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
- 그러니까 일부러 논란을 키웠다는 거지?
- 그럼. SNS에 네 소식 올린 사람이 그 회사 고객이래.
- 사람들이 놀랐잖아. 엘도 그렇고 구단이랑 선수들도 나한테 얼마나 전화했는데.
- 엘에겐 내가 설명했고, 구단 직원한테도 전화해서 아니라고 했어.
도라익이 VIP 룸에 전화기를 두고 나오는 바람에 오해가 커졌다. 거기에 뮐러의 회사가 수작을 부려 관종 피아니스트한테 슬쩍 소식을 흘렸고, 오창범의 동족이 덥석 물어 SNS에 올려 논란을 키웠다.
그 바람에 도라익에게 관심이 없거나 아예 모르던 사람들도 SNS를 통해 알게 되었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도라익을 검색했다.
어느 정도 화제가 되자 회사는 바로 사실관계를 정확히 밝힌 보도문을 냈다.
때마침 도라익이 구속 겨루기 이벤트에 나가 153km 시속의 공을 던진 바람에 더욱 화제가 되었다. 거기에 팀 동료를 구하다가 선수 생명을 잃고도 17년 반이나 묵묵히 선수 생활을 이어온 도민준의 이야기도 기사가 되었고, 드림즈도 덩달아 인지도가 상승했다.
심지어 한국의 야구 전문 프로그램에서 도라익과 도민준의 투구폼을 비교해 얼마나 일치하는지 분석하여 유전자의 위대함을 역설했다.
- 광고료를 최소 30% 더 받을 수 있대. 너 진짜 복덩이야. 타고난 또라이는 하늘이 보살피는 거 같아.
- 그 사람을 알고 싶으면 곁에 친구를 보라. 뮐러가 하는 짓만 봐도 형이 얼마나 또라인지 알 거 같아.
확실히 최경호가 보기에도 이번 일은 좀 심했다. 명분에서 진 최경호는 황급히 화제를 바꿨다.
- 그런데 너 오른손잡이인 거 고백했더라? 그것 때문에 여기 지금 난리야.
- 오후에 뇌 사진 찍었는데 점이 사라졌어. 아무래도 왼발 선수인 척하느라 스트레스받았던 거 같아.
오른발이 주발임을 고백하고 나서 머리의 점이 사라졌다. 경기 내내 의도적으로 왼발을 더 많이 사용하느라 받았던 스트레스가 고백과 함께 말끔하게 사라진 것이다.
- 형, 그거 알아? 양발 선수가 왼발 선수보다 더 귀하게 대접받는대.
- 결과적으로 양발 선수가 됐으니 우리가 잘한 거잖아.
- 알고 한 게 아니라 모르고 한 거잖아. 형 공부 좀 해.
- 미안, 안 그래도 반성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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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 실전 테스트 전날.
최경호와 도라익은 뮐러가 보낸 파일을 읽으며 공부했다.
"라익아, 왼발 선수가 오른발 선수보다 평균 주급이 15% 정도 높대."
"저 왼발 별론데요."
"한 번 해봐."
밖에 나간 최경호는 차 트렁크에서 축구공 하나 꺼내 도라익에게 던져줬다. 도라익이 왼발로 공을 어설프게 다뤘다.
"점점 잘하네?"
"오른발로 했던 감각을 떠올리니까 쉬워요."
"그럼 내일 왼발만 쓰는 거다. 그래야 돈 많이 받고 계약 가능성도 커져."
런던 커피숍. 윌슨과 계약 관련하여 협상할 때.
"궁금한 거 하나 묻죠. 왜 다른 구단은 다 거부하는데 스토크시티만 출전 보장을 받아들이는 겁니까?"
"왼발이니깐요. 왼발 선수는 오른쪽에서도 대부분 잘하지만, 오른발 선수 대부분은 왼쪽에서 잘 못 합니다. 잘 키우면 구단의 미래 10년을 책임질 선수가 될지도 모르죠."
"그럼 다른 구단은 왜 거부하는 건가요?"
