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인?
2032년 5월 19일, 이탈리아 밀라노.
산 시로 스타디움과 주세페 메아차 스타디움이라는 두 이름으로 불리는 구장.
빨간 줄과 까만 줄의 AC밀란과 까만 줄과 파란 줄의 인터밀란이 홈으로 사용하는 경기장에서 빨간 줄과 하얀 줄 유니폼의 두 팀이 만났다. 운 나쁘게 원정팀을 뽑은 스토크시티는 깜장 일색의 원정 유니폼을 입고 경기해야 했다.
스토크시티 팬들 사이에 앉은 최경호는 오전에 전화로 나눈 대화를 회상했다.
- 형, 나 그만 봉인 풀까?
- 안돼. 18살 전엔 풀면 안 돼.
- 하지만 꼭 우승하고 싶은데.
- 경기 진행 보면서 결정하자.
모든 스토크시티 서포터즈가 그렇겠지만, 최경호는 유난히 간절했다.
'스토크시티가 아무런 장애도 없이 시작하자마자 골을 술술 넣으며 우승컵을 차지하기를.'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강철민입니다.
- 박만호입니다.
- 오늘 경기에 변수가 조금 있죠?
- 맥자넷 선수와 루이스 선수가 작은 부상으로 벤치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 루이스 선수의 대체자로 쇠렌센 선수가 선발로 출전했습니다.
- 시즌 초기에 헌신적인 플레이로 팀에 큰 공헌을 했지만, 리그가 진행되면서 점차 벤치로 밀려난 선수죠. 스토크시티 감독진은 심사숙고를 거쳐 토미 대신 쇠렌센을 선택했습니다.
- 맥자넷 선수 대신 출전한 스티븐 워드는 지난 3년 왼쪽 풀백 주전을 지켜온 선수입니다. 수비는 톰 에드워즈보다 못하고 공격 가담은 조금 낫지만, 마찬가지로 크로스 정확도가 부족한 선수입니다.
- 프로 선수인데 훈련 열심히 하면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의문을 품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강 해설 의견이 궁금합니다.
- 부모님들도 자식이 공부 열심히 하면 다 하늘을 날 거라고 믿죠. 살다 보면 노력해서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단 실패하더라도 노력하는 게 좋습니다. 뭐든 열심히 하면 결과에 상관없이 뿌듯하거든요.
- 중앙수비수는 레체르트와 리엄 그리고 대니입니다.
- 골키퍼는 당연히 톰 미켈이고요.
- 남은 두 미드필더는 산체스와 제임스가 출전합니다.
- 제임스 선수 시즌 막바지에 좋지 않은 모습을 잠깐 보였죠? 그래도 감독진의 신임이 두터워 선발로 점지받았습니다.
- 공격진에는 당연하게도 찰리 아담과 도라익 선수가 출전합니다.
- 오창범 선수는 벤치에서 시작하죠? 그간 프리미어리그에서 괜찮은 모습도 부족한 모습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나아지고 적응하는 모습이어서 다음 시즌이 기대됩니다.
- 톰 에드워즈 선수가 은퇴하고 스카우트가 된다고 합니다. 팀이 새 윙백을 영입할지도 모르니 오창범 선수 열심히 해서 주전 자리 꼭 지켰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중계 카메라가 도라익의 얼굴을 비췄다. 맑은 햇살처럼 구김 하나 없이 활짝 핀 얼굴에 두 해설이 감탄했다.
- 도라익 선수 자신감이 화면을 뚫고 여기까지 전달됩니다.
- 진다는 생각이 아예 뇌리에 없는 것 같습니다.
- 진심은 어떤지 모르지만, 주장이 보여야 할 모습입니다. 도라익 선수는 어느새 동료들이 바라보는 선수가 되었거든요.
- 도라익 선수는 이미 17골로 유로파리그 골든 슈즈를 차지했습니다.
- 유로파리그에서 도라익 선수보다 골 많이 넣은 팀은 몇 개 없습니다.
- 게다가 예선전 포함 6도움까지 기록했습니다.
- 이러고 보니 자신감을 안 가질 이유를 도무지 찾질 못하겠네요.
동전 던지기를 완료하고 심판들과 악수를 마친 후, 도라익은 아인트호벤 주장에게 굿럭을 말해주고 돌아섰다.
몸을 돌리는 순간 시종 머물던 미소가 사라지고 전사의 얼굴로 변했다.
"기적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기적을 위하여!"
"포 미라클!"
경기는 초반부터 치열했다. 심리적 압박이 큰 경기여서 두 팀 모두 긴장을 느낄 수밖에 없다. 초반의 플레이에 따라 좋은 긴장과 나쁜 긴장으로 갈리기에 누구도 뭔가를 감출 생각을 못 했다.
- 수비는 스토크시티가 훨씬 안정적입니다.
양 팀 다 수비에 중심을 두는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다. 경기 초반에 실점하면 90분 내내 코를 꿰어 끌려다닌다.
수비에 치중하면 공격에 투입되는 역량이 적어지기에 경기 초반에 누구의 공격이 나은지 판단할 근거가 부족했다.
- 오늘 제임스 선수 컨디션이 아주 좋습니다.
맥자넷, 제임스, 토미, 루이스, 줄리엔 등 선수가 도라익과 함께 심리학 박사에게 상담을 주기적으로 받았다.
