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2
#1
눈꺼풀을 간지럽히는 빛이 그의 의식을 잡아끈다.
의식이 명료해지지만, 그 햇빛이 너무 반가워 눈을 뜨기가 싫다.
그 따스함이 그의 몸을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는 불꽃을 밀어낸 것 같다.
‘후···. 좋구나.’
조금 전까지 느껴졌던 그 끔찍했던 고통은 이제 없다. 이곳은 천국일까? 아니면 지옥? 천국치고는 냄새가 조금 구리기는 하지만 상관없다. 그런데 냄새?
“어?! 어! 어! 으아아!”
쾅!
“아악!”
눈에 별이 보인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던 그는 천장과 진하게 박치기를 해버렸다.
“천장? 침대?”
코끝이 시리도록 찡하게 아프다.
“크...”
머리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절로 비명이 흘러나온다.
“아, 좀 조용히 좀 자자! 새끼야.”
그때였다. 천장에서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아 나온다.
30대 중반이나 되었을까. 덥수룩한 수염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남자가 그를 노려보고 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머리의 주인이 낯이 매우 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분노가 치민다.
퍼어어억!
“컥!”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담아 남자의 머리를 그대로 들이받아 버렸다.
그에게는 이 새끼가 기억 속의 그 새끼랑 같은 새끼인지는 상관없다. 이 새끼의 죄라면 단지 당시의 그 새끼랑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생긴 죄뿐이다.
“개새끼야! 네가! 네가! 그때 그 돈만 안 훔쳐 갔으면!”
그는 얼굴을 감싸 쥔 남자의 머리를 붙잡고 그대로 끌어내렸다.
“아악! 악! 뭐! 뭐...컥!”
“네가 훔쳐 간 그 돈 때문에! 내가! 내가 아악!!!”
퍽! 퍽! 퍼어억! 퍽!
“컥! 끄르륵”
다섯 번 정도 바닥에 머리를 찍었을까. 남자의 눈이 돌아가 버렸다.
기절한 것이다. 아니 주저앉은 코와 터져버린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으니 죽었을지도?
벌컥!
“무슨 일입니까?!”
문을 벌컥 열며 중년인이 하나가 들어왔다.
“꺼져! 씨발 놈아! 죽여버리기 전에!”
그는 들어온 중년인을 쏘아보며 외쳤다. 둘의 눈이 마주친다.
“뭐? 이런 빌어먹을 새끼가 어디서...히익!”
욕을 퍼부으려던 중년인이 그의 눈을 바라보고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문밖으로 조용히 나간다.
“헉...헉...”
문이 닫히자 그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열을 내서 그런지 머릿속이 뜨겁고 숨이 가빠온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뭐, 뭐야.”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꿈이라 치부하기에 너무 생생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꿈이라고 생각하니 더 큰 두려움이 밀려온다. 분명 죽었는데? 이제 끝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과거를 답습해야 하는가? 악몽에도 정도라는 게 있다. 그 때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무기질적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뜬다.
-설마, 이게 꿈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성별을 구분할 수 없는 중성적인 목소리가 마치 고막을 직접 두들기듯 들려온다.
“넌 누구야! 귀신이냐?!”
남자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그렇지만 역시 아무도 없다.
문제는 그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온다. 귀신이라도 붙은 건가 싶을 정도다.
-쯧쯧, 나를 그런 저급한 존재들과 비교하다니
“넌 누구야?”
-나? 후후후
기분 나쁜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한 ‘그것’ 이 마치 착 달라붙는 끈적한 울림의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네가 깨운 복수의서다.
“복수의서?”
-그래. 네가 제물을 바쳐 날 깨우지 않았는가.
“내가 무슨 제물을 바쳐. 아니, 가만...”
그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싸늘하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책’이라는 키워드와 ‘제물’이라는 키워드가 머릿속에서 합쳐져 죽기 전 지니고 있던 그것이 떠오른 것이다.
“그 책?”
-그래. 그보다 굳이 입으로 그렇게 나불거리지 마라. 난 당대의 소유자가 미친놈 소리를 듣는 건 지겹거든.
