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화자(話者) 님의 서재입니다.

무사, 기사 되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대체역사

완결

화자(話者)
작품등록일 :
2018.04.09 10:01
최근연재일 :
2018.10.11 15:10
연재수 :
210 회
조회수 :
1,086,242
추천수 :
23,051
글자수 :
904,559

작성
18.08.26 21:50
조회
2,748
추천
75
글자
9쪽

< #15. 아크레 3-2 >

DUMMY

진 한가운데의 가장 큰 천막. 보나 마나 그곳이 자기가 있을 곳이라는 생각에 필리프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이곳저곳으로 부리나케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은 밤하늘. 별은 반짝이고 있었고, 멀리서 피어오른 연기가 하늘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켠 필리프는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와인을 들이키던 레오폴트 공작은 들어서는 필리프를 보며 당황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우물쭈물하던 레오폴트는 일어나 필리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기 싫다는 표정으로 뻗대보았지만, 필리프의 눈빛은 공허했다. 그의 안중에는 레오폴트 따위는 없었다.


“먼 걸음에 고생하셨습니다. 필리프 2세 전하.”


마지못해 고개를 숙인 레오폴트는 자신을 지나쳐 조금 전까지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풀썩 앉는 필리프를 보았다.


“오랜만이에요. 아주 많이 오랜만이군. 아마 내가 왕에 오르기 전에 한번 봤던 것 같은데······.”


필리프는 잔을 들어 레오폴트에게 내밀었다. 술병을 들어 따르는 레오폴트는 무시당하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오기를 부리고 싶었는지 몰랐다. 술이 잔을 넘쳐버렸다.


하지만 필리프는 성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다.


“다행이군. 내 생각과는 달리 그래도 의기는 있는 사람이었구려.”


“무슨 말씀인지. 실수였습니다.”


“아니요. 고귀한 피를 받았다는 자 중에 능력 없는 자들을 많이 봤소. 그냥 한마디 말에 휘둘리는 사람들. 아니면 잘 보이려 아부만 떠는 이들. 그런 사람들은 나중에 도움을 주거나 받기에는 아쉬운 자들이더군요.”


“......”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이다. 레오폴트는 필리프의 말장난에 놀아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주변에서 환호성이 들리는 게 이제는 적의 습격이 마무리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그냥 이렇게 둘이 얘기를 나누는 게 어색하고 기분 나빴다.


“레오폴트 경, 여기는 어떻소? 이 성지는 어떠하오?”


“저도 온 지 몇 달 되지 않았습니다. 오자마자 거의 이곳 아크레에 처박혀 매일 사투를 벌였으니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별로 기분 좋은 곳은 아니죠.”


레오폴트의 뚱한 대꾸에 필리프는 환하게 웃었다. 한동안 킥킥거리며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맞소. 레오폴트. 여기는 시궁창이지. 시궁창이야. 유럽의 왕이나 귀족들이 이 시궁창에 빠져 허우적대지. 교황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들어가라고 하면 군소리 없이 들어가는 시궁창 말이네.”


“....그....... 그건 위험한 말씀입니다.”


“솔직해지세. 난 어쩔 수 없이 시궁창에 빠진다면 말이야.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온몸에 진흙 범벅이 되더라도 말이야. 그 대가로 친구를 사귀게 된다면 말이야. 그래도 빠져볼 만도 한 것이지.”


아리송한 말이다. 하지만 확실하다. 프리드리히 사후에 하인리히 6세가 등극했다. 그와 다리를 놓자는 얘기겠지. 그러면 레오폴트 자기도 친구로 인정하겠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저도 이 시궁창에서 좋은 일 하나는 거두고 갈 수 있겠군요.”


그제야 필리프는 레오폴트에게 잔을 내밀고 손수 와인을 따라줬다. 레오폴트와는 달리 넘치지 않게 말이다.


“난 말이 통하는 사람이 좋소이다. 당신은 내 뜻을 알아챘으니 내가 좋아하리다.”


“누군가를 싫어하는군요.”


와인을 들이키던 필리프는 웃었다. 속내를 들켰다는 표정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오스트리아 공.”


