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위봉루(威鳳樓)에 나아가, 윤관과 오연총을 보내어 여진을 정벌하게 하였다. 윤관과 오연총이 동계(東界)에 이르러 장춘역(長春驛)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대저 군사가 17만이었는데, 20만 명이라고 일컬었다. 병마 판관 최홍정(崔弘正)·황군상(黃君裳)을 분견(分遣)하여 정주(定州)·장주(長州)의 두 주로 들어가, 여진 추장에게 속여 말하기를,
“나라에서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방면하여 돌려보내려고 하니, 너희들은 나와서 명을 들으라.”
하니, 추장 등이 그 말을 믿었다. 이에 고라(古羅) 등 4백여 인이 이르는지라,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복병을 내어 섬멸하였다. 그중에 건장하고 약은 자 5, 60인은 의심을 품고 관문에 이르러 들어오려 하지 않았는데, 병마 판관 김부필(金富弼)과 녹사(錄事) 척준경(拓俊京)이 길을 나누어 복병하고, 또 최홍정을 시켜 정예한 기병으로 호응하게 하여, (그들은) 거의 다 사로잡거나 죽였다. 을미일에 윤관이 직접 5만 3천 명을 거느리고 정주(定州)의 대화문(大和門)으로 나가고, 중군 병마사 김한충(金漢忠)은 3만 6천7백 명을 거느리고 안륙수(安陸戍)로 나갔으며, 좌군 병마사 문관(文冠)은 3만 3천9백 명을 거느리고 정주(定州)의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가고, 우군 병마사 김덕진(金德珍)은 4만 3천8백 명을 거느리고 선덕진(宣德鎭) 안해(安海)로 나가 두 수(戍) 사이에서 막아 방비하고, 선병 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竦), 원흥 도부서사(元興都部署使) 정숭용(鄭崇用), 진명도부서 부사(鎭溟都部署副使) 견응도(甄應陶) 등은 선병(船兵) 2천6백명을 거느리고 도린포(道鱗浦)로 나갔다. 윤관이 대내파지촌(大乃巴只村)을 지나서 한나절을 가니, 여진이 우리 군용(軍容)의 매우 성대한 것을 보고는 모두 도망하고, 오직 가축들만 들에 널려 있었다. 문내니촌(文乃泥村)에 이르자 적이 동음성(冬音城)으로 들어가 지키므로, 윤관이 병마검할(兵馬鈐轄) 임언(林彦)과 최홍정(崔弘正)을 보내 정예군을 거느리고 급히 공파(功破)하여 패주시켰다. 병신일에 좌군(左軍)이 석성(石城) 아래에 이르러 여진이 모여 둔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역자(譯者) 대언(戴彦)을 보내 항복하기를 권유하니, 여진이 말하기를,
“우리가 한 번 싸워 승부를 결정하고자 하는데, 어찌 항복하라고 말하는가?”
하고는, 드디어 석성으로 들어가 항전하니, 시석(矢石)이 빗발치듯 하여 우리 군사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윤관이 척준경에게 말하기를,
“해가 기울어 가고 있어 일이 급하게 되었다. 네가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함께 공격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제가 일찍이 장주(長州)에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을 때 잘못하여 죄를 지었는데, 공께서는 제가 장사(壯士)라고 여겨 조정에 청하여 용서해주셨으니, 오늘은 이 척준경이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을 기회입니다.”
하고, 마침내 석성 아래에 이르러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서, 적진 가운데로 들어가 추장 몇 명을 격살하니, 이에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左軍)이 합쳐 죽음을 무릅쓰고 공격하여 크게 패주시켰다. 척준경에게 비단 30필을 상주었다. 또 최홍정(崔弘正)·김부필(金富弼)과 녹사 이준양(李俊陽)을 보내, 이위동(伊位洞)의 적을 공격하여 오래 싸운 끝에 (적들에게) 이겨 1천2백 급(級)을 참하였고, 중군은 고사한(高史漢) 등 35개 마을을 격파하여 3백80급을 참하고 2백30명을 사로잡았으며, 우군(右軍)은 광탄(廣灘) 등 32개 마을을 격파하여 2백90급을 참하고 3백 명을 사로잡았으며, 좌군은 심곤(深昆) 등 31개 마을을 격파하여 9백50급을 참하였다. 윤관은 스스로 대내파지(大乃巴只)에서 37개 마을을 격파하여 2천1백20급을 참하고 5백 명을 사로잡았다. 녹사 유영약(兪瑩若)을 보내어 승첩을 고하니, 왕이 기뻐하여 유영약에게 7품직을 내리고, 좌부승지 병부낭중 심후(沈侯)와 내시 형부원외랑(內侍刑部員外郞) 한교여(韓皦如)에게 명하여, 조서를 내려 윤관·오연총 및 여러 장수들을 장유(奬諭)하고 물건을 차등 있게 내렸다. 윤관이 또 여러 장수를 보내어 땅의 경계를 획정하고, 또 일관(日官) 최자호(崔資顥)를 보내어 지형을 살펴서 몽라골령(蒙羅骨嶺) 아래에 성랑(城廊) 9백50칸을 쌓아 영주(英州)라 부르고, 화관산(火串山) 아래에 9백92칸을 쌓아 웅주(雄州)라 불렀으며, 오림금촌(吳林金村)에 7백74칸을 쌓아 복주(福州)라 부르고, 궁한이촌(弓漢伊村)에 6백70칸을 쌓아 길주(吉州)라 불렀으며, 또 호국인왕사(護國仁王寺)와 진동보제사(鎭東普濟寺) 두 사찰을 영주성(英州城) 안에 창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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