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으로
2030년 7월 6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 국제선 출구.
[도라이]
삐뚤삐뚤하게 쓴 한글 피켓을 든 젊은 남자가 있었다.
'아, 이놈의 이름.'
속으로 투덜거린 도라익이 청년한테 다가가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도라익입니다."
"반가워. 난 최해철 아들이야. 이름은 경호."
청년이 대답했다.
"혼자 오셨어요?"
"응. 아버지는 입원했어."
최경호는 독일에서 태어났고 독일 국적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가수 기획사를 꾸렸는데 최근 크게 망했다. 자주 한국에 놀러 간 덕분에 글자는 괴발개발이어도 말은 유창하다.
최해철은 도라익의 할아버지와 친분이 깊다. 도라익을 축구선수로 만들려고 성화인 할아버지가 전문가를 고용해 훈련 영상을 찍어 독일에 있는 최해철에게 보냈고, 최해철이 구단 코치로 있는 지인한테 보여줬다.
안타깝게도 구단의 아시아 유스 선수 선발은 한 달 전에 끝났다. 고작 도라익 하나 때문에 스카우트를 한국에 보낼 상황이 아니었다.
구단에선 도라익이 독일로 와서 입단 테스트를 받길 원했고, 할아버지는 중대한 결심을 내렸다.
해외 유학을 핑계로 도라익을 자퇴시킨 후 비행기에 태워 독일로 보내버렸다.
"병원이 어디예요?"
도라익은 독일의 과일 바구니 시세를 어디서 알아볼지 고민했다. 외국에 가면 늘 바가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할아버지께서 신신당부했다.
"어머니랑 삼촌이 모시고 한국에 갔다. 거기 아버지 병을 잘 아는 의사가 있거든."
"아저씨는 왜 안 갔어요?"
"나까지 가면 네 입단 테스트는 누가 봐줘."
'좋은 사람이구나.'
도라이라고 쓴 피켓 때문에 살짝 토라졌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고맙습니다."
도라익이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
"야, 허리 숙이지 마. 괴롭히는 줄 안단 말이야."
낮게 꾸짖은 최경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 일본사람입니다. 이거 인사예요."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며 신고를 고민하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
"어서 가자. 너 때문에 간 떨어질 뻔했다."
도라익은 얼마 안 되는 짐을 끌고 최경호 뒤를 졸졸 따랐다.
"근데 너 키 얼마야? 나보다 작은 것 같은데."
"178입니다."
"다리가 길어서 그런가? 181인데 네가 더 커 보인다. 몸무게는?"
"76킬로그램입니다."
최경호의 차는 연식이 꽤 되었다. 도라익은 짐을 뒷자리에 싣고 보조석에 앉은 후 안전벨트부터 맸다.
"너 축구 잘해?"
도라익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아요."
"뭘 잘하는데?"
"골고루 다 잘하는데요."
조금 뚱한 대답에 최경호가 킥 웃었다.
"그래도 프로가 되려면 남들보다 특별히 잘하는 게 하나는 있어야지."
도라익은 고민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저 빨라요."
"얼마나 빠른데?"
"100미터 11초3 뛰는데요."
최경호가 감탄했다. 아직 열다섯 살이니 더 빨라질 잠재력이 충분하다.
"포지션은?"
"축구 혼자 해서 정해진 포지션은 없어요."
"왜? 설마 아이 하나밖에 없는 시골에서 자랐어?"
"할아버지가 훈련만 시켰어요. 손 선수 다큐 보고 똑같이 했어요."
몇 년 전에 은퇴한 선수로 유럽 리그 아시아 선수 최다 골 기록 보유자다. 어린 시절 경기 안 뛰고 기본기 훈련만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럼 한 번도 애들이랑 축구 한 적 없어?"
"오기 전에 동네 애들이랑 같이 했는데 한쪽에 스무 명씩 뛰고 골키퍼도 둘씩 서고 그랬어요."
최경호는 헛웃음만 나왔다. 2부리그라곤 하지만 백사십 년 전통의 프로 축구팀이다. 그런 곳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는다고 해서 꽤 기대했는데.
"원하는 포지션은?"
"공격수요. 애들이랑 할 때 골 스무 개 넣었거든요. 키퍼나 수비수 하기엔 키가 작기도 하고."
차가 어느새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도라익은 인천 공항으로 갈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에 곧장 흥미를 잃었다.
"근데 아저씨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물일곱이야."
"그럼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어린 녀석이 넉살도 좋다고 생각하며 최경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형은 애인 있어요?"
"노코멘트."
"키스는 해 봤어요?"
"운전하는데 말 걸지 마!"
탈탈거리며 달리던 차가 고속도로에서 빠져 시내로 들어갔다.
"너 술 마셔도 돼?"
"아니요. 탄산음료랑 라면도 안 먹고요. 기름진 음식도 안 먹어요."
"마음가짐은 이미 프론데?"
최경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프로가 잘하는 게 아니고 잘하는 사람이 프로인 겁니다."
도라익은 놀리는 것도 모르고 우쭐했다.
최경호는 시내 외곽 길가에 주차했다. 층수가 낮은 낡은 건물이 가득한 구역이다.
"내 사무실이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함부르크로 가자."
최경호의 사무실은 4층짜리 작은 건물의 2층이었다. 침대와 책걸상이 놓인 방 하나에 물건도 없이 휑한 방 하나. 그리고 작은 화장실이 있었다.
"네가 침대에서 자. 난 바닥에서 자면 돼."
최경호는 빈방 구석에 신문지를 폈다. 더운 여름이어서 바닥에서 잔다고 입 돌아갈 일은 없지만, 도라익은 기분이 찝찝했다.
