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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내 일상] 네이버- 간도3

통감부 간도 출장소와 간도협약의 모순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 문제로부터 러시아를 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제국주의 국가의 세계 분할 정책을 이용해 영국과 미국에게 일본의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우월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무력을 배경으로 을사조약을 강요하고, 대한제국에 통감부를 설치해 이른바 보호 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대한제국으로부터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청나라와의 간도 문제 처리를 위해 그들의 무력을 배경으로 간도의 실질적 확보를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1906년에 참정 대신 박제순(朴齊純)이 통감부에 간도 거주 우리 나라 사람을 보호해 주도록 요청하자, 통감부는 1907년 간도에 조선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설치하였다.

 

간도 출장소의 설치는 일본 정부가 간도 문제에 있어 종래 조선 정부가 취해 온 입장을 시인한 뒤의 조처였다. 물론, 그것은 일본 나름대로 대륙 침략의 세밀한 계산에서 나온 조처였으나, 어쨌든 간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승인하고 난 뒤의 행정 조처였다.

 

간도 파출소가 편찬한 한청국경문제의 연혁이라는 문서를 통해 일본은 토문강은 송화강상류로서 두만강과 관계가 없으며, 두만강이 결코 천연의 국경선일 수 없다고 여러 조항에 걸쳐 논증하고 있다.

 

또한, 간도 출장소에 소장으로 취임한 일본 육군 중좌 사이토(齋藤季次郎) 간도는 한국 영토라 간주하고 행동할 것임을 성명했다. 조선 통감부는 1909년에 청나라의 변무독판(邊務督辦) 오녹정(吳綠貞)에게 간도는 한국 영토의 일부임을 통첩하고, 간도 거주 한국인은 청나라 정부에 대한 납세의 의무가 없음을 성명하였다.

 

비록, 일본이 간도의 우리 나라 영유를 인정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은 서로 달랐다. , 그들은 그들의 지배권이 미치는 땅을 보다 넓게 확보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고, 한반도를 거점으로 만주에 세력을 침투시키는 첫 단계로 대륙 침략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간도가 분명히 우리의 영토라고 조선 통감부가 성명하였고, 청나라에 통첩한 일제가 1909 9 7일 돌연 청나라와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두만강을 양국의 국경으로 하고, 상류는 정계비를 지점으로 하여 석을수로 국경을 삼는다.

 

둘째, 용정촌·국자가(局子街두도구(頭道溝면초구(面草溝) 등 네 곳에 영사관이나 영사관 분관을 설치한다.

 

셋째, 청나라는 간도 지방에 한민족의 거주를 승준(承准)한다.

 

넷째, 간도 지방에 거주하는 한민족은 청나라의 법권(法權) 관할 하에 두며, 납세와 행정상 처분도 청국인과 같이 취급한다.

 

다섯째, 간도 거주 한국인의 재산은 청국인과 같이 보호되며, 선정된 장소를 통해 두만강을 출입할 수 있다.

 

여섯째, 일본은 길회선(吉會線 : 延吉에서 會寧間 철도)의 부설권을 가진다.

 

일곱째, 가급적 속히 통감부 간도 파출소와 관계 관원을 철수하고 영사관을 설치한다.

 

간도 협약에 의해 일제는 안봉철도(安奉鐵道)의 개설 문제, 무순(撫順연대(煙臺)의 탄광 문제, 영구지선(營口支線)의 철수 문제, 관외철도(關外鐵道)의 법고문(法庫門) 연장 문제 등 만주에서의 몇 가지를 교환하는 조건으로 중국에 간도를 할양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일제의 침략 야심에서 본다면 만주 지배를 위해 군사력을 만주 깊숙이 진주시켜, 마침내 만주를 무력 점령하였을 때, 간도 지방도 다시 지배하에 넣을 수 있다는 계산 아래 취해진 예정된 조처였다.

 

그러므로 간도 협약은 우리 정부가 간여하지 않은 가운데 취해진 불법적인 우리 영토의 할양이었고, 이 협약은 일본 제국주의의 불법행위를 입증하는 국제 문서인 것이다.

 

협약에 의해 1881년부터 야기되었던 간도 문제는 28년만에 일제에 의한 불법적 할양으로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절차를 가지고 간도 귀속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독립운동- 독립운동 -

 

기지의 건설

 

1910년을 전후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독립전쟁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독립전쟁론이란 일본인의 침략 근성과 제국주의적 식민지 팽창 정책이 한국을 강점한 데 이어, 중국·러시아·미국 등을 침략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 아래 수립된 대일 항쟁 방법론이다.

 

그러한 전쟁이 일어날 때 한국인은 대일 독립 전쟁을 감행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민은 무장 세력의 양성과 군비를 갖추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전제 아래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첫 단계 사업은 집단적으로 민족정신이 투철한 인사들을 해외로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계획안은 신민회에 의해 구체화되었고 그 대상지는 간도였다.

