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형사 된 사연 1

◆ 온 동네 떠나갈 듯 ◆
나는 경북 상주 시내의 중심지에 있는 적산 가옥에서 태어났다. 한 집에 세 가족이 살았는데, 나는 7남매 중 6번째 막내아들이었다.
※적산 가옥 : 일본식 기와가 얹힌 지붕이며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지은 건물
아버지는 경찰 형사 반장이셨다. 집안 산림이 넉넉지 않아 부모님이 방 앞 조그만 공터 가건물에 축사를 지어 돼지와 면양을 키웠다. 한 마디로 가난한 공무원 집안이었다.
7남매가 2살 터울로 태어나 자라다 보니 조그만 방 한 칸과 창고 같은 작은 방에서의 생활은 항상 북적댔다. 형제들 간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형, 누나들의 옷과 책을 물려받으며 성장했다.
위로 형 3명, 누나 2명이 있었지만 각자 할 일들이 있었다. 형과 누나들은 학교를 마치면 식당과 동네 잘사는 집들을 돌며 식당이나 주방에서 버리는 구정물(음식 찌꺼기)을 걷어왔다.
그 음식 찌꺼기를 축협에서 조합원에게 저렴하게 제공하는 밀기울과 쌀겨를 섞어 아침, 저녁으로 돼지 밥을 주었다. 1년에 한번 새끼를 낳으면 새끼 돼지들을 한, 두 달 키워 시장에 팔고 그 돈으로 학비를 마련했다. (당시는 공무원 자녀에게 등록금이 보조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새끼 돼지 판돈도 모자라 등록금을 낼 때가 되면 서로 먼저 학교에 내겠다고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형들이 조금 더 커서 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즈음엔 면양을 몇 마리 구입해서 키웠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뒷 냇가에 면양을 끌고 가 풀을 뜯어 먹게 했다. 낫으로 풀을 베어 가져와 건조 시켜 저장해 두었다가 겨울 내내 사료로 주기도 했다. 아침과 저녁으로 면양의 젖을 짜서 양유를 삶고, 소독을 하여 병에 담은 후 자전거에 싣고 집집마다 배달을 했다. 그렇게 애쓴 결과 7남매 모두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지금도 70세가 넘은 형들의 거친 손은 당시 풀을 베며 낫에 다친 상처가 남아있다.
7 남매 중에서도 여섯 번째인 나는 막내 아들인데다 아버지와 제일 많이 닮았다. 가난한 경찰 공무원의 집안이었지만 형과 누나들의 보살핌 속에 어려움이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족이 아침을 먹을 때면 조그마한 방에 둘러앉았다. 아버지와 나는 겸상을 하고 형 3명과 누나, 여동생이 한상에 같이, 그리고 어머니랑 큰 누나는 그냥 바닥에서 먹었다. 어쩌다 아버지 상에 계란찜이 올라오면 아버지는 절반 정도만 먹고 나머지는 나를 먹으라고 배려를 했다.
옆에서 밥을 먹고 있는 여동생이 “오빠야, 오빠야”며 나를 ‘쿡쿡’ 찔러 계란찜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내가 눈을 흘겼지만 동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 숟가락 정도만 드시고 “은희 먹어라”하면 동생이 활짝 웃으면서 그릇 채 가져가 계란찜을 먹었다.
◆ 기(氣)가 죽으면 되나? ◆
아버지는 막내아들인 나에게 무엇이든 넉넉하게 챙겨주셨다. 한번은 학교에서 건전지를 이용한 벨을 만든다며 준비물을 사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 사무실로 찾아가 준비물을 사 달라고 했더니 전기를 사용하는 벨 완제품을 사주셨다. 그걸 학교에 가져갔더니 선생님이 교과 과목에 있는 건전지를 이용하여 벨을 울리게 하는 원리를 가르쳐 줄려는 것인데 전기를 이용하는 벨을 사왔다며 혼이 났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선후배의 서열이 엄했다. 정문에서 부터 선배들이 복장을 체크하고 교육을 했다. 신발이 낡아 아버지에게 신발을 사 달라고 하니 경찰관들이 비상시 싣는 워카(목이 긴 경찰화)를 주시면서 신고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머슴아가 기가 죽어서 되나? 내가 책임질께 신고 다니거라.”
아버지는 형사 반장을 하시다가 중학교 정문에서 약 200여 미터 떨어진 북문 파출소 소장을 하고 계셨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을 하셨지만 위로는 또 11살, 9살, 5살 많은 형들이 있었기에 항상 든든했고 어디를 가든 겁이 없었다.
워카는 학교에서 잘나가는 선배들(요사이 일진)이 신는 신발이고 나같이 1학년들은 꿈도 못꾸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등교를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문에서 선배들에게 걸리고 말았다.
“야! 너 신발 그거 뭐냐? 너 이리와.”
큰소리가 나니 주변에 있는 선배들이 우러러 몰렸고 옆에 있던 지도 선생님도 오게 되었다.
“아버지가 신고 가라고 했어요.”
“아버지가 누군데?”
“요 앞 파출소 소장인데요.”
그러자 옆에 있던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어이. 봐라. 그냥 보내줘라”
나는 그때부터 1학년이 아니고 3학년 일진들 하고 같은 레벨에서 중학교 생활을 하게 되었고 어느 누구도 나를 건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어린 나의 기를 살려주셔서 아마 내가 보복을 두려워 하지 않고, 조폭들과 절도범들을 잡는 형사를 겁 없이 하게 된 것은 운명이고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6.25전쟁이 끝난 후 나라 살림이 어려워 부패가 만연한 시절이었다. 보수가 적은 경찰관들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고 하면 서민들에게 좋지 않은 일로 부 수입을 올리게 되어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경찰관들을 “똥파리”라고 부르기 시작 했다.
즉, 부패 경찰관들을 통 털어 부르는 말 이였다. 아버지가 그랬다면 좋은 집은 아닐지언정 잠자리라도 편한 단독 주택에 살았을 것이다. 집에서 돼지나 면양을 키워 학비에 보태는 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는 조금 무능하였던 아버지라고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우리 아버지는 진정한 공무원이었고 애국자였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어느 누구라도 우리 아버지를 빗대어 “똥파리”라고 하면 울면서 “니가 우리 아버지 돈 먹는 것 봤나?”며 나는 사생결단을 내고 마는 성격이 되었다.
아버지는 퇴직 후 100일 째 되는 날 취침 중 갑자기 돌아가셔서 임종을 못 지켰다. 당신은 평소 “내가 돈은 못 벌었어도 자식 키워 놓은 것이 돈 벌어 놓은 것”이라 하셨다.
7남매를 키우신다고 늘 아꼈다. 담뱃값이 아까워 한 개비를 2-3번에 나누워 피우셨고, 변변한 양복 한 벌 없이 지냈다. 신발은 사복 근무 인데도 불구하고 항상 경찰관 지급 구두에 정복 바지를 입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아버지의 충심을 알기에 국립묘지에는 못 모셨지만 아버지 영구(靈柩)위에 친구들이 사 가지고 온 대형 태극기를 덮어 아버지가 태어나신 고향 집 뒷산에 형제 5분과 같이 정중히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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