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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강빈의 꿈

-강빈(姜嬪)의 꿈-

 

민회빈 강씨 (愍懷嬪 姜氏)는 조선조 인조의 세자인 소현세자빈(嬪)이다.

청에 세자와 함께 끌려가 고생하다가 조선과의 사무역으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모았다. 그 재물로 소현세자의 외교를 뒷받침했고 청에 포로로 끌려와서 종의 신세로 신음하고 있는 수많은 조선사람을 속환해주었다. 그녀는 그들을 속환해 주고 그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농작물을 청의 장수에게 팔아 더 큰 돈을 벌었다.

청에서 조선의 부국강병의 비결을 보았으며 소현세자와 함께 부강한 조선의 앞날을 꿈꾸었다.

그러나 조선의 고루한 사상은 소현세자와 그녀의 원대한 꿈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결국, 그들 부부는 비극적 죽음을 당하고 말았으며, 조선은 여전히 낙후한 나라로 있다가 결국 일제식민지의 비극을 겪게 되었다.

이제 이십일세기, 한국은 바야흐로 세계로 비상하고 있다.

캄캄한 시절에 선각자였던 그녀, 강빈같은 사람들의 숨은 힘이 오늘날 우리를 있게 하였다고 본다.

 

16세기 말 극동아시아의 정세는 격변기에 처해 있었다. 명은 환관 엄숭이나 위충현의 전횡등 관료집단의 부패와 명 황제 신종의 학정, 그리고 임진왜란 참전으로 국운이 기울고 있었다. 이 틈을 타 여진족의 추장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건국하고 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광해군은 매우 현명한 외교노선을 택하여, 이러한 국제정세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후금과 원만하게 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덕’을 내세운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대후금 외교정책은 강경노선으로 바뀌었다.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세력들은 ‘도덕적 가치’를 내세워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도덕적이지 못하며 조선의 종주국이며 임진왜란을 도운 명과의 의리를 저버린 무도한 외교라고 비난하고 조선의 국력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청과 맞서는 외교를 펼쳤다.

이에 명을 공략하고자 하던 청은 후위의 위협을 먼저 제거하기 위해 조선으로 군사를 돌렸다.

그것이 1627년(인조 5년)에 있었던 정묘호란으로 전쟁에서 패한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고 그로 말미암아 후금군은 철군했다.

1636년(인조 14년)에 이르러 국력이 더 강해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종전의 입장을 바꿔 이제는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겉으로는 형제관계임을 인정하지만 속으로는 명을 지지하는 조선의 태도에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청은 조선을 다시 한 번 쳐서 다시는 조선이 청에 반기를 들지 못하게 묶어 두어야 했고 군신관계를 요구함으로 조선의 태도를 보고자 했던 것이다.

청조의 요구에 대노한 인조는 척화파를 지지하고 청과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청의 요구를 거절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청이 바라던 바였고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청군은 조선의 반응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1636년 12월 8일 압록강을 넘은 청군에 대항하여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을 항전하였으나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모든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리므로써 항복의 의식을 거행했다.

그것이 조선 역사에서 커다란 수치로 남아 있는  삼전도의 굴욕이다. 삼배구고두례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세 번 숙이는 것을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격변기에 인조의 며느리가 된 민회빈강씨 (愍懷嬪姜氏)는 본관이 금천(衿川)이며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로서 1611년(추정)에 태어나 1627년(인조5년) 정묘호란이 있던 해에 가례(嘉禮)를 올려 17세의 나이로 소현세자빈이 되었다.

어릴적 부터 자유분방하고 영특하고 호기심이 많았던 민회빈 강씨는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혼인을 한 후 남편인 소현세자를 매우 사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강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삼간택 까지 올라온 윤의립의 딸 윤씨에게 첫 눈에 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의립이 남인이었기 때문에 서인의 반대로 삼간택까지 올라가고도 결국은 간택되지 못하고 말았기 때문에 결국 윤의립의 딸 윤씨는 자진하여 죽고 마는데 그 때는 삼간택까지 갔다가 결국 간택되지 못하면 자결을 했어야 했다.

세자는 강빈 때문에 윤씨를 빈으로 맞이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여 강빈을 멀리하고 오히려 세자궁에 있는 양제 귀희라는 여인을 더 가까이 했다.

그러나 강빈은 그런 상황을 묵묵히 견뎌 내었다.

병자호란이후 강빈은 소현세자, 봉림대군 부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수도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인조는 소현세자와 부자지간의 정이 두터웠고 며느리인 강빈과 사이가 좋았던 것 같다.

