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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이자겸

이자겸()은 중서령() 이자연()의 손자이자 경원백() 이호()1)의 아들로, 음서()로 관직에 나아가 합문지후()가 되었다. 여동생은 순종()의 비()2)였는데 순종이 죽은 후 궁궐의 종과 사통하였으므로 이자겸은 이 일에 연좌되어 해임되었다.

그 후 예종()이 이자겸의 둘째 딸을 비()로 맞아들이자3) 이로 말미암아 갑자기 지위가 높아졌다. 참지정사()·상서좌복야()·주국()에 이르렀다가 개부의동삼사()·수사도()·중서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로 승진하였으며 얼마 안 되어 수태위()를 더하고 익성()이라는 공신호()를 하사받았다.

또 이자겸의 모친 김씨()4)는 통의국대부인()으로, 처 최씨()5)는 조선국대부인()으로 책봉되었으니 같은 날 이자겸의 집에 조칙이 세 차례나 내려갔다. 또한 동덕추성좌리공신()·소성군개국백()으로 봉하고 식읍() 2천 3백호()와 식실봉() 3백호()를 더해 주었으며 여러 아들들도 모두 작위를 올려주었다.

예종이 죽은 후 태자가 아직 어렸으므로 예종의 동생6)들이 호시탐탐 왕위를 엿보았으나7) 이자겸이 태자를 받들어 즉위케 하니 그가 곧 인종()이다. 이 때 이자겸은 협모안사공신()·수태사()·중서령()·소성후()로 책봉되고 식읍() 5천호() 식실봉() 7백호()를 하사받았다. 조서()를 내려 그에게 대한 예우를 특별히 하려 하자 신하들이, 표문에서 신하라 칭하지 말 것과 연회 때 백관과 함께 뜰에서 하례하지 않게 해줄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대제()8) 김부식()이 반대해 결국 무산되었다.

곧 이어 이자겸은 한양공()으로 책봉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의 모친은 평장사() 김정준()9)의 딸로 성품이 탐욕스러워 상인으로부터 물건을 강제로 사들이면서 때로는 전혀 값을 지불하지도 않았으며 또 노비를 시켜 횡포를 부리게 했으니,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상인들이 서로 축하할 정도였다. 왕이 추밀원사(使) 박승중()을 보내어 이자겸에게 설득하는 조서를 내렸다.

“임금이 신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은 그 공덕()을 분명하게 드러내어 예우를 베풀고 현명한 이를 가까이 하기 위함이다. 성왕()10)이 주공 단()11)에게, 장제()12)가 동평왕()13)에게 그렇게 했으니 이것이 역대에 하나의 전례가 되었다. 하물며 공은 선왕()의 부탁을 받아 짐이 존숭하고 친근히 지내는 사람으로 그 책무는 심대하고 공덕은 높고도 두터우니 여러 신료들과 그 호칭을 똑같이 부를 수 없도다. 이제부터 내리는 조서에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경이라 부르지도 않을 것이니 이것은 특별히 우대한 것이기는 해도 또한 옛 법을 따른 것이다. 빨리 상복을 벗고 조정으로 오도록 하라.”

그리고 의대()·안마()·금은()·폐백()을 듬뿍 내리자 이자겸이 사양하는 표문을 올리면서 삼년상을 마치겠노라고 청하였다. 이에 왕이 다시 사자를 보내, 양절익명공신()·중서령()·영문하상서도성사()·판이병부()·서경유수사(西)·조선국공()으로 책봉하고 식읍() 8천호와 식실봉() 2천호를 내렸다. 또 그를 위해 숭덕부()를 설치하고 소속 관료를 두었으며 그 처소를 의친궁()이라 하였다. 숭덕()은 본래 역적 김치양() 서택(西)14)의 이름인데 한참 뒤에야 그 사실이 알려졌다.

이자겸()의 부인은 진한국대부인()으로 책봉되었고 아들 이지미()15)는 비서감()·추밀원부사(使)로, 이공의()16)는 상서형부시랑()으로, 이지언()17)은 상서공부낭중() 겸 어사잡단()으로, 이지보()18)는 상서호부낭중()·지다방사()로, 이지윤()은 전중내급사(殿)로, 이지원()은 합문지후()로, 승려 의장()19)은 수좌()20)로 임명되었다.

왕이 건덕전(殿) 문밖으로 나가 몸소 조서를 전하니 백관들은 건덕전 뜰까지 와서 하례한 다음 이자겸의 집으로 가서 축하하였다. 이자겸이 상복을 벗고 관직에 올라 중서성()에 착좌하니 재추()와 문무() 상참()21) 이상은 섬돌 위에서, 7품 이하는 섬돌 아래에서 열을 지어 하례하였다. 이 날 큰 비가 내리며 번개와 천둥이 쳐서 큰 거리에 물이 1장()이나 찼다.