“적이 있으면 친구를 만들고 싶어 하지요. 대신 싸워주거나 싸울 때 어깨를 빌려줄 그런 친구를 말입니다. 헨리 다음에는 역시?”


“그거야말로 위험한 말입니다. 지금은 동맹입니다. 아주 끈끈한 동맹.”


레오폴트는 웃었다. 역시나 필리프는 자신의 왕국을 갈라놓은 헨리를 못 견뎌 그 애들을 부추겼었다. 언제나 헨리의 군대에 밀리기만 하던 그가, 내분이 일어난 영국 사정 때문에 한숨을 돌렸다. 이제는? 리처드가 왕이니. 결국 동생과 내분을 일으킬 것인가?


“사자는 잡기 힘듭니다.”


“그러니, 친구가 필요하지요.”


둘은 웃었다. 서로 잔을 마주쳤다. 이제야 레오폴트도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며 즐거워했다. 이런 모략이야말로 귀족들의 유희가 아닌가? 나한테 피해만 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재미있기 그지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면 놀아주리다.



***



결국 몰려든 병사들이 치고 들어온 타와시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살라흐앗딘의 군이 밀어붙이다가 힘에 부치는지 뒤로 병력을 빼며 크게 나팔을 불었다.


타와시들이 고개를 돌리고 물러나는 본대를 바라봤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곧 눈이 날카로워지더니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모두 그만 싸워라. 길을 터!”


류는 고함을 지르며 열을 올리며 싸우는 수하들을 말렸다. 기세의 싸움이기는 하지만 이럴 때는 크게 이빨에 물리는 경우가 많다. 길을 터서 보내주는 게 나을 것이다.


그동안 여러 번의 경험으로 레반트 기사단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상륙하는 프랑스 군대들은 몇 명씩 모이자마자 어떻게든 공격에 나서려 달려들었다. 뒤이은 아벤 백작의 기병들과 합세해 분풀이하려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타와시들은 다시 모여들어 아벤 백작의 기병들을 도륙하더니 다시 달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수준이 많이 올라왔구나. 이제는 맞닥뜨리기 쉬운 상대는 아니야.’


류와 비슷한 생각에 레반트 기사들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중 몇은 류가 지나온 길에 널브러져 죽어가는 타와시들의 시체를 보며 다른 의미로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어이, 오늘은 몇이야?”


어느새 말을 몰아 다가온 건 알폰소였다.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몸을 보니 이리저리 견제만 했는지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일곱. 예전보다 힘들다.”


“그렇군. 난 넷인데······. 오늘은 나름 열심히 싸웠는데. 너한테는 영 안 되는구나.”


알폰소의 말에 류는 놀라서 다시 한번 살펴봤다. 알폰소는 자신의 몸만이 아니라, 몰고 있는 말에게조차 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허허···. 내가 더 놀라운데. 아니, 반성해야 할 거 같아. 난 이렇게 피를 뒤집어쓰고 숨을 헐떡이는데 말이야.”


역시 알폰소는 대단한 녀석이다. 류는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아마 앞뒤 돌아보지 않고 덤벼들면 쉽지 않을 것이다.


“에이, 그건 류. 자네가 몰라서 그래. 남자는 말이야. 전력을 다할 때는 전쟁터가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노력할 때가 그때지.”


하지만 이 사내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 사내는 아니었다. 그게 유일한 약점이겠지.


“......”


“감동했는가? 자네의 우둔한 머리를 내가 일깨워줘서 말이야?”


“아니, 가끔 교대로 티레에 가서 쉬고 돌아오곤 했잖아. 한번에 많은 수는 아니지만 말이야. 나도 두 번은 다녀왔고. 그런데 왜······. 우리 사랑꾼은 한 번도 가지 않았을까?”


류가 정곡을 찌르자 알폰소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사실, 일렌느와 같은 고귀한 여성에게 나는 부족한 사람이네. 좀 더 훌륭한 사람이 돼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이번에 왔지. 그러니 쉽사리 돌아갈 수는 없어.”