소현세자 또한 소문난 효자였다.

척화파 대신을 다 보내도 세자는 보낼 수 없다며 버티는 인조에 대하여 주화파 대신들은 황망한 마음을 금 할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세자가 직접 나서 종묘사직을 위하여 자청하여 청에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마지못하여 인조는 소현세자를 보내게 되었다.

또한 인조는 강빈이 탄 가마에 까지 다가가서 눈물을 흘리며 며느리를 위로했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청에 볼모를 끌려 갔을 때 강빈의 진가를 알게 된다.

강빈이 총명할 뿐만 아니라 부강하고 새로운 조선을 만들겠다는 자신의 원대한 꿈을 진심으로 뒷받침 해줄 여인인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현세자는 그것을 알게 된 후에 강빈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었으며 정치적 동지로 여기게 되었다.

청에서 서역인들을 만나고 앞선 과학기술을 본 소현세자는 그들과의 만남에 대해서 여러 대신들과 강빈에게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세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였고 오히려 거부감을 표시했지만 강빈은 아주 자세히 들어 주고 세자의 생각에 동감을 표시해 주었다.

그런 점에서 소현세자와 아주 죽이 잘 맞았다고 한다.

울면서 조선을 떠나야 했던 그녀는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와 함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눈을 뜨게 되자 소현세자 부부에게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 방법이 보였다.

강빈은 새롭고 부강한 조선을 만들겠다는 세자의 원대한 꿈을 깊이 공감하였고 세자의 그 꿈이 또한 강빈의 꿈이 되어버렸다.

처음에 소현 세자와 강빈에게 청나라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청나라는 그들의 예법을 강요했고 강빈에게는 가마조차 못 타게 했다.

그러나 세자와 세자빈은 굳건히 역경을 견디며 청나라 실력자들과 인적 교류를 터나갔고, 청나라 실력자들은 세자부부의 기품과 기개에 서서히 감복해 갔다.

당시 유목민족으로 군사력은 강하지만 문화적 수준이 떨어졌던 청나라는 조선의 물품을 필요로 했다.

그에 따라 강빈은 직접 사무역에 뛰어들어 선양에서 조선의 인삼, 약재 등을 파는 일을 주도했다.

또한 청나라는 식량부족에 시달렸고 유목을 주로 하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농사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이후 청이 선양관에 식량공급을 중단하고 황무지를 내주자 강빈은 포로로 끌려온 조선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무역으로 벌은 돈으로 그들을 속환하여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여 그 농작물을 청나라 장수 용골대에게 팔기도 하였다.

강빈은 농사를 짓는 조선 사람이 열심히만 하면 그들도 부를 쌓을 수 있도록 그들의 이익을 보장해주고 그들을 귀하게 여기고 대우해 주니 당연히 농사에 있어서 생산성이 높아 질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하여 해마다 수확하는 농작물의 양이 불어났다.

강빈은 심양에 머무는 9년 동안 그 영특한 경영수완으로 국제무역과 농사를 하였으며 그녀의 경영수완 덕에 선양관 앞 거리는 무역하는 인파로 북적거렸다고 한다.

인조실록 23년 6월조는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을 모집해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을 진기한 물품과 바꾸는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 강빈이 모은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강빈 사후에 몇 명의 대신이 그 재산처리에 들러붙어야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소현세자는 강빈에게 진심을 토로하며 칭찬하였다.

"창고에 곡물 가마니가 수북이 쌓여 있으니 그것을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고, 백성을 대하는 마음이 떳떳합니다. 일찍이 맹자께서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 하신 말씀을 오늘에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빈궁의 덕이요 공입니다.”

“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저하께서 소첩을 믿어 주지 아니하셨다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 일하는 사람을 높이 대접하고 그들에게도 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생산이 절로 늘어났사옵니다.

생산이 늘어나면 백성의 밥걱정이 없어지옵니다.

백성에게 밥걱정이 없어지면 그것은 곧 항산이 있기 때문이요, 항산에는 항심이 따라오는 것이오니, 항심을 가진 백성들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 아니겠사옵니까?”

“내 무슨 복이 있어 이렇게 어질고 강인한 보필자를 둘 수 있었을까?”

“마마, 소첩은 장차 다가 올 부강한 조선을 이미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저하께서 꿈꾸고 계시는 저하의 나라입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맡았다.

