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만한 도구 1
박형돈 무리는 이전 회식 때마다, 시끄럽게 떠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술을 권하고, 항상 2차를 외쳤다.
그런 박형돈 무리가 회식 시작한 지 1시간도 안 돼서 자리를 떴다. 그것도 허윤 파트장에게 깍듯하게 인사까지 하고 말이다.
그 모습을 보고, 살짝 취기가 오른 이윤아가 오준성 파트장에게 물었다.
"파트장님."
"네?"
"저쪽 파트 분위기 왜 저래요? 항상 2차 3차 외치던 박형돈 님이 벌써 집엘 다 가시고?"
오준성은 절친 허윤으로부터 오늘 사건을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받았기 때문에, 오늘 일어난 사건을 모두 알고 있었다. 오준성 파트장도 평소 박형돈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소식이 반가웠다.
그는 손짓하며 기획파트 사람들을 모았다.
"저기... 비밀인데... 오늘 말이에요. 진수 님이 형돈한테 한방 먹였데요."
"네??? 어떻게요?"
오준성은 신이 나서 오늘 있었던 일을 자기 파트 사람들에게 설명해 줬다.
김대우가 놀라며 말했다.
"헐! 그 박형돈 님이 만든 UI 매니저를 클라 1 파트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지워버렸다고요?"
"네. 그렇다니까요."
이윤아도 깜짝 놀랐다.
"근데, 그걸 다 지우면 우리 UI는 작동 안 하는 거 아니에요?"
"아뇨. 글쌔... 형돈 님이 만든 코드 550줄을 싹 다 지우고, 진수 님이 코드 2줄 딱 넣었는데... 기존 버그도 없어지고 동작도 다 잘 된데요."
"헐 대박! 그게 가능해요???"
"캬하하 그래서 오늘 형돈 님 기가 죽어 있었구나! 어쩐지 오늘은 왜 사람들 안 괴롭히나 했네!"
기획 2 파트 사람들 모두 통쾌해했다. 그중 가장 좋아, 한 사람은 이진수보다 한 살 많은 이윤아였다. 올해 32살로 대리급 경력이고, 여자임에도 터프한 성격 덕분에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잘 지내는 편이다.
그녀는 이진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봐요. 진수 님. 나 이윤아예요. 반가워요. 31살이죠? 난 32살!"
"네. 안녕하세요."
이윤아는 원래 성격에 더해 취기까지, 올라와 말에 거침이 없었다.
"자 한잔해요. 박형돈 그 자식 안 그래도 내가 벼르고 있었다고!"
이진수는 이윤아와 건배 하고, 안주로 콘버터를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이윤아는 이진수에게 회를 권했다.
"아니 왜 횟집에 와서 그런 걸 먹어요? 회를 먹어요. 회! 횟집에 왔으면 회를 먹어야지. 여기 참돔이랑 광어 다 있잖아요."
"전 회를 별로 안 좋아해요."
"어머?! 그런데 왜 회식을 횟집으로 잡았어요? 아... 또 박형돈이 자기 멋대로 회식 장소 잡았죠?"
"..."
"에이 뭐~ 다음 회식 또 같이하면 되죠. 뭐 좋아하세요? 고기는 좋아해요?"
"네."
"그럼 다음 회식 또 클라 1파트랑 같이 해요. 그땐 고기로! 고고! 홍홍홍."
이진수가 기획파트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받는 동안, 고주영은 계속 이진수 옆에 붙어서 이진수가 하는 말들을 듣고 있었다.
허윤이 고주영에게 말했다.
"아니 주영 님."
"네?"
"오늘 진수 님한테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맞아요."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러고 있어요?"
이진수는 고주영을 쳐다봤다. 그리고 술을 권했다.
"아. 그러고 보니 주영 님이랑 따로 얘기해 본 적이 없네요. 한잔하세요."
"저는 술 못 마셔요."
"아하~ 그럼, 짠만 하세요."
이진수는 고주영과 술잔을 부딪쳤다. 이진수는 술을 마셨고, 고주영은 짠만하고 술잔을 다시 내려뒀다.
"저기... 진수 님."
"네?"
"뭐 좀 물어보고 싶은데요."
"네 물어보세요."
"진수 님 여기가 첫 회사인 거죠?"
"네."
이진수가 고졸에 별다른 스펙이 없다는 것은 고주영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코딩은 어디서 배우셨어요?"
"옆집요."
"옆집요? 옆집에서 누구한테 배운 거예요?"
이진수는 혼자 소주를 따라 마시며 대답했다.
"옆집 아저씨요."
고주영은 이진수가 진심으로 대답하는지, 장난을 치는 것인지 헷갈렸다. 이진수는 고주영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진짜 옆집 아저씨한테 배웠어요.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아무도 안 믿긴 하더라고요."
"네... 그럼 다른 거 하나 더 물어볼게요."
"네."