이자겸이 다른 가문에서 왕비가 나와 권세와 총애가 줄어들까 우려한 나머지 셋째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라고 강요하자 왕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다. 이날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리고 나무가 뽑히었다. 그 후 다시 넷째 딸을 왕비로 들이니 또 크게 비바람이 일었다.

왕이 이자겸을 책봉한 후 나라 전체에 사면령을 내려 참수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인을 모두 풀어주었으며 그 날 중앙과 지방에서 바친 공물은 모두 이자겸의 집으로 보냈다. 또 해당 관청에 명하여 이자겸의 선조가 살던 개명댁()을 수리하게 하고는 공사가 끝나자 그 집을 중흥댁()이라고 고쳐 부르고 이자겸을 입주시켰다. 참지정사() 이수()22)와 동지추밀원사() 허재()를 보내 조서를 내리고 의대()·금백()·안마()·토지·노비를 하사했으며 이어 그 집으로 가서 가인례()23)로 술자리를 베푼 후 밤늦게 돌아왔다. 또 이지미를 시예부상서()·동지추밀원사()로, 이공의를 위위경()으로 삼았으며, 여러 자제와 인척들에게도 차등있게 벼슬을 주었다.

이자겸이 개인적으로 자기 부()의 주부(簿) 소세청()을 송나라로 보내 표문을 올리고 토산물을 바치며 스스로를 지군국사()라 칭했다. 이자겸의 권세와 총애가 나날이 융성해져 자신에게 빌붙지 않는 자가 있으면 온갖 계략으로 중상했다. 왕의 동생인 대방공() 왕보()를 경산부()로 추방24)했으며 평장사() 한안인()을 바닷섬으로 유배보내 죽였고 또 최홍재()·문공미(이영()·정극영() 등 50여 명을 유배보냈다.

자신의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시키고 관작을 팔아 자기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다. 스스로 국공()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이라 부르고 중앙과 지방에서는 올리는 축하의 글을 임금과 동등하게 전()이라 불렀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 있었으며, 세력이 더욱 뻗치니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이 모여들어 늘 수 만근의 고기가 썩어났다. 남의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자기의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모두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팔아 치우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또 지군국사()가 되려고 왕에게 요청해 자신의 집에 와서 책봉하게 했으며 시간까지 강제로 정하였다. 그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그 후로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게 되었다.

내시 김찬()25)과 안보린()26)이 항상 왕을 측근에서 시종했으므로 왕의 뜻을 알아차리고 동지추밀원사() 지녹연(祿)과 함께 이자겸을 체포해 먼 곳으로 유배보내려고 상장군 최탁()27)과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을 불러 계획을 짰다. 당시 이지원의 장인 척준경()이 그 동생 척준신()과 함께 세도를 크게 부렸는데, 최탁 등은 척준신이 하급 관리에서 병부상서()로 발탁되어 자기의 상관이 된 것을 평소 못마땅히 여기던 터라 기꺼이 모의에 가담했다.

약속이 정해지자 그들은, 초저녁에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서 먼저 척준신과 척준경의 아들인 내시 척순(), 지후() 김정분(), 녹사 전기상()과 최영() 등을 죽인 후 시체를 궁성 밖으로 던졌다. 내직기두() 학문()이 궁성을 넘어가 중랑장 지호()를 통해 이자겸에게 보고하니 이자겸이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낭중 왕의()28)가 다시 궁성을 넘어 달려와 상황을 자세히 알리자 이자겸은 척준경·이지미 등과 함께 서로 돌아보고 벌벌 떨면서 재추와 백료를 그 집에 불러 모아놓고 이지미를 시켜 오가며 대책을 의논했으나 다들 무어라 응대해야할지 몰랐다.

척준경이, 시태가 위급하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한 후 곧 시랑() 최식()29), 지후() 이후진(), 녹사 윤한()30) 등과 함께 수십 명을 거느리고 주작문()31)까지 갔으나 궁궐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윤한으로 하여금 성을 넘어가 자물쇠를 부수고 빗장을 열게 한 다음, 성으로 들어가 신복문() 밖까지 가서 땅이 흔들릴 정도로 함성을 지르자 지녹연과 최탁 등은 외부의 군사들이 대거 집결했다고 여긴 나머지 겁이 나 나오지 못하였다.