 

간도를 이주 지역으로 선택한 이유는, 첫째 한반도와 두만강·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 둘째 한국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는 점, 셋째 이 지역에는 일본의 권력이 미치고 있지 않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간도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를 탐지한 일제가 1910 12월말부터 1911 1월초에 걸쳐서 약 600명의 민족운동자를 체포, 투옥하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황해도의 안명근(安明根), 신민회의 양기탁(梁起鐸)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 기지 설립 계획은 계속 추진되었다. 아울러 군자금의 모금도 꾸준히 계속되어 독립운동 기지의 건설에 투입되었다. 그 결과 서간도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에 독립운동 기지가 건설되었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직후 이곳으로 이주한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 등은 경학사(耕學社)라는 항일 단체를 조직하였다. 아울러 이곳에 군사교육 기관으로 신흥 강습소를 설치해 서간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기지로 발전시켰다.

 

특히, 신흥강습소는 신흥학교, 나아가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였다. 이 학교는 4년제의 본과 이외에 속성과로서 6개월간의 장교반과 3개월간의 하사관반을 두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그 결과 3·1운동 때까지 78백명 안팎의 사관을 양성하였다. 이들이 곧 간도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행해진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청산리 대첩의 주역들이기도 하였다.

 

북간도의 독립운동 기지로서는 우선 명동촌(明東村)을 들 수 있다. 이곳에 명동학교(明東學校)를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해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면서, 청장년의 독립군 편성을 은밀히 추진하였다.

 

다음으로는 왕청현의 나자구(羅子溝)를 들 수 있다. 1913년에 이 지역에 무관학교가 설립되어 약 1년 동안 독립군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소만 국경 지역인 밀산(密山)에서는 신민회의 이동휘(李東輝)가 깊은 산 속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교포 청년 1,500명을 훈련시켜 독립 전쟁에 대비하였다.

 

이와 같은 독립운동 기지들은 이 지역의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한 한국 독립운동의 확대, 발전인 것이다. 아울러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3·1운동 이후의 본격적인 대규모 독립 전쟁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그 의미가 있다.

 

전 개

 

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무장 세력을 보유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였을 무렵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우리 민족은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려 했지만, 이것은 제국주의의 기본 속성을 간과한 비현실적인 투쟁 방략이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무장투쟁론이 적극 대두되었고, 모든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 하에 각 독립운동 단체들을 중심으로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1919년부터 속속 출현한 독립군 부대들은 현지에 거류 중인 일본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었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국내에 침투해 일본군 국경 수비대를 교란시키는 무장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과 1920년 두해 동안 국내로 진입한 독립군의 무장 투쟁의 일례를 살펴보면, 우선 대한독립군은 일본군의 삼엄한 국경 수비에도 불구하고 혜산진을 점령하고 갑산으로 진격하였다. 이어서 강계와 만포진을 점령하였다. 아울러 국민회군과 북로군정서군 등이 국내로 진격해 회령을 점령하는 등 크게 성과를 올렸던 것이다.

 

이에 한반도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은 이들 독립군 세력을 조기에 제거하고자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1920 10월에 이른바 간도 출병을 단행하였다.

 

그들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여단(2개 연대) 규모의 정규군을 두만강 대안(對岸)의 간도 지역에 투입하였다. 아울러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의 일부와 북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의 일부를 동원해 간도 지역의 독립군을 토벌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간도 지역인 길림성과 연길도 일원에서 일본군과 독립군 사이의 접전이 벌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다. 봉오동전투는 독립군의 국내 침공 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전투이다.

 

홍범도(洪範圖최진동(崔振東) 등이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봉오동으로 유인, 급습함으로써 적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청산리대첩은 김좌진(金佐鎭) 등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10여 회 교전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으며, 독립군 측도 60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두 전쟁은 3·1운동 후에 행해진 독립 전쟁 가운데 대규모의 전쟁이었으며, 독립군이 크게 승리한 것이었다. 이 승리는 간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재만 한인은 물론, 한민족 전체에게 독립 전쟁을 통해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아울러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승리가 재만 동포들의 절대적인 인적·물적 자원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청산리와 봉오동독립전쟁에서 크게 패한 일제는 군대를 대거 간도 지역에 출동시켜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미 병력과 무장면에서 열세였던 재만 독립군의 주력부대가 소만 국경 지대인 밀산으로 이동한 뒤였다.

 

이에 분격한 일본군은 화룡현과 연길현 등지에 재만 한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들을 습격, 방화하고 죄 없는 양민들을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구 살상하였다.