"진수 님은 남들 다 갖고 있는 기본적인 스펙도 하나 없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요? 애초에 프로그래밍 전공도, 스펙도 없이 우리 회사 지원한 것도 신기해요."
돌려 말하는 것을 잘 못하는 고주영. 해석하기에 따라 이진수가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이진수는 남의 말에 딱히 의미를 두는 편이 아니었다.
"내가 자신감이 있던가?"
"네. 엄청요. UI 매니저 저한테도 똑같은 문제를 냈었어요. 형돈 님이요. 그런데 이거 잘 못 받았다가 못 풀면, 평생 기죽어 살아야 하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포기했거든요. 그 결과로 기죽어 사는 건 마찬가지지만..."
"아하... 그런 의미라면 대답할 수 있죠."
고주영은 이진수에게 집중했다.
"저는 자신감이 넘치지 않아요. 시골 옆집 아저씨보다도 코딩을 못하는데요 뭐. 허허허... 대신 저는 어차피 잃을 것도 없으니까.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요."
이진수는 고주영을 한번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주영 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스펙도 없고 인맥도 없고 아무것도 없잖아요."
"...저는 제가 잃을 걸 너무 무서워했나 봐요. 겁먹고 포기해도 똑같이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고주영은 이진수에게 미주알고주알 자기 과거 얘기를 했다. 고주영은 전국 탑 3안에 드는 대학에서 소프트웨어 전공을 했고, 과탑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는 4학년 2학기 때, 우리나라 최고의 게임 회사인 3N 게임즈의 인턴 과정을 훌륭한 성적으로 수료했다. 그 덕에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정직원이 된 케이스였다.
프로젝트 내 에이스 후보인 데다, 아첨도 못 하는 고주영을 박형돈이 곱게 봤을 리가 없다.
"저도 처음에는 엄청 적극적이었어요. 그런데, 뭐만 하면 계속 비교당하고 저만 보면 기죽이고 하니까. 최근에 많이 힘들었어요."
이진수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이해합니다. 앞으로 잘하면 되죠."
고주영은 굳은 결심을 한 듯. 마시지 않고 받아만 두었던 소주를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소리쳤다.
"저를 부사수로 받아 주십시오!"
뜬금없는 고주영의 고백에 주변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오~ 멋지다~ 이진수~"
"용감하다~ 고주영!"
"하하하. 진수 님이 고백 받아줘야겠네~"
이진수가 대답했다.
"제가요? 주영 님이 저보다 경력이 반년 정도 더 많잖아요?"
"경력이 중요한가요! 실력이 중요하죠!"
"네. 알겠습니다."
의외의 시원한 승낙. 이진수는 예상치 않게 자기보다 반년이나 경력이 많은 부사수가 생겼다.
그리고 이날을 기점으로, 박형돈 무리는 조용해졌다.
다음 주 월요일 사무실. 파트 주간 회의 날.
허윤 파트장이 말했다.
"진수 님... 저희 파트에 온 지 이 주 정도 됐네요. 회사 입사는 이제 두 달 정도 됐죠?"
"아니요. 이제 7주 차예요."
허윤 파트장은 박형돈 무리의 눈치를 살폈다. 박형돈 무리는 여전히 기가 죽은 체 말없이 있었다.
"아~ 그렇군요. 아무튼 그래서 이제 진수 님한테도 슬슬 담당 업무를 하나 드리면 어떨까 싶네요."
허윤 파트장의 말에 이진수는 두 명이 떠올랐다.
첫 번째는, 어떤 의미로든 힘이 없어 박형돈에게 놀림을 받던 유민희다. 이진수는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싫어했다.
여기서 힘이란 그저 육체적인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일을 할 때는, 지식과 경험이 곧 힘이다. 그런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어리고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은 유민희는 박형돈에 비해 약자인 셈이다.
둘째는, 이진수가 장동건설에서 일할 때. 잘 따르던 근육맨 실장님이다. 그 사람은 근육이 너무 많아서 근육맨 실장이라고 불렸다. 근육맨 실장은 매일 아침 자기와 자기 팀 사람들이 쓸, 삽이나 전동 드라이버 따위의 장비들을 고치고, 관리했다. 그리고 도구 관리를 넘어, 자기 팀원들의 사정에 맞춰 개인 맞춤형 도구까지 직접 만들어 줬다.
그 모습을 봐오던 이진수는 어느 날인가 장공건설 근육맨 실장님에게 물었다.
"실장님은 왜 그렇게 도구를 관리해요? 그거 닦고 기름칠할 시간에 일을 더 하는 게 낫지 않아요?"
"에헤이~ 모르는 소리!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던 시대는 갔어. 그리고 그 시대 때도 이가 있으면 당연히 잇몸보다 이가 낫지 않냐? 이 미니 쟈키를 봐바. 이게 없었다면 김 아주머니가 혼자 저 벽돌을 위로 올릴 수 있었겠냐? 딱 맞는 도구는 그 사람에게 힘이 돼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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