오는 내내 비행기 안에서 상상했던 유럽 생활은 이렇지 않았다. 그리고 형을 바닥에 재우고 자신은 침대에서 자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뭐 하는 사무실이에요?"
사무실엔 사업 장르를 유추할 만한 어떠한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
"가수 기획사."
"기획사요? 아이돌 키우는 뭐 그런 데?"
도라익의 톤이 살짝 올라갔다.
최경호는 고개를 저으며 신문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한국이랑 달라. 우린 키우는 게 아니라 발굴해."
"뭐가 다른데요?"
도라익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한국은 가수를 훈련과 경쟁으로 제작하지. 우린 가능성 있는 가수를 찾아 앨범 단위로 계약한다. 가수랑 내가 협력해서 곡을 찾아 앨범으로 제작해 파는 거야."
"디지털 음원이요?"
"응. 근데 그건 별로 수익이 없어. 주로 게임 회사나 영화사 혹은 드라마 제작사에 팔지. 자작곡의 경우 저작권까지 팔면 꽤 짭짤해."
"그럼 음대 나왔어요?"
"아니. 나 철학과야."
여섯 시가 되자 최경호는 도라익을 데리고 저녁 먹으러 갔다. 근처의 작은 음식점을 찾은 최경호는 맥주 한 잔에 소시지구이를 주문했다. 도라익의 식사로는 삶은 감자를 으깨 치즈와 채소하고 섞은 이상한 음식을 시켰다.
조심스럽게 음미한 도라익은 입맛에 맞는지 빠른 속도로 감자비빔을 입에 넣었다.
"괜찮지? 여기 사장이 직접 개발한 족보 없는 음식이야."
"족보 없다는 말은 나쁜 의민데요."
"그래? 처음 알았네."
도라익은 할아버지의 관리로 음식을 철저히 가린다. 그래서 오는 내내 기내식을 반도 안 먹었다. 배가 고프던 차에 먹어도 되는 음식인 감자비빔이 입맛에 맞기까지 하자 허겁지겁 그릇을 비웠다.
"하나 더 먹어도 되죠?"
도라익은 추가한 감자비빔도 후딱 해치웠다.
그와 반대로 최경호는 맥주 한 잔에 몇 개 안 되는 소시지 구이를 15분에 걸쳐 없앴다.
"식사는 천천히 하는 게 좋아."
"저는 위장이 튼튼해서 괜찮아요. 엄마는 장이 약해서 밥 천천히 드셔요."
그제야 최경호는 눈앞의 아이가 어머니보다 엄마가 더 입에 붙는 열다섯 어린이란 걸 깨달았다.
'좀 더 신경 써야겠다.'
소화도 시킬 겸 십 분 정도 걷다가 사무실로 갔다. 도라익이 먼저 세수와 양치를 하고, 최경호는 아예 수돗물로 샤워까지 했다.
"푹 자. 시차 적응이라는 게 쉽지 않거든. 난 한국에 놀러 갈 때마다 밤에 잠이 안 와서 되게 고생했어."
샤워를 끝내고 나온 최경호가 충고했다. 그러나 귀담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도라익은 이미 코골이를 하고 있었다.
도라익이 잠든 걸 확인한 최경호는 젖은 머리를 털다 말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 전화기를 꺼냈다. 통화음이 짧게 울리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 축하해. 이번 앨범도 망했다면서?
- 뮐러. 너도 내 투자자 중 하나라는 걸 잊지 마.
- 당분간 추가 투자는 없어.
- 그것 때문에 전화한 게 아니야. 너네 삼촌이 축구 에이전시 한다고 했지?
- 벌써 업종 바꾸려고? 축구 에이전시는 앨범 기획보다 훨씬 어려워. 여긴 피드백이 늦게 나오거든. 그리고 부상이랑 약이랑 여자 문제를 비롯해 돌발 변수가 너무 많아. 넌 감각이 있으니까 앨범 기획사 계속하면 언젠간 빛을 볼 거야.
- 그게 아니고. 지인이 조언을 구해서 말이야. 한국에선 독일인은 누구나 다 축구 전문가인 줄 안다니까.
경호의 몇 없는 친구 뮐러는 꽤 친절한 성격이다. 채 십 분도 안 되어 인터넷에서 구하기 힘든 전문 자료를 몇 개나 보내왔다.
- 그거 몇 년 전 자료긴 한데 참고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거야.
- 고마워. 입단 테스트 잘 되면 내가 크게 쏜다.
- 나쁜 새끼. 잘되든 안 되든 사야지. 내 투자를 받아 말아먹은 앨범만 벌써 몇 개야.
경호는 서둘러 통화를 끝냈다.
'성공하면 꼭 보답할 거야. 마이 프랜드.'
수십 번이나 했던 다짐을 한 번 더 반복한 경호는 전화기로 받은 자료를 클릭했다. 입단 테스트에서 어떤 항목이 중요한지, 계약서 표준 양식이 어떻게 되고 어떤 항목을 추가할 수 있는지, 구단과 에이전시가 선수 가치를 산출하는 기준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최경호는 뮐러가 보낸 자료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자료를 탐독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도라익을 위한 계획이 차곡차곡 세워졌다.
'이참에 확 업종 바꿀까?'
가수는 노래 잘한다고 꼭 뜨는 게 아니다. 그러나 축구선수는 축구만 잘하면 된다. 최경호는 도라익의 입단 테스트 결과를 확인하고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 작가의말
운전하는 데 키스해 봤냐고 누가 물으면 당연히 화나죠. 저는 최경호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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