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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레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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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등록일 :
2014.04.06 23:55
최근연재일 :
2014.06.22 18:05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9,487
추천수 :
81
글자수 :
137,227

작성
14.04.29 09:05
조회
341
추천
5
글자
12쪽

3화. 빛, '오(汚)'를 느끼다.(2)

DUMMY

***



“으음….”

간신히 눈을 뜬 클로이. 조금 전까지 보았던 모든 것은 꿈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너무 생생한 꿈이었다.

클로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책들의 위치.

클로이가 물살에 휩쓸리며 부딪친 곳 이외에는 어떠한 헝클어짐도 없었다.

다시금 클로이의 코에 퀴퀴한 책의 냄새가 들어왔다.

클로이는 벌떡 일어났다.


”흐윽.”


클로이는 신음을 흘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치마를 걷어 통증이 느껴지는 곳을 들췄다.

하얗고 가느다란 그녀의 다리가 마치 처음 태양의 빛을 받는 것처럼 빛났다.

그런데, 낯선 상처가 보였다.


‘설마….’


클로이는 기억을 더듬었다.

붉은 강물에 휩쓸려 책꽂이에 부딪힌 일. 세게 부딪힌 허벅지가 시퍼렇게 피멍이 든 채 자리하고 있었다.


‘꿈이 아니잖아….’


클로이는 머리를 흔들어보기도 하고, 제 손으로 뺨을 후려쳐보기도 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도, 제 팔을 꼬집어보아도, 기억에 남아있는 부딪힌 곳과 다리에 맺힌 피멍의 위치는 일치했다.


‘책의 제목!’


클로이는 부리나케 떨어져 있던-프랑수아가 부탁한- 책을 집었다. 그러나 표지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럴 리 없어. ‘창조의 서’라고 분명 적혀 있었는데.’

‘설마….’


이 책이 불경한 ‘오(汚)’를 불러일으키는 책은 아닐까.

클로이는 프랑수아가 전해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펼쳐보았다.


-형님. 정화지 내를 수색하던 중, 이상한 책을 발견했습니다.

내용은 적혀있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부정한 솜브라의 서적이라 여겨 불에 집어던졌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책은 불에 그슬리지도 않았습니다. 책을 찢으려 해도, 심지어 검으로 단 한 장만이라도 베려고 해보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답을 알 수 없지만, 형님은 알지도 모른다고 판단되어 처제를 통해 전달합니다.

형님께서 조사하시어 전하께 직접 보고를 하시는 게 옳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주도기사단장 프랑수아.


편지의 내용 어디에도 ‘오’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클로이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설마…. 설마….

아닐 것이다. 클로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책과 서재를 그대로 둔 채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왔는지 모르게 클로이는 자신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눈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 내게 설마 그런 저주가….’


클로이는 베게에 얼굴을 파묻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베게가 흡수해 주었다. 그녀는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도 붉은 물살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의 몸도 알 수 없는 물살에 휩쓸리지도 않았다.

클로이는 몸을 일으켰다.


‘무얼까….’


그리고 다시 한 번 치마를 걷어 올렸다.

하얗고 가느다란 그녀의 다리가 다시 드러났다. 허벅지 바깥쪽에는 아직도 시퍼런 멍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었다.

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불경한 ‘오’라고 생각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녀는.


‘난 진지하게는 단 한 번도…. 불경한 생각을 품어본 적은 없었어.’


전설 속의 ‘오’는 ‘악(惡)’ 그 자체였다.

숱한 동화책과 옛이야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 상상의 괴수인 ‘인섹트’와 함께 ‘오’는 단골 소재였다.

혹시 언니와 친구들을 상대로 불경하고 부정한 척 장난쳤던 것에 대한 벌은 아닐까.

클로이는 지난 시간을 후회하며 다시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만약 가족이나 친구들 앞에서 ‘오’를 느껴버린다면, 클로이는 순식간에 부정한 죄인이 되어 구속 구를 착용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릴 것이다. 숨겨준다고 한들 그것이 얼마나 긴 시간, 그녀를 가려 줄 수 있겠는가.


짧지 않은 시간을 눈물로 다스린 그녀는 적막한 저택 안에 자신만 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수도 포트웨인으로 떠난 지가 몇 달째였고, 어머니 역시 메리즈빌에서 중요한 공무를 보며 몇 일째 들어오지 않았다. 오빠는 기사단장으로 정화를 나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언니가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전까지는 그녀에게 시간이 있었다.

당분간 친구를 만나지 않는다면 클로이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엇그제, 언니가 준비해준 식료품들은 클로이가 라브를 채집하러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책!’

창조의 서가 떠올랐다. ‘오’에 갇혀있을 때는 제목이 보였던 책. 하지만 그 이외의 상황에선 제목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내용도 ‘오’안에서는 읽을 수 있을지 몰라! ‘오’안에서만 읽을 수 있는 내용이라면 ‘오’를 느끼지 않는 법도 알 수 있을 거야!’