이자겸이 사람을 시켜 최탁·오탁·권수·고석 등의 집에 불을 지르게 하고 그 처자와 노복을 가두었다. 날이 밝자 척준경이 척준신 등의 시체를 보고 화를 면치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이지보·최식·이후진·윤한·김정황()·조순거()·문중경() 등과 함께 군졸을 불러 모아 군기고의 병장기를 나누어 주고는 승평문()32)을 포위하게 했다. 이때 의장()이 현화사()33)의 승려 3백여 명을 거느리고 궁성 밖에 다다르니 궁궐 안에 있던 사람들이 감히 나오지는 못하고 활과 화살을 쥐고 자성()의 문루를 분담해 수비할 뿐이었다.

왕이 신봉문()34)으로 와서 황색 일산을 펴니 척준경의 군졸들이 바라보고 늘어서서 큰 절을 올리며 만세를 부르고 환호했다. 왕이 사자를 보내어, 무엇 때문에 무기를 소지하고 궁궐로 왔느냐고 묻게 하자, “역적들이 궁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사직을 지키려고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왕이, “역적도 없고 짐 역시 무사하니 너희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해산하도록 하라.”고 지시하고는, 내탕()의 은폐()에 줄을 매어 군졸들에게 내려주고 시어사() 이중()35)과 기거사인() 호종단()을 시켜 군사들을 잘 타일러 무장을 해체하게 했다. 노한 척준경이 칼을 뽑아 들고 이중 등을 쫓아버린 후 군졸들에게 다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서 크게 함성을 지르게 하였다. 더러 화살이 왕 앞에까지 날아오자 방패로 화살을 막았다. 의장 휘하의 승려들이 도끼로 신봉문() 기둥을 부수자 문루를 지키는 사람이 기둥을 부수는 자에게 화살을 쏘아 머리를 맞추어 즉사시켰다.

이자겸이 합문지후() 최학란()36)과 도병마녹사() 소억()37)으로 하여금 궁문에 가, “궁중에서 난을 일으킨 자들을 내보내소서. 그렇지 않으면 궁중이 소란스러워질 것입니다.”라고 알리게 했는데, 그 말투가 매우 불손한지라 왕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척준경이 소억을 보내어 이자겸에게,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역적들이 어둠을 틈타 몰래 빠져나갈까 염려됩니다. 그들이 나오기 전에 궁궐의 문을 불태우고 수색하여 체포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라고 건의했다. 이자겸이 이지미를 시켜 평장사 이수() 등에게 물으니, 궁궐의 건물들은 나란히 늘어서 있어 한번 불이 붙으며 진화할 수 없으니 절대 안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척준경은 회답이 오기도 전에 소부감()의 마른 땔나무와 장작감()의 장대나무를 가져다 동화문() 낭하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바람에 불이 거세게 타올라 삽시간에 왕의 침전까지 불길이 미치자 궁인들이 모두 놀라 도피했다.

저녁이 되자 척준경과 이지보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군사 1백여 명을 거느리고 춘덕문()38)에 다다르니 문을 지키던 내시() 이숙신()이 문을 열고 들어오게 하였다. 척준경이 궁궐 왼편 곁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자 금위별장() 이작()과 장군 송행충()이 칼을 빼어 들고 척준경을 쫓아내었다. 놀란 척준경이 급히 물러나자 이작이 손수 문을 닫았다. 척준경이 사람을 시켜 문들을 지키게 한 후, 안에서 나오는 자가 있거든 바로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밤중에 왕이 걸어서 산호정()39)까지 갔는데 시종들은 모두 도망쳐버리고 근신 임경청()40) 등 십여 명만이 따라갔다. 왕이 해를 입을까 겁을 낸 나머지 이자겸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글을 지었으나 이자겸은 양부()의 비판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그 때 이수()가 그 자리에서, “주상께서 비록 조서를 내리더라도 이공()이 어찌 감히 그 같은 일을 하겠습니까?” 하고 고함을 쳤다. 자기 뜻대로 일이 되지 않자 이자겸은 눈물을 흘리면서, “신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사오니 깊이 양찰하소서.” 하고 글을 되돌렸다.

홍입공()이란 자는 장군() 유한경() 휘하의 중랑장이었다. 이자겸이 유한경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곧이어 홍입공을 차장군()41)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도록 하고 척준경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척준경은 홍입공을 시켜 군졸 60여명을 거느리고 땔나무를 도성()의 남쪽 길까지 운반하자 그는 몰래 군졸들에게,

“나와 너희들은 모두 임금의 신하인데 땔나무를 져다가 궁궐을 불태우는 것은 신하가 할 일이 아니다.”
고 타일렀다. 그러자 다들 나뭇짐을 팽개치고 선의문()42)곁에 나있는 구멍으로 들어가서 왕을 뵙고 늘어서 절을 올리니 왕이 놀라 누구냐고 물었다. 홍입공이 앞으로 나아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왕이 매우 기뻐하여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으며 이때부터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경호를 맡았다.