인조는 오랑캐에게 굴욕당한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속으로 청나라에 대하여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와 직접 교류하지 않고 소현세자를 통해 청나라와 외교관계에 관한 모든 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세자가 실질적으로 정치적 역할을 할 경우가 거의 없었지만 청에서는 왕자가 일정한 역할을 하는 전통이 있었고 필연적으로 청에서는 소현세자에게 정치적 역할을 기대했고 소현세자는 그러한 여러 상황속에서 정치적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소현세자가 조선과 청과의 사이에서 중재하는 과정에서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그 자금을 대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했던 사람이 바로 강빈이었다.

소현세자의 정치적 역할이 확대되고 청의 실력자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인조는 서서히 아들을 의심하게 된다.

게다가 역경에 굴하지 않고 기품과 기개를 간직한 세자부부에게 점차 감복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자부부가 조선에 있는 왕과 대신들과 달리 청에 와서 청의 실체를 현실적으로 인정한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청나라의 조선 담당 실력자라 할 수 있는 용골대는 세자의 후견인 같은 사람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인조는 더욱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인조실록 곳곳에는 세자에 대한 인조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나고 있다.

1640년(인조 18년) 2월에는 결정적으로 세자를 미워할 일이 일어났다.

이때 인조는 병이 심해 세자가 병문안 차 일시 귀국할 시점이었다.

고관들이 세자의 환송회를 열었고, 청 황제도 손수 불러 환송회를 열어줬는데 이 자리에서 용골대가 대홍망룡의(大紅蟒龍衣: 임금의 장복)를 내어주며 입으라 하였다.

세자가 황급히 거절했으나 이 내용이 신득연(申得淵)의 장계(狀啓)로 조선에 보고된 것이다.

이때부터 인조는 세자를 자신의 아들, 패전국을 대표해 자기 대신 잡혀간 인질로 보지 않고 자신의 왕위를 위협하는 정적(政敵)으로 보았던 것이다.

청나라에서 소현세자가 인정을 받게 되자 청나라에서 자기를 밀어내고 아들인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울까 의심하였던 것이다.

 

 

또한 소현세자는 선양에 있으면서 유학 강론을 폐지하고 천주교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현실주의자가 된 소현세자는 신하보다 노비들과 더 가깝게 지냈다.

강빈 또한 소현세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니 피차에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강씨는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아랫사람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궁녀들과 더 가깝게 지냈다.

평소 강빈은 선양에서 무역업으로 모은 재산으로 궁녀들을 많이 챙겼고 의복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그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나중에 강빈이 모함을 받았을 때 궁녀들은 죽어나가면서도 강빈을 배신하지 않았던 것이다.

 

강빈은 여성은 조신해야 하며 바깥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조선의 구태의연한 여성관에 사로잡히지 않았고 자신의 역량을 외국에서 충분히 발휘했다.

또한 그녀는 조선시대 여성도 세계적인 무역의 중심인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소현세자가 천주교와 서양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개방주의자, 실용주의자로 변화한 것과 같은 맥락의 변화였다.

그러나 성리학적 세계관에 사로 잡혀 있던 조선은 이러한 진취적 리더십을 가진 강빈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폐쇄적이었고 좁았다.

그러나 또한 강빈의 세계관은 조선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빨랐다는 평가도 있다.

맞는 평가일 것이다.

그 시대상에서 세계관이 조선 귀족들과 너무 다른 그들 부부가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왕위에 오르기는 매우 힘들었을 것이기는 해도 역사에 가정(假定)은 없다지만 이들 부부가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됐다면 과연 조선은 어떻게 변하게 되었을까?

 

1644년 명나라가 무너지자 세자와 세자빈은 북경으로 옮겨 가는데, 이곳에서 소현 세자는 천주교와 서양 과학을 배우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다.

이 때 세자는 북경에서 70여 일간 머물며 서구 문명을 접할 수 있었고 특히 천주교 신부 아담 샬과 깊은 교분을 쌓으며 서양에 대하여 더욱 알아갔고 조선의 부국강병의 실현에 대한 자신감을 쌓아 갔다.

마침 그 때 명을 멸망시킨 뒤 청(淸)은 이제 더 이상 세자를 인질로 원하지 않았다.

더 이상 배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인조23년(1645년) 2월, 9년간의 인질 생활을 끝낸 34세의 세자는 서양 과학을 조선에 알려 조선을 힘센 나라로 만들겠다는 꿈에 부풀어 조선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세자를 기다리는 것은 의심에 깊이 물던 인조의 차가운 눈길뿐이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뒤 소현 세자는 아버지 인조에게 청나라처럼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자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세자의 말은 오히려 타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어 인조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조선에서는 용납되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숭명대의가 시대의 정의가 되어 있었으니 청나라를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생각은 당시 위정자들에게는 있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서양도 오랑캐라는 생각만 있었다.

