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컵
2031년 1월 3일.
도쿄 올림픽 경기장.
제20회 AFC 아시안컵 8강전이 펼쳐졌다. 후반 87분, 한국 대표팀이 1:0으로 앞선 가운데 이란 대표팀이 맹공격을 펼쳤다.
- 위험합니다.
- 훌륭한 펀칭 수비.
잘 올린 이란의 크로스를 출격한 키퍼가 펀칭으로 쳐냈다.
흘러나온 공을 먼저 잡은 한국 선수가 앞으로 길게 찼다. 오늘의 유일 득점자이자 4골로 이란의 하다디와 함께 득점 공동 1위를 달리는 박창식이 빠른 속도로 달려 공을 먼저 잡고 앞으로 툭 쳤다.
한국을 응원하는 관중들이 끓어올랐다. 잘하면 골이고 못해도 시간을 최소 30초 이상 끌 수 있는 좋은 찬스다.
"저 시발 새끼가."
한국 대표팀 벤치가 벌떡 일어나 그라운드로 돌진했다. 주심이 급히 의료진을 불렀고, 대기심과 부심들도 사고 현장으로 달렸다.
후반전에 교체로 올라온 이란의 풀백이 백태클로 박창식을 넘어뜨렸는데, 상황이 심상치 않다.
곧 레드카드를 받은 이란 선수가 고개를 푹 숙이고 경기장 밖으로 걸었다. 코치들이 반칙 선수를 향해 욕설을 퍼부으며 다가가려는 선수들을 말렸고, 이란 벤치도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하여 우르르 몰려서 퇴장 선수 곁을 지켰다.
- 저런 씨발 새끼가.
- 강 해설,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이란은 퇴장으로 한 명 줄었고 한국 대표팀은 부상으로 한 명 줄었다.
"발목이 나갔습니다. 치료에만 한 달 이상 걸리고 그라운드에 복귀하려면 최소 석 달 예상합니다."
팀닥터가 씨근거리며 말했다. 20년 전이었으면 선수 생명이 끝났을지도 모를 부상을 보고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코치, 선수들 흥분하지 않게 잘 다독여. 엿새 뒤면 4강전이야."
감독은 부글거리는 속을 누르고 연신 지시를 내렸다.
"최 코치는 창식이랑 같이 병원에 가요. 대체 선수를 선발해야 하니 증명 서류를 바로 떼세요."
국제대회 진행 중 큰 부상으로 선수가 퇴출할 경우 딱 한 번에 한해 대체 선수를 투입할 수 있다.
"자자. 몇 분만 더 버티면 우리 승리다. 흥분하지 말고 반칙 조심해. 동작이 거칠면 보복으로 판정하여 옐로카드 줄지도 모른다."
수석 코치가 선수들을 다독였다.
"열심히 해서 창식이한테 우승컵 안겨야지."
축구는 신체 싸움이 빈번한 스포츠다. 경기 막바지에 육체적으로 힘들고 심장 박동은 평균 130 이상이기에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정말 어렵다. 게다가 지면 탈락인 토너먼트라 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도 심하다.
그런 상황에 팀의 주요 득점자가 심한 부상으로 구급차에 실려 갔으니 분위기가 쉽게 진정될 리 없었다.
"이제부터 카드 받는 선수는 경기 출전이 없다."
감독이 엄포를 놓고 나서야 어수선한 분위기가 진정되었다. 보복을 걱정한 이란 주장이 한국 주장을 찾아와 사과하며 고의가 아니라고 구구절절 해석했다.
약 5분에 걸쳐 분위기가 가라앉고 나서야 주심은 경기 재개를 알렸다. 교체 기회를 다 써버린 한국 대표팀은 어쩔 수 없이 열 명으로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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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1:0 승리로 끝났으나 한국 대표팀은 환호하지 못했다.
박창식의 부상이 생각보다 엄중하여 치료와 재활에 최소 반년은 걸릴 거라는 의사 소견이 있었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가장 큰 문제인 군 면제. 우승해야만 면제받는 상황에 팀의 주요 득점자가 이탈했으니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준결승 상대는 대회 주최국인 일본이다. 영원한 라이벌이자 중국과 함께 이번 대회 우승자 후보인 그 일본.
"차출 거부했다고?"
감독이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리쳤다. 박창식이 빠지고 포워드가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또 부상이 있을지도 모르고, 포워드가 한 명뿐이면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없다.
그런데 K리그를 뛰는 세 명의 포워드 모두 차출을 거부했다. 셋 다 축협과 가깝게 지내는 선수들이고, 이미 군 복무도 마친 상황이다.
"리그 망한 게 우리 탓이 아닌데."
코치가 툴툴댔다. 중국 리그가 세계적인 선수들을 돈으로 끌어오고 일본은 용병 제한을 풀어버렸다. 아무 조치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던 K리그가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내부 고발자가 우리라고 생각하나 보지 뭐."
그리고 작년에 터진 승부 조작 스캔들. 가뜩이나 하락세인 K리그의 숨통을 아예 끊어버렸다. 축협은 내부 고발자가 감독이라고 여겨 아시안컵 대회 준비를 돕기는커녕 은근히 방해하기나 했다.
"거절 이유는?"
"한 명은 작은 수술을 하고 회복하는 중입니다. 둘은 가족 여행으로 현재 유럽과 미국에 있습니다."
가족여행 중인 두 선수는 시차 적응 및 그간 훈련을 쉬면서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라는 이유를 대며 차출을 거부했다.
그때, 감독의 전화기가 따르릉 울렸다.