새벽녘에 불길이 다가오자 왕은 궁궐에서 나가려 하였는데 마침 이자겸이 승선() 김향()을 보내 남궁( : 연덕궁)으로 나가달라고 요청해왔다. 왕이 경녕전(殿)43)까지 걸어가 내시 백사청()을 시켜 선왕들의 초상을 내제석원()에 있는 마른 우물 속에 넣게 한 다음 서화문(西)44)으로 나가 말을 타고 연덕궁()45)에 이르렀다.

오탁이 왕을 인도해 앞장섰는데 척준경이 낭장() 장성()으로 하여금 칼을 뽑아 돌입해 오탁을 잡아 목을 베게 했으며 좌복야() 홍관()도 죽이게 하였다. 사람을 나누어 보내 최탁()·권수()·고석()·이작()·안보린()·송행충(), 대장군 윤성()·한경(), 장군 박영()·송인()·사유정()·오정신()·한경(), 낭장() 이유(), 내시() 최잠(), 원외랑() 박원실() 등을 체포해 모두 죽였고 그 나머지 군사들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살육했다.

내시봉어() 왕관(), 대장군 윤선()46), 낭장 정총진(), 별장() 장성호()가 남궁()까지 왕을 호종했는데 이자겸이 이들을 내놓으라고 재삼 요구해오자 왕이 부득이 허락한 후 사람을 보내어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으나 이지보가 죄다 살해해버렸다.

이자겸이 다시 척준경과 의논하여 난리가 발생하던 날 숙직한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려고 했으나 이수가 굳이 말려 그만두었다. 장군 이녹천(祿)47)·김단()·김언()은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는데 뒤에 김언이 자진 출두하였으나 남쪽 변방으로 유배보냈다. 이날 궁궐이 모두 불타버리고 산호()·상춘()48)·상화()의 세 정자와 내제석원()의 회랑 수십 간()만이 간신히 남아 있을 뿐이었으며 백관들은 허겁지겁 뿔뿔이 도망쳐버렸다.

이자겸이 지녹연(祿), 오탁의 아들 오자승(), 고석()의 동생 고보준()을 죽이고 김찬()을 먼 곳으로 유배보냈으며, 지녹연·김찬의 처와 자식들을 적몰하여 노비로 삼았다. 김찬은 뒤에 안치()49)로 형벌을 바꾸었다.

이자겸()이 왕에게 중흥댁() 서원(西)으로 와 줄 것을 요청하자 왕이 경호를 물리치고 샛길로 서원의 문까지 이르렀다. 이때 중흥댁 집사로 있던 대경() 김의원()50)최자성()이 나와서 영접했다. 낭장 지석숭()51), 산원() 권정균()52), 대정() 오함()은 산호정()에서 남궁()에 이르기까지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서원에 이르러 지석숭 등이 왕을 부축하여 북문()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이자겸과 척준경()이 그들을 죽이려고 낭장 이적선()을 시켜 끌어내게 하였다. 지석숭이 임금의 옷을 움켜잡고 구해달라고 소리치자 왕이 이적선을 꾸짖었으나 이적선은 지석숭의 가슴을 발로 찼다. 그럼에도 옷을 놓지 않아 임금의 옷이 찢어지고 복두도 역시 문틀에 부딪쳐 부서졌다. 이지미와 이지보는 문에 선 채 왕을 쳐다보면서 섬돌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고 최식()만이 홀로 나가 절을 올린 후 이적선더러, “임금께서 말씀하시는데도 네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하느냐?”고 꾸짖었다.

이적선이 결국 지석숭을 놓아주었으나 지석숭 등은 아직도 겁에 질려 밖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당시 환관 조령()이라는 자가 이자겸에게 아부해 그를 섬겼기에 왕이 최식과 조녕을 불러,

“지석숭 등 세 사람은 지성으로 임금을 아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으니 너희들은 나를 보아서라도 죽이지 않도록 말해달라.”
고 부탁했다. 척준경이 그 말을 따라 그들을 먼 곳으로 유배보냈다. 왕이 마루에 오르자 이자겸과 그 처가 손뼉을 치고 땅을 두드리면서 대성통곡했다.