녀석의 말에 그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소유자라니...책은 이미 자신과 함께 불타 사라졌을 텐데...아니 일단 녀석과의 대화에 집중해야 한다.
-설마 그게 전부 진짜?
속으로 대화하듯 생각하자 곧 그 목소리가 대답해 온다.
-습득이 빠른 놈이군. 그래. 맞아. 전부 진짜지.
-어떻게?
-네가 깨운 내 힘으로 회귀를 시켰지. 고마워해라. 네놈이 죽을 위기에 처하는 바람에 원래 가지고 있던 힘을 모조리 사용해 인과에 끼어들었다. 덕분에 내가 가진 본래 격의 태반을 잃어버리고 말이야.
-회귀?
-그래. 회귀다.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회귀라니...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다.
아니 현실적으로 그것이 가능한가?
시간을 거스른다는 것은 인과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진다는 소리다.
흔히 타임 패러독스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과거로 돌아왔다면 내가 놈들에게 잡혀갈 리가 없고 모든 것이 없는 일이 되는 건데?! 그렇다는 건 내가 불타 죽는 미래도 없는 거 아닌가!
-흠, 꽤 똑똑하군. 그래. 일반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깝지. 그래서 내가 모든 힘을 소모한 것이다. 네놈의 모든 인과를 지우며 과거로 거슬러 내려왔으니까!
-그게 가능한가?
-나니까 가능한 거다. 멍청이! 이거 아까는 꽤 멋있었는데 지금 보니 완전 헛똑똑이네.
-아까?
-그래. 소리 지우려고 이가 부러지도록 깨무는 거 보고 참 독하다 싶어서 감동했었는데···.
그 말과 함께 남자는 그때의 감정이 머릿속이 밀물이 몰아치듯 쑤셔박혔다. 동시에 고통이 다시금 밀려드는 것 같아 절로 이가 악물어진다. 다시 떠올려도 너무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단순히 환통(幻痛)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그 고통마저도 잊게 만드는 수많은 연놈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슴이 축축하게 젖어오는 걸 느꼈다. 고개를 내려 바라보니 티셔츠 가슴께가 피로 범벅이다.
-오, 그래. 잊지 않았네? 순수하고 순수한 분노! 복수에 불타는 영혼! 그렇지! 내가 이것에 반해 네게 내 모든 것을 배팅한 거야!
#2
생각을 정리한 남자의 얼굴이 조금 차분해졌다.
이렇든 저렇든 결과만을 보자면 자신이 분명 회귀한 것은 맞는 것 같다.
그때 다시금 책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그럼 이제 제대로 계약을 맺어 보자구. 그전에 통성명이나 하지?
-통성명?
-그래. 계약의 시작은 통성명 아닌가.
-계약이라니?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기는... 너 복수할 생각 아니야?
-물론 해야지.
너무 당연한 것을 묻는다.
-그래. 그래서 이제부터 그 복수에 내가 힘을 빌려주겠다는 거다. 지금의 너는 너무 비루하니까.
책의 말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놈들의 목을 물어뜯기라도 하고 싶지만, 확실히 지금은 힘이 부족하다. 놈들에게 자신은 개미새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강해질 자신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의 이야기다. 지금은 놈의 말처럼 비루한 존재일 뿐이다.
-힘을 줄 수 있나?
-그래. 난 최선을 다해 네 복수를 도울 의향이 있다.
-어째서지?
그가 반문했다. 그렇게까지 자신을 도우려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성장해야 나도 다시 잃어버린 내 힘을 찾을 수 있으니까. 내 이름이 왜 복수의서인지를 기억해라.
책의 말에 이해가 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하면 힘을 얻을 수 있나.
아직 무슨 말인지 제대로 이해되지는 않지만, 힘을 준다는데 거부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의 말에 녀석은 조소 어린 목소리로 답했다.
-계약이다. 네가 중간에 복수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제약! 막말로 복수하겠다고 해놓고 나중에 성인군자가 되거나 혹은 박애 정신이 골수에 미쳐서 모든 걸 용서하시는 경지가 되실 수도 있는 것 아니야?
