강원도 첩첩산골 하고도 같은 순수한 옛 화전민이 사는 산골이었다.
전화기는 산비탈 중간쯤에 있는 이장집에 있어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면 이장님이 방송으로 “000 전화 왔어요”라는 방송을 하면 비탈길을 헐떡이며 한참 뛰어 올라가서 받아야 했다.
두 분 선생님들은 주말을 이용하여 대구 가족들에게 갔고 나는 주말이라고 시내로 나간들 친구들이랑 술을 먹거나 당구장에서 시간을 보낼 것 같아 한 달에 한,두번 정도만 나가고 거의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10월 중순 토요일 오후에 선생님들이 일찍 나가시고 난 다음, 아이들에게 각자 아버지가 먹고 남긴 소주병을 하나씩 가지고 오라 하여 운동장에 전부 모았다.
6학년을 조장으로 조 편성을 하여 뱀이나 안전사고에 유의를 시키고 골짜기에 조금씩 붙어있는 논에 조별로 메뚜기를 잡어로 보냈는데 월동하기 위한 뱀들이 독이 올라 있을 것 같아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30분 정도 지난 뒤, 골짜기를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경적을 불어 전부 학교로 모았다.
그래도 상상외로 많이 잡았다.
그중에 2학년 남학생 영태는(어디서 뭘 할꼬?) 그야 말로 씩씩하게 많이 잡았다.
관사 방에 군불을 지피며 끓는 솥에 메뚜기를 넣어 삶은 후 햇볕에 말려 날개를 뗀 다음 모으니까 훌륭한 밑 반찬거리가 되어 다른 선생님들에게 나누워 주었다,
(지금 같으면 파면???)
그리고 나서는 분교장 선생님에게 혼이 많이 났다.
나중에 사고라도 나고 불상사가 생기면 학부형들에게 민원을 들을것 이라며 하지 말라고 해서 그 뒤로는 수업이 끝나면 혼자 잡았다.
메뚜기는 이슬이 마르기 전 오전에 잡아야 많이 잡을 수 있고 오후가 되면 메뚜기들 날개에 이슬이 말라 날라 다녀서 잡기 힘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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