"스토크시티는 공격수가 급히 필요하니까요. 다른 구단은 여력이 있으니 모험하기 싫은 겁니다. 그리고 도라익 선수가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팀 단합이 깨질 거고요. 계약 때문에 아무리 엉망으로 뛰어도 주전으로 계속 출전시켜야 해요. 스토크시티는 그런 면에서 걱정 없습니다. 훌륭한 주장들이 팀을 제대로 이끌고 있거든요."
유로파리그 결승전 이후.
"라익아, 다행이야. 네가 안 잊고 왼발로 득점한 덕분에 기사엔 미라클 얘기밖에 없어. 용케 봉인 안 풀었구나."
"형, 그냥 다 얘기하자. 이젠 왼발도 편하긴 한데 마음이 좀 그래."
"라익아. 만 18세가 되면 넌 주급 제한이 사라져. 구단에서 네게 높은 바이아웃을 설정하려면 주급을 많이 줘야 하거든. 오른발이 주급 20만 파운드 받는다면 왼발은 15% 더해서 23만 파운드 받아. 그러니 1년만 꾹 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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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점이 사라진 도라익은 다시 예전처럼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훈련에 쏟았다.
"오빠 달려!"
넷째 라진과 다섯째 라희를 타이어에 앉히고 경사가 15도 정도 되는 오르막길을 올랐다. 2년 사이에 라진과 라희의 몸무게가 많이 올라 채 반도 못 갔는데 다리에 힘이 빠졌다.
"라진이 내려."
"싫어."
"그럼 라희라도 내려."
"라희는 걷기 싫은데."
보다 못한 라현이 라진의 귀를 잡아 타이어에서 끌어 내렸다. 오전에 드리블 훈련을 도운 대가로 도라익이 공 50개 던져주기로 했는데 라진이 때문에 자꾸 늦어졌다.
라희만 태운 타이어가 다시 출발했다.
"형, 형 때문에 우리 감독님이 자꾸 나보고 투수하래."
"너 구속 얼만데?"
"135밖에 안 나와."
"그럼 그냥 타자해. 아버지는 중3 때 최고 145까지 던지셨대."
"형도 이제 고1인데 벌써 153 던지잖아."
"난 지난여름에 코어 운동을 죽고 싶을 정도로 했어. 덕분에 구속이 잘 나온 거야. 근데 넌 키가 더 클 거니까 절대 코어 운동하면 안 돼."
뜨겁게 불어오는 바람이 도라익의 땀을 천천히 식혔다. 피로가 어느 정도 풀린 도라익은 약속대로 공을 던져 라현의 타격 훈련을 도왔다.
도라익이 힘을 적당히 빼고 던졌다지만, 중3이 치기엔 빠른 공들이다. 그러나 열 개 이후부터 라현의 방망이는 곧잘 때렸고 가끔 홈런도 나왔다.
"라진이 출동!"
말썽꾸러기 라진이가 부지런히 뛰면서 라현이 친 공을 주웠다. 주말마다 훈련을 도우면 격투기 글러브를 사준다고 약속한 후 엄청 성실한 모습을 보였다.
"형, 나 무거운 배트 몇 개 사주면 안 될까? 지금 건 너무 가벼워."
"시합에서 못 쓰잖아."
"미리 프로의 감각을 익혀두면 좋지."
"아버지한테 얘기하지."
"얘기했는데 혼났어. 형은 운이 좋은 거라면서, 난 차분하게 단계를 밟으래."
도라익은 스페인에서 친해진 형한테 전화해 어디 배트가 좋은지 질문하고 인터넷으로 해당 브랜드를 구매했다.
"나도 프리미어리그 뛰다가 대표팀 뛰니까 느끼는 게 많았어. 단계를 착실하게 밟는 게 나쁜 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사준 배트는 가끔만 휘두르고. 그리고 홈런에 집착하지 마. 득점하는 선수보다 경기를 이끄는 선수가 되어야 해."
"형, 공 다 주웠어."