루이스는 욱하는 성격 때문이고 줄리엔은 아들 상황을 말해주고 조언을 들었다. 토미는 그저 제임스와 도라익이 받는다고 하니 덩달아 받았고, 맥자넷은 어린 시절 집을 떠나 생활하면서 가족들과 서먹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제임스는 자신이 흥분하는 시기와 정도를 조절하려고 상담을 받았다. 치료가 아니라 흥분 자체를 무기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꽤 성공적이어서 슬슬 제임스도 이적 루머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한 달 동안 가끔 조절에 실패하여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도라익 영입 이전의 스토크시티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제임스의 괄목상대해야 할 변화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경기는 격렬하게, 그러나 지루하게 진행됐다. 빠른 공방을 주고받으며 선수들이 치열하게 달리곤 있지만, 유효 슈팅은 물론 슈팅 자체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아인트호벤은 유로파리그에서 공격 포인트를 23개나 올린 괴물이 두려워 반격을 염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고, 스토크시티 역시 맨시티의 수비진을 반죽처럼 휘젓고 다닌 아인트호벤의 7번을 조심해야 했다.
"슬슬 공격해도 될 것 같습니다. 에드워즈가 7번을 파악했습니다."
톰 에드워즈는 천재다. 수비할 때 위치 선정은 누구나 감탄한다. 그러나 공격 가담이 안 되는 커다란 약점 때문에 강팀들에 외면받는다.
웬만한 팀에서 풀백의 공격 가담은 옵션이 아닌 필수다.
거기에 스토크시티에 대한 충성심도 두터워 에드워즈의 영입을 고민하는 구단이 아예 없었다.
"도우, 시작하자."
클루카스의 말을 들은 감독 대행이 외쳤다. 도라익이 손뼉을 크게 쳐서 선수들의 주의를 끈 후, 미리 정해진 손동작으로 지시를 전달했다.
'저게 뭐였지?'
긴장한 나머지 벤치에 앉은 오창범이 수신호를 해독하지 못했다.
- 스토크시티가 라인을 올립니다.
- 지금 수비진에 빠른 선수는 레체르트 하나뿐입니다. 조금 모험으로 보이는데요.
- 아, 도라익 선수를 밑으로 내리네요.
도라익이 내려오고 제임스와 산체스가 올라갔다. 산체스는 오른쪽 윙처럼 뛰고 제임스는 도라익의 자리로 갔다.
왼쪽은 공격 상황엔 도라익이 차지하고 수비 상황엔 그저 비워두기로 했다.
- 아인트호벤 수비진이 혼란을 느낍니다.
- 찰리와 도라익 두 공격수를 염두에 두고 수비 전술을 준비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전개죠?
아인트호벤 벤치도 대응할 방법이 없다. 뭔가 대응책을 지시했는데 스토크시티가 또 변해버리면 그땐 진짜 끌려다닌다. 지금은 위험하더라도 선수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선수들이 알아서 변화하는 과정에 문제점이 발견되면 그때 벤치가 나서서 교정해야 한다.
도라익이 왼쪽에서 공을 잡자 선수 세 명이 몰려왔다. 동시에 찰리에게도 수비수 두 명이 붙었다.
단판으로 승패가 갈리는 중요한 경기에서 당연히 상대 핵심 선수를 꼭꼭 묶어둬야 한다. 그걸 상대가 역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것까지 고려하기엔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
도라익은 짧게 드리블하다가 공을 뒤로 돌렸다. 스티븐 워드가 공을 받아 제임스한테 보냈다.
도라익에게 접근했던 선수 중 두 명이 빠르게 중앙으로 복귀했다. 도라익 역시 안으로 달리며 측면을 워드에게 양보했다.
- 제임스 선수 슛!
- 코너킥입니다.
레체르트와 대니 그리고 리암이 빠르게 달려왔다. 코너킥 키커는 도라익이 맡았고 산체스가 뒤로 물러나서 에드워즈와 워드와 함께 반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스토크시티의 대처가 무색하게 아인트호벤은 필드 플레이어 10명이 전부 수비에 투입되었다.
- 난전 중에 골키퍼가 공을 잡습니다.
도라익이 페어린던의 크로스를 흉내 내고 찰리가 가까운 포스트에서 빠른 헤딩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 수비수가 점프하여 방해했다.
공은 허공에서 3개의 머리에 연이어 맞은 후 키퍼의 손에 들어갔다.
- 7번 달립니다.
어느새 아인트호벤의 7번이 달렸다. 그러나 산체스가 빠르게 접근하고 에드워즈가 기막힌 위치 선정으로 돌파할 길마저 틀어막았다.
- 도라익 선수 어느새 수비 위치로 돌아갔습니다.
전반전은 대체로 스토크시티가 우세한 상황에서 0:0으로 끝났다. 한 번의 실수가 실점으로 이어지고, 하나의 실점이 패배로 연결되는 결승전이다.
작은 우위를 점했다고 우쭐거리기엔 점수의 변화가 없었다.
"우리 반드시 이겨."
도라익이 우쭐댔다.
"저들은 우리 수비를 뚫을 방법이 없어. 우린 있고."
"그게 뭔데?"
제임스가 고요한 얼굴로 질문했다. 제임스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절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비밀이야."
선수들이 피식 웃었다. 사기를 고취하려고 거짓을 꾸며낸 것 같진 않지만, 그렇게 신빙성 있게 들리지도 않았다.
"위너 머스트 비 스토크시티!"
"후아!"
관객석 분위기도 대체로 스토크시티 쪽이 좋았다. 스토크시티가 확연하진 않아도 우위를 보인 건 사실이고, 스토크시티 팬들이 첫 유로파리그 결승 진출에 과하게 흥분한 탓도 있다.
그러나 최경호만은 변화하지 않은 점수 때문에 마음을 졸였다.
'봉인 풀면 큰일인데. 어렵게 지금까지 잘 감추고 있었는데 말이야.'
- 작가의말
최경호 : 라익아, 절대 안 돼. 제발 흑염룡만은 꺼내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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