 

한편, 밀산 지역으로 이동한 재만 독립군은 일단 진영을 재편성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군단 병력은 약 3 5백명 정도였다. 총재는 서일(徐一), 부총재는 홍범도·김좌진·조성환(曺成煥), 사령관은 이장녕(李章寧)이 각각 담당하였다.

 

밀산에서 겨울을 지낸 대한독립군단은 1921 3월 다시 이동을 시작해 소련령 연해주와 흑룡주일대(黑龍州一帶)에서 활동 중이던 문창범(文昌範)과 한창해(韓滄海) 등의 도움을 받아 소만 국경의 하천인 우수리 강을 넘어 이만(Iman)에 도착하였다.

 

이만은 소만 국경에 연한 소련령의 도시로서, 당시 하바로프스크 이북의 흑룡주를 장악하고 있던 적군(赤軍)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스파스크(Spassk)에 이르기까지의 연해주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백군(白軍) 및 일본군 세력과의 완충 지대에 들어 있었다.

 

3월 하순까지 일단 이만에 집결한 간도 독립군들은 무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여망에 따라서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21 4월 중순에 대한독립단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당시 흑룡주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공산 세력으로부터 항일 공동전선을 형성하자는 제의를 받아 독립군들이 이만을 떠나게 됨으로써 해체되고 말았다. 그 결과 김좌진·이범석(李範奭) 등 북로군정서계열은 이만에서 다시 동만주의 밀산으로 되돌아갔다.

 

한편, 홍범도·최진동·지청천(池靑天안무(安武) 등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서로군정서계열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 자유시라고 불리고 있던 알렉세브스크(Alekseevsk)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 독립군들은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되었다. 이것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들로 구성된 부대와 간도지역에서 이동한 독립군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와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으로 갈라져서 벌인 군권쟁탈전의 소산이었다.

 

이를 계기로 재만 독립군의 주력부대가 속한 대한의용군은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1922년말경부터 다시 간도 지역으로 복귀해 효과적인 대일 항쟁을 위해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단체의 정비

 

1920년말을 전후해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요 독립군 부대들이 소련으로 이동한 뒤에도, 간도 지역에는 상당수의 독립군들이 잔류해 비록 위축된 상황에서나마 항일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서간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단체로는 대한독립단·광복단·광복군총영·혈성단·백산무사단 등이 있다. 이들은 조직적인 독립 투쟁을 위해 1921 1월부터 각 단체간에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한 노력은 이듬해에 더욱 활발히 이루어져 새로운 단체를 결성하였다.

 

1922년 대한독립단의 일부와 광한단·한교회(韓僑會) 등의 단체가 통합에 합의함으로써 대한통군부가 발족하였다. 총장은 채상덕(蔡相悳), 비서장은 고활신(高豁信), 사령관은 김창환(金昌煥)이 각각 담당하였다.

 

그 해 6월에는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였던 단체들 사이에 문호를 개방해 조직을 확대, 강화해 나가자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단체들의 통합 운동이 재개되어 많은 단체들이 참가하였다.

 

그리해 8 23일에 환인현 남구 마권자(桓仁縣南區馬圈子)에서 8개 단체의 대표 81명이 모여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대한통군부를 대한통의부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리고 산하에 무장 부대인 의용군을 두었다. 관할구역은 16개의 지방구와 3개의 특별구로서 편성되었으며, 행정·입법·사법기관을 설치해 임시준칙·헌병조례·검찰법규 등의 법률로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대한통의부의 조직이 비대해지자, 신진 소장 세력과 보수 노장 세력 사이에 의견 대립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노장 세력이 별도로 의군부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함에 따라 소장 세력들은 대한통의부를 재정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3 12월 민사 계통의 부서를 축소, 조정하고 군사 분야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때 비록 군사 분야는 확대되었으나 전체적으로는 군사부 중심 체제로 축소되었다.

 

대한통의부가 내부의 의견 대립으로 탈퇴 세력이 생기는 등 분열의 위기에 직면해 진통을 겪는 동안에도 무장 부대인 의용군은 중립을 지키면서 고유 임무에 충실하였다. 특히 1923년에 활발한 국내 진입 작전을 수행하였다.

 

이 작전은 1,030명의 대원으로 소단위 부대를 편성해 실시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평안북도의 일본 경찰의 주재소·면사무소 등을 습격하거나 친일파의 숙청, 군자금의 모금 활동 등이 주요한 것이었다.

 

한편,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서간도와는 달리 조직을 복원하는 과정을 통해 통합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0년에 일본군의 간도 출병으로 큰 타격을 입은 북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일본군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일부 지역을 제외한 북간도 일대에서 조직의 재정비와 복원에 주력하였다.

 

1920 10월 일본군이 간도 출병을 단행하자 북간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소련령으로 이동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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