그리고 친청적(親淸的)인 생각은 더더욱 용납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소현세자와 강빈이 서양문물을 받고 사용한 것을 조선에서는 용납 할 수 없었다.

결국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병이 나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 몸이 모두 검은 빛이었고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알아 볼 수 없었고 그 색이 중독돼 죽은 사람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인조도 알지 못하였다고 하나 의심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현세자의 죽음이후 인조의 행적을 볼 때 거의 독살이 맞다고 보여진다.

인조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를 덮고 소현세자와 강빈의 아들인 원손을 마땅히 세손으로 책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며느리 강빈(姜嬪)에게 칼날이 겨누어졌다.

인조는 며느리를 위험한 존재로 보았다.

강빈이 보통 이상으로 총명한 여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의 수완과 그녀 수하들의 충성심을 고려해 볼 때 후일에 봉림대군의 왕권을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세자를 미워한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며느리를 미워했다.

지아비 소현세자가 죽은 지 4개월 후인 1645년 8월, 인조에게 총애를 받던 소용(昭容) 조씨(趙氏)의 무고로, 조씨 저주사건의 주모자로 지명되며 원손 석철의 보모와 세자빈의 궁녀가 국문을 당하였다.

그녀들은 목숨으로 강빈를 지켰다.

또 한 번의 저주 사건으로 세자빈의 궁녀들이 다시 죽음을 당했다.

다음 해인 1646년 2월 인조 독살 기도 사건이 터졌다.

이번에도 강빈이 지목되었다.

그 소행의 장본인으로 모함을 받아 시비도 가리기 전에 후원별당(後苑別堂)에 감금되고 말았다.

측근에 있었던 궁녀 정열과 유덕은 모진 고문에도 주인을 지키며 죽어갔고 조신들도 일제히 일어나 통렬히 그 불가함을 역설했다.

이렇게 되자 인조는 스스로 역적 강빈을 해당 부서에서 품의해 처리하라고 비망기를 내린다.

대신들은 결국 인조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강빈의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되거나 장살(杖殺)되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되었다.

인조실록은 강빈이 폐출될 때 “강빈(소현세자빈 강씨)이 덮개가 있는 검은 가마에 실려 선인문을 나갔는데, 길 곁에서 바라보는 이들이 담장처럼 둘러섰고 남녀노소가 분주히 오가며 한탄하였다”고 적었다.

인조는 당일 사약을 내려 강씨를 죽였다.

당시 사관이 “단지 추측만을 가지고서 법을 집행했기 때문에 안팎의 민심이 수긍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정도로 무고한 죽음이었다.

 

 

이어 소현세자와 강빈의 어린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가 그 중 석철(石鐵)ㆍ석린(石麟) 형제는 의혹 속에 죽고 어린 석견 혼자 간신히 살아 남았다.

효종 때 황해도관찰사 김홍욱(金弘郁)이 소를 올려 신원(伸寃)을 건의하였으나 사실이 옳게 밝혀지면 정통의 명분이 남은 아들 석견에게 돌아가게 되므로 효종은 이를 묵살하고 오히려 김홍욱을 죄인으로 몰아 장살(杖殺)하였다.

강빈은 죽은 뒤 70년 후 1718년(숙종 44)에 영의정 김창집의 주청으로 복위되어 ‘민회빈(愍懷嬪)’(愍懷:가엾게 여기고 가슴 아파하다.)이라 추숭되었고 김홍욱도 정경(正卿)으로 증직되었다.

숙종은 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 강빈의 무고함을 인정하였다.

“병술년의 일(강빈이 사사된 사건)은 차마 말할 수 없도다.

구천에서 원통함을 품은 지 70여 년이나 지났도다.

무릇 혈기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들 슬퍼하고 탄식하지 않으리요.

반드시 신설(伸雪)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조정의 신하에게 물어보니 의논이 모두 같으므로 결단하여 특별히 교지를 내린다.

예로는 부장하는 것이 마땅해 재궁을 옮기려 했으나 길일을 가려 놓고 생각해 보니 70년이나 된 시신을 움직이면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어 그대로 개수한다.”

숙종의 이 제문이 죽어서까지도, 온 몸과 마음으로 사랑했던 소현세자곁에 묻히지 못하고 영회원에 홀로 쓸쓸히 잠 던 강빈의 넋을 위로 할 수 있었을까?

 

왜 그렇게 인조는 며느리 강빈을 그녀의 친정집을 멸문시킬 정도로 미워했을까?

단순히 자기를 독살하려던 대역죄인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일까?