- 네, 아버지. 무슨 일로 전화 주셨습니까?
감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 차 감독. 다친 선수는 어때?
- 재활까지 합치면 반년 이상 공백기가 예상됩니다.
- 대체 선수 구하기 힘들지?
- 뭐, 결정이 쉽진 않아요.
- 나한테까지 숨기고 그래. 다들 차출 거부했다고 들었다.
차 감독은 코를 한껏 찡그렸다. 아버지까지 알 정도면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봐야 한다. 어쩌면 축협에서 차 감독의 위신을 떨어뜨리려고 일부러 소문을 퍼뜨리는 중일지도 모른다.
- 동영상하고 자료 몇 개 보냈다. 그리고 전화번호도 보냈어. 정 어려우면 그 선수라도 뽑아라.
통화를 마친 차 감독은 얼른 톡을 열어 동영상을 확인했다. 코치들도 우르르 몰려와 함께 동영상을 구경했다.
"박창식보다 훨씬 빠른 거 같습니다."
"전술 이해가 걱정인데."
"우리 팀 전술은 빠른 포워드가 꼭 필요합니다."
"빠르기만 해선 안 돼. 수비수를 등지고 공을 지킬 줄도 알아야지."
박창식이 바로 세계적으로 귀하다는 몸싸움이 되고 빠르기도 하며 득점력까지 갖춘 선수다. 다소 부족한 기량에도 프랑스 리그앙에서 주전으로 뛰는 이유다.
"일단 부르죠. 그사이 다른 대체 선수를 찾으면 그냥 훈련에 합류하게 하여 경험을 쌓아줘도 좋고요. 어린 선수인데 이런 기회를 마다하겠습니까. 대체 선수가 되지 못하더라도 언론에서 시끄럽게 떠들어줄 텐데 말입니다."
차 감독은 아버지가 보내온 전화번호를 클릭했다. 통화가 연결되고 조금 졸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경호입니다. 누구죠?"
차 감독은 능숙한 독일어로 대답했다.
"한국 대표팀 감독입니다. 도라익 선수 에이전트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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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년 1월 5일.
런던 국제공항.
"똥은 가만히 있어도 냄새가 천 리 간다."
최경호의 말에 도라익이 얼굴을 찌푸렸다.
"형. 내가 똥이야?"
"하물며 넌 똥보다 천 배 훌륭하다."
"근데 형은 같이 안 가?"
"도쿄까지 가는 티켓이 얼마나 비싼지 알아? 난 구단 찾는 일에 열중할 테니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골 넣고 돌아오거라."
"형 바보지? 내가 출전할 가능성은 없어."
최경호는 아쉬움에 혀로 입술을 핥았다.
"하긴 어느 대표팀이 열여섯 살도 안 된 무소속을 아시안컵 같은 큰 대회에 출전시키겠어. 그래도 말이야. 감독한테 돈 좀 찔러주면 어떻게 안 될까? 대표팀 경기 뛰면 협상할 때 훨씬 유리할 것 같은데 말이야."
"헐."
"아시아에선 그런 일이 흔하다던데."
"형 또라이야? 대한민국은 선진국이야."
'또라이가 누굴 또라이래.'
최경호가 속으로 툴툴거렸다.
도라익은 전자 여권과 전자 티켓을 점검한 후 작별 인사를 했다.
"형, 나 간다."
"안아보자."
최경호는 다짜고짜로 도라익을 그러안았다.
"난 여전히 자신감이 넘친다. 네 마음도 나와 같기를 바란다."
"그럼 밤에 혼자 술 마시고 자길 욕하고 그러지 마."
최경호는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봤어?"
"응. 내가 생각해 봤는데 형은 협상 스킬이 문제야. 테스트 볼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항상 좋았거든. 근데 단 한 번도 계약이 체결된 적 없어."
"지금의 고난은 더 큰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다. 난 널 어정쩡한 선수로 키우려는 게 아니야. 그래서 협상 과정이 험난한 것일 뿐."
맨날 듣던 소리라 지겨웠다.
"됐어. 나 진짜 간다."
"내가 준 카드 잊어버리지 말고. 그리고 아껴서 긁어."
최경호와 작별한 도라익은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안대를 쓰고 잠에 빠졌다. 중간에 토론토를 경유하여 36시간 후에 도쿄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짐을 메고 출구로 나가니 머리가 반쯤 벗어진 중년 남자가 도라익 세 글자를 크게 프린트한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도라익입니다."
"감독 말고 코치다. 수석 코치."
"알겠습니다. 수석 코치님."
코치는 주먹으로 도라익의 팔을 툭툭 치며 즐겁게 웃었다.
"몸이 바위처럼 단단하구나. 괜한 걱정 했어."
코치와 함께 밖으로 걸으니 차 한 대가 시동을 건 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인이 성격 급하다는 게 옛말이라고 하더니, 아주 옛말은 아니었다.
"키가 얼마야?"
"185입니다."
"체중은?"
"83입니다. 체지방은 7%이고 100미터 10초9 뜁니다."
운전하던 기사가 휘파람을 불었다. 도라익은 모르지만, 국제 면허증을 유일하게 소지한 팀닥터였다.
"이틀 뒤에 경기 있다. 시차 문제없지?"
"오는 비행기에서 한국 시간에 맞춰 잤습니다. 그런데 저 출전합니까?"
"프로는 출전 안 하더라도 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법이야."
'난 프로 아닌데.'
그러나 겉으로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작가의말
그새 키도 크고 체중도 불고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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