-내가 놈들을 용서할 것 같아?!
놈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머릿속에 불길이 솟구치는 느낌이다. 만약 놈들을 모두 죽이고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그는 기꺼이 지옥에 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놈이 혹 영혼을 요구하는 악마의 유혹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영혼을 팔아 놈들과 함께 지옥에라도 갈 수 있다면 그는 골백번이라도 영혼을 팔 수 있다.
-그 마음가짐은 참 마음에 들어.
-그래. 난 절대 놈들을 용서할 생각 없어.
-후후, 정말 그럴까? 복수하는 중 네 손으로 갓난아기를 죽여야 한다고 하더라도? 아무 죄 없는 이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고 해도? 너로 인해 수백 수천 명의 무고한 복수가 목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네가 진짜 고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멈칫...
책의 말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건 섣불리 답할 수 없었다. 거짓으로라도 답할 수 있지만, 웬지 직감이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신중하군. 좋은 선택이야. 나도 그런 놈들을 많이 봐와서 담보가 필요해.
-담보?”
화아악!
어디론가 빨려드는 느낌과 함께 붉은 빛만이 가득한 공간 안에 서 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책이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책이다. 그가 불태운 그 책!
책으로부터 예의 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약속을 어기지 못하게 해야지.”
꿀꺽···.
“내가 만약 계약하지 않는다면?”
무작정 계약을 할 수는 없다.
옳다구나 사인할 수 있지만, 계약이라는 건 신중해야 한다.
녀석은 분명 인과를 거슬러 회귀시키기 위해 대부분의 힘을 소모했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최소한 나를 그날로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녀석은 당황하지 않았다.
“네가 계약을 어긴다면 앞으로 내가 네게 줄 모든 능력을 그 즉시 회수할 거다. 네 생명과 함께 말이다.”
“그렇군.”
“겁나지?”
“그래. 그래서...”
“자...그럼...”
“그냥 계약하지 않겠다.”
“뭐?!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책은 화가 났는지 빙글빙글 회전하며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나 그는 책의 말을 따를 생각이 없었다.
경솔했다고 하는 편이 좋으리라.
힘을 주는 건 좋다. 그러나 맹약을 어기면 힘과 함께 생명을 회수한다고 한다.
그게 뭐? 어차피 미래형이다. 애초에 받지 않아도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는데 왜 그것에 휘둘려야 하는가. 힘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는 하지만 제약이 걸린 힘 따위에 휘둘리고 싶지도 않다.
“아니... 엄청난 힘을 준다니까!”
녀석이 당황한 것 같다. 목소리가 커졌다.
“다른 놈 찾아봐. 난 내 복수에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을 것 같다. 야. 이거 치워.”
더는 이 붉은 공간에 있기도 지겹다.
복수? 그가 15년 동안 생각했던 게 복수뿐이다. 오로지 복수만을 꿈꾸며 살았다.
당시에는 허황한 망상일 뿐이지만 믿을 수 없는 선물이 와줬다. 복수의 기회는 회귀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야! 이! 은혜도 모르는 새끼야!”
“아, 미안”
그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담아 사과했다.
정말 고맙다. 미치도록 고맙다.
은혜를 갚을 수 없어 참 안타깝기는 하지만 열심히 복수하면서 보람차게 살아볼게.
사과하고 나니 마음도 가뿐하다. 그리고 이제 이 지겨운 죄책감을 떨어내고 이제 슬슬 대체 여기가 어디쯤의 회귀인지부터 알아볼 참이다. 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을 보면 분명 놈들에게 잡혀가기 전이다. 받은 것은 충분하다 못해 이미 넘친다.
“빌어먹을···. 뭐 이딴 녀석이···.”
복수의서라는 녀석은 꽤 약이 오른 것 같다. 책이 회전하는 속도가 더 빨라진 건 기분 탓일까. 잠시 후 놈이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게 뭐냐.”
녀석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기다리고 있던 그는 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