아마도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강빈을 사사할 적에 인조가 내린 교지를 보면 인조의 마음을 대강 알 수 있다.

“오늘의 일은 그 뜻이 인륜을 밝히고 후환을 막으려는데 있는 것이니 만일 그 사람의 죄가 의심스럽고 악한 짓이 적다면 어찌 차마 법을 시행하여 여러 어린 아들에게 날마다 울어서 의지할 곳이 없게 하겠느냐?

제 죄가 비록 중하나 전혀 은혜가 없을 수 없으니 예로써 장사지내게 하고 3년동안의 제물을 적당히 주게 할 것이며 대신들의 의논을 모아 사사한 뒤에 종묘에 고하여 죄를 사면케 하고 강가(姜家)의 산에 장사지내게 하라.”

인조도 강빈이 어느 정도 억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인조는 소현세자의 독살을 주도하지는 않았을지 모르나 최소한 방관했거나 사후에 알았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되어진다.

세자의 가치관이 그렇게 바뀌어 버린 이상 당시의 국내 정치적 상황에서 세자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왕위도 물려 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본인의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바에야 세자를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자를 죽이고 난 뒤에 세자가 변하여 결국 죽고 만 이 모든 일의 원인은 세자빈에게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미래에 봉림대군의 왕권을 위협 할 수 있는 존재를 미리 제거하자는 의도외에 인조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하여 분노하고 그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며느리 강빈에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조와 효종대의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성품이 흉험하고, 행실이 좋지 않았다. 이재를 추구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고, 그 재물로 사람을 잘 유인하였다.

세자가 강학을 폐하다시피 하고 무부와 노비들을 가까이 하며 서양 문물에 혹하는 등 많은 잘못을 범한 것은 대개 이 사람의 탓이다.

세자가 병이 있어도 잠자리를 같이할 정도로 음란하였고, 임금의 처소 가까이에서 큰소리로 발악할 정도로 불순하고 거셌다.”

아마도......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후인(後人)은 깊이 탄식하며 묻는다.

강빈을 그 시대에서 평가하기를 이재를 추구하여 많은 재물을 모았고, 그 재물로 사람을 잘 유인하였다고 해서 성품이 흉험하고 행실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조선과의 사무역을 시작하였고 그것이 모여 농사를 짓게 되고 곡물을 청나라에 도로 파니 재물이 돌고 돌아 더 큰 재물을 모으게 되었다.

그것으로 포로로 끌려와 신음하던 많은 조선 사람을 속환하여 구하고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정치활동을 훌륭히 할 수 있도록 뒷받침 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의 부국강병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조선 시대 여성은 사회 활동을 하면 안된다고 하였지만 그것이 어찌 비난 받을 죄인가?

소현세자가 무부와 노비들을 가까이 하며 서양 문물에 혹하는 등 많은 잘못을 했다고 하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너무나 앞선 생각이었고 실로 그 두 사람이 그토록 사랑했던 조선의 부강한 앞날을 위한 위대한 발걸음이었다.

강빈은 그런 남편의 행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해서 비난 받았지만 그것이 그토록 비난 받아야 했을까?

세자가 병이 있어도 잠자리를 같이할 정도로 음란하였다고 하지만 몸을 요구하는 지아비를 거절하지 못한 것은 남편에 대한 지순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던가?

임금의 처소에서 발악할 정도로 불순하고 거센 성격이란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하나 만나 주지 않으니 멀리서 임금이 듣도록 큰 소리로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흠도 물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을 사랑하고 조선 백성을 사랑하고 부강한 조선의 미래를 꿈꾼 그녀가

어찌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야 했을까?

후인은 그 일을 생각할수록 애통하다.

강빈의 조선에 대한 원대한 꿈은 그녀의 죽음과 함께 덧없이 사라지고 한평생 편한 날 없이 살다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선에 돌아와서도 꿈을 위한 행보는 전혀 해 보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 그녀의 불꽃같은 삶과 사랑을 돌아보면서 시인 두보의 시의 한 구절을 차용하여 그녀에 대한 후인의 애통한 마음을 표시한다.

‘싸움에 나가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出師未捷身先死)

길이 후인으로 하여금 눈물이 옷깃에 가득케 하네.(長使後人淚滿襟)’

 

 

*참고문헌

인조실록

효종실록

숙종실록

소현세자연구(昭顯世子硏究)」(김용덕,『조선후기사상사연구』, 을유문화사, 1977)

 

(위 내용은 2012년 2월 모잡지사에 기고한 글인데 사진을 첨부할 수가 없어서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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