“황후53)께서는 입궐하면서부터 태자 보기를 원하였으며 주상께서 탄생하시자 오래 사실 것을 온갖 정성을 다해 하늘에 빌었습니다. 천지와 귀신들도 우리의 지극한 정성을 아는데 뜻밖에 오늘 도리어 역적들을 믿고 골육을 해치려 하다니요.”

이에 왕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뿐 말을 못했다. 왕이 서원(西)에 거처하게 된 이후로 이자겸 일당들에게 둘러싸여 나라 일을 스스로 듣고 결단하지 못하게 되었고 행동거지와 음식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백관들은 근처의 사관()으로 옮겨 임시로 붙어있으면서 수만 채울 뿐이었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더욱 강성해져 그들이 하는 짓을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다.

살해당한 척준신에게는 수사공()을, 김정분()과 척순()에게는 호부원외랑()을, 전기상()과 최영()에게는 합문지후()를 각각 추증하였으며 부의()를 후하게 내렸는데 이는 이자겸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또 이자겸이 못마땅하게 여기던 내시 스물다섯 명을 몰아내니 그로부터 왕의 외척이 더욱 횡포를 부리게 되었고 재상 박승중()과 허재() 이하 모든 관원들은 그들에게 아첨하며 빌붙었다.

그 위세와 포악함을 두려워 한 왕이 몰래 내의() 최사전()과 모의하여 척준경을 설득해 왕실을 위해 진력하도록 하니 척준경도 내심 그렇게 여겼다. 이에 왕이 척준경에게 조서를 내려,

“짐이 현명하지 못하여 흉악한 무리들이 일을 저지르게 만듦으로써 대신들에게 근심을 끼쳤으니 이 모두는 과인의 죄다. 이를 기회로 몸소 반성하고 과오를 뉘우칠 것을 하늘에 맹세하며, 신민들과 함께 덕을 일신할 것을 바라고 있다. 경은 더욱 수신()에 힘쓰고 옛 일은 염두에 두지 말 것이며 성심을 다해 보좌함으로써 앞으로의 근심을 없애도록 하라.”
고 격려했다. 마침 이지언()의 종이 척준경의 종더러,

“너의 주인은 저위()54)에 활을 쏘고 궁궐을 불태웠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 너 또한 마땅히 관노()로 적몰되어야 마땅한데 어찌 나에게 모욕을 주느냐?”
고 욕질을 했다. 척준경이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이자겸의 집으로 달려 가 옷과 관을 벗고, “내 죄가 크니 해당 관청에 나가 스스로 밝히겠소.”라고 말한 후 뒤돌아보지 않고 뛰쳐나갔다. 사람들이 말렸으나 자기 집으로 돌아가 들어 누워버렸다.

이자겸()이 이지미와 이공의()를 보내어 화해를 청하였으나 척준경()은, “당시의 난리는 모두 너희들이 한 짓인데 어찌 나의 죄만 죽어 마땅하다고 하느냐?”라고 꾸짖으며 끝내 보지 않았다. 그리고는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보낼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왕이 그 말을 듣자 지추밀원사() 김부일()을 보내 속히 사무를 보라고 하면서 안마()를 하사하였다. 이자겸이 왕을 호종하여 안화사()55)로 가자 백관이 모두 말 앞에서 큰 절을 올렸으나 이자겸은 태연히 그것을 바라만 보았다. 얼마 후 왕이 연경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이자겸은 연경궁의 남쪽에 기거하면서 북쪽 담을 뚫어 궁궐 안으로 바로 통하게 하였으며 군기고()의 갑옷과 무기를 가져다 제 집에 보관하였다. 왕이 한번은 홀로 북쪽 담에 가서 하늘을 우러러 한참이나 통곡한 일도 있었다.

이자겸은 십팔자()가 왕이 된다는 도참()56)설을 믿고 반역을 도모하려고 떡 속에 독을 넣어 왕에게 올렸다. 왕비가 몰래 왕에게 일러주자 떡을 까마귀에게 던져주었더니 까마귀가 죽었다. 또 독약을 보내 왕비를 시켜 왕에게 바치게 하였으나 왕비가 사발을 들다 거짓으로 넘어진 척하고 독약 사발을 엎질러 버렸다. 왕비는 곧 이자겸의 넷째 딸이었다.

척준경이 이자겸과 틈이 생기자 최사전이 그 틈을 타 설득하니 척준경은 결심하고 따로 충성을 다하겠노라는 말을 전했다. 왕이 사람을 시켜 척준경에게,

“국공( : 이자겸)이 비록 분수를 모르고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지만 아직 반역의 정황이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만약 짐이 만약 먼저 거사하면 친족을 가까이 하는 뜻에 어긋나게 되니 변란을 기다렸다가 대응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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