눈썰미가 뛰어난 라진은 멀리 간 공까지 찾아서 전부 상자에 담았다.
"그럼 내려가자. 라현이는 라진이 업고 난 라희 업을게."
라익은 라희를 업고 타이어까지 끌면서 집에 돌아갔다. 라현은 자꾸 등에서 장난치는 라진이 때문에 가는 내내 투덕거렸다.
즐겁게 웃으며 도착한 집에는 이미 상다리 부러지도록 풍성한 밥상이 차려졌다. 돌이 갓 지난 라유가 몇 없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누나와 형들을 반겼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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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광고 두 개를 찍은 도라익은 6월 18일에 영국으로 출발했다. 유럽에서도 찍을 광고가 3개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엘과 만나 얼굴을 맞대고 그간의 회포를 푼 다음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광고 세 개를 몰아서 찍은 후 최경호의 벤틀리를 타고 영국으로 넘어갔다.
집에는 아랍인 피부가 된 오창범과 몇몇 선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도우. 너 오른발이라면서? 진짜야?"
"응."
"와우, 전혀 몰랐는데. 근데 왜 숨겼어?"
"내가 오른발이라고 말하면 너희가 오른발에 패스할 거잖아. 그러면 왼발이 단련되지 않을 거거든. 그래서 비밀로 한 거야."
오는 길에 최경호와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어렵게 꾸민 핑곗거리다.
"그래서 오른발 훈련하라고 충고해도 못 들은 척했구나."
감독도 코치도 함께 뛰는 선수들도 도라익에게 오른발 훈련을 시작하라고 권고했다. 도라익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경기와 훈련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의도적으로 왼손과 왼발을 사용하다 보니 스트레스가 되었고, 사정을 모르는 주변인들이 자꾸 오른발도 쓰라고 해서 스트레스가 겹쳤다.
도라익의 뇌에 보이는 점의 비밀이었다. 축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건 맞는데, 진짜 이유는 의도적으로 오른발 사용을 자제한 탓이었다.
"하긴. 도우의 오른발 페이크 슛에 다들 껌뻑 속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간 도라익의 페이크 슛은 거의 전부 오른발로 했다. 도라익이 왼발이라고 자료에 적혀있지만, 너무 훌륭한 슈팅 폼에 키퍼와 수비수들이 안 넘어갈 수 없었다.
"이러면 우리 챔피언스리그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도우가 오른발까지 함께 쓰면 누가 막겠어?"
"너무 속단하지 마. 일단 한두 경기 뛰면 느낌이 오겠지."
도라익이 흥분한 선수들을 차분하게 말렸다. 그간 챔피언스리그를 공부하며 대단한 팀들이 패배하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신물 나게 봤다. 스토크시티의 전력으론 토너먼트 진출조차 어렵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전부 약한 팀이 걸리는 건 불가능하니까 강한 팀 하나에 약한 팀 둘이 걸려서 2위로 진출하길 바라야지.'
"너 오늘 쉴 거지?"
"아니. 나도 에드워즈한테 수비 좀 배우려고. 뭐든 배워둬서 나쁜 건 없잖아."
열정 소년 도라익의 합류에 훈련 열기가 한층 뜨거워졌다. 그리고 리저브와 유스 선수들도 도라익과 함께 뛰어보려고 훈련에 나왔다.
이적시장이 열리는 7월 1일까지 일주일이나 남아 누가 떠나고 누가 남을지 아직 모름에도 스토크시티 선수들은 커다란 갈망을 품고 훈련에 매진했다.
- 작가의말
이제야 밝혀지는 진상. 진상은 바로 도라익과 최경호.
도라익 : 라현아, 내가 주인공 해 봐서 아는데, 중3이 고작 135 던지는 거론 주인공 못 해. 게다가 투수는 5경기에 한 번 등장하잖아. 흐름이 주인공 따라가니까 네 출전이 그냥 한두 줄 서술로 끝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예 언급조차 없을 수 있어. 그러니까 그냥 타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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