궤변이다. 예전에 티레에서 마주칠 때 보았던 알폰소의 표정은 언제나 하얗게 질려있었다. 이리저리 일렌느에게 이끌려 잔뜩 피곤한 표정으로 말이다. 이곳에 와서야 류는 알폰소가 웃는 걸 보고는 했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었는지······.


“솔직히 얘기해. 그렇게 힘들어?”


류의 말에 한참을 빤히 쳐다보며 머뭇거리던 알폰소가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류. 레이디 연이는 한 떨기 예쁜 꽃 같아. 고상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지. 그래······. 자네의 결혼준비는 축하할만한 일인데 말이야.”


“그런데?”


“너무 이르지 않나? 좀 천천히 하라고. 세상 좀 더 즐기고 말이야. 자네 제대로 놀아봤어? 아. 이제는 진짜 놀 만큼 놀았다. 여자도 술도 도박도 모두 지겹다. 그렇게 생각될 때쯤이 결혼할 때란 말이야.”


알폰소의 말은 사뭇 진지했고, 광기가 흐르는 눈빛을 보면 속에 있는 얘기를 절절하게 쏟아내는 게 맞았다.


“힘내.”


류가 어깨를 두들겨줬다. 알폰소가 흠칫거리더니 울먹거렸다. 그러더니 겨우 울음을 참고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넌 하지 마.”


작가의말

주말의 마지막 날. 

제 글을 보시면 한 주 시작을 준비하세요!

오늘도 재미있으셨으면 좋겠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무사, 기사 되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84 < #15. 아크레 10-2 > +18 18.09.09 2,474 72 10쪽
183 < #15. 아크레 10-1 > +14 18.09.09 2,429 76 11쪽
182 < #15. 아크레 9 > +22 18.09.07 2,339 71 11쪽
181 < #15. 아크레 8-2 > +14 18.09.06 2,367 72 10쪽
180 < #15. 아크레 8-1 > +21 18.09.04 2,503 76 8쪽
179 < #15. 아크레 7-2 > +8 18.09.03 2,396 79 9쪽
178 < #15. 아크레 7-1 > +8 18.09.02 2,468 73 10쪽
177 < #15. 아크레 6-2 > +6 18.09.01 2,489 71 10쪽
176 < #15. 아크레 6-1 > +10 18.09.01 2,486 64 9쪽
175 < #15. 아크레 5-2 > +9 18.08.31 2,515 67 9쪽
174 < #15. 아크레 5-1 > +16 18.08.30 2,671 74 9쪽
173 < #15. 아크레 4-2 > +14 18.08.28 2,676 77 10쪽
172 < #15. 아크레 4-1 > +13 18.08.27 2,578 73 9쪽
» < #15. 아크레 3-2 > +22 18.08.26 2,749 75 9쪽
170 < #15. 아크레 3-1 > +12 18.08.25 2,694 70 8쪽
169 < #15. 아크레 2-2 > +21 18.08.24 2,659 74 10쪽
168 < #15. 아크레 2-1 > +14 18.08.23 2,699 72 10쪽
167 < #15. 아크레 1-2 > +10 18.08.21 2,742 77 9쪽
166 < #15. 아크레 1-1 > +11 18.08.20 2,836 70 8쪽
165 < #14. 티레 4-2 > +9 18.08.19 2,854 69 9쪽
164 < #14. 티레 4-1 > +18 18.08.19 2,712 82 9쪽
163 < #14. 티레 3-2 > +10 18.08.18 2,790 77 9쪽
162 < #14. 티레 3-1 > +16 18.08.17 2,790 81 10쪽
161 < #14. 티레 2-2 > +12 18.08.16 2,831 83 10쪽
160 < #14. 티레 2-1 > +9 18.08.14 2,910 80 10쪽
159 < #14. 티레 1-2 > +20 18.08.13 3,086 83 9쪽
158 < #14. 티레 1-1 > +27 18.08.12 3,006 86 9쪽
157 < #13. 낙성(落城) 8 > +18 18.08.11 2,871 83 12쪽
156 < #13. 낙성(落城) 7-2 > +12 18.08.10 2,788 81 9쪽
155 < #13. 낙성(落城) 7-1 > +18 18.08.09 2,854 79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