클로이는 계단을 내려가 크리스토프의 서재로 조심스럽게 갔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클로이는 문제의 책을 집어 들고 재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혹여나 물살이 흐르지 않게 방문을 걸어잠그고 창문을 닫았다.


‘침착해야 해, 클로이.’

클로이는 눈을 감고 물속 깊이 들어가 있는 상상을 했다. 붉은 물살. 흔들리는 몸. 그리고 ‘오’를 상상하며 문제의 ‘오’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몸이 옅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 물살인가?

클로이는 눈을 떴다. 늘 보던 침대와 이불, 늘 보던 방문과 바닥이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이, 뭐야!”


뜻대로 될 리가 없었지만, 클로이는 수차례나 같은 행동을 반복했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명상에 가까운 행동.

클로이 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행동은 그녀의 의도대로라면,

썩 추천할 만한 방법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이 하루 만에 나올 리는 만무했고, 클로이는 몇 시간을 노력해 본 후에 이내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저 꿈,

혹은 사춘기의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쉽게 치부하기로 했다.

마음속의 무서운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노력이었다.


다음날. 클로이는 기분 전환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

나오는 길에 책은 크리스토프의 서재로 가져다 놓았다.

어쩌면, 친구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면 마음만은 후련해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날이 맑아서 하늘은 유독 더 붉었고, 클로이는 능선을 넘었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흙을 파내며 라브를 채집하고 있었다.

언니와 갔던 먼 곳이 아니라, 주로 친구들이 다니는 가까운 채집장이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클로이의 귀에 들려왔다.


“클로이!”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클로이를 맞았다.

작은 바구니를 든 푸른 눈의 소녀. 약간 마른 편인 클로이와 다르게 제법 살집이 있었고, 진한 쌍꺼풀 덕에 눈이 깊어보이는 소녀.


“루씨!”

“오늘은 나왔구나? 뭐하느라 이제 나왔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어. 이네스는?”

“저쪽에서 채집 중일 거야.”


루씨가 가리킨 방향에서 한 소녀가 크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루씨와 이네스는 클로이처럼 귀한 집안의 딸들이 아니었다.

보통이라면 루씨와 이네스는 클로이에게 공손히 예의를 다 해야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소꿉친구들이기에 이들 사이는 막역했다.

클로이를 발견한 이네스는 거의 두 번은 넘어질 뻔 하다시피 뛰어왔다.


“클로잉! 너 요즘 얼굴 보기 힘들당? 헤헤.”


키가 매우 작고 앙증맞은 이네스가 방긋 웃으며 특유의 애교를 발산했다. 천생 여자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이네스는 귀엽고 여성스러웠고, 애교 또한 많았다.

그녀를 처음 보는 이들은 심지어 닭살이 돋는다는 표현도 서슴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한동안은 세 소녀가 둥그렇게 모여서 재잘거리며 지나간 일들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어댔다.

루씨에게 남자가 생겼다는 둥, 하지만 그 남자는 루씨보다도 더 가볍다는 둥, 루씨는 주제에 너무 남자의 몸매만 본다는 둥, 시덥지 않은 자잘한 이야기들에 클로이는 평범한 행복감을 느꼈다.

클로이는 친구들과 채집장 여기저기를 다니며 라브를 채집했다.


몇 시간이 마치 몇 분인 것 마냥 순식간에 시간이 흘렀다.

클로이는 가슴에 담아두었던 진짜 이야기를 꺼냈다.


“있지 나….”


‘오’를 느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일들이 생겼고, 형부인 프랑수아에게 받은 책으로 큰 고민에 빠져있다는 이야기를 설마 누가 엿들을세라 조심스레 설명했다.

그리고 치마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고, 그에 기겁하며 주변을 가리려는 루씨와 이네스에게 허벅지의 커다란 멍까지 보여주었다.


“너 설마 마귀의 힘을…. 클로이 너….”


루씨는 클로이의 허벅지의 멍을 보고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 수다를 떨던 루씨가, 부정한 기운과 마귀의 힘(오)에 관해 이야기하는 클로이를 보며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그리고 루씨의 굵은 팔이 클로이의 등짝을 한 대 세게 후려쳤다.


-짝!

“너 완전 대박! 이번엔 시나리오 잘 짰는데? 그치, 이네스?”

“헤헷, 클로잉 정말 넌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 것 같아앙.”


클로이는 아픈 등을 어루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얏. 너무 아프잖아…. 이번엔 진짜란 말이야.”

“클로이, 너는 채집할 때가 아니야. 당장 집에 가서 이야기책을 써보는 게 좋을 것 같아. 10년을 넘게 함께 한 우리가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 했으니 말야.”

“동화작가, 클로잉~ 왠지 느낌 있다앙! 어울려!”

“하지만 소재가 너무 뻔해. ‘오’는 너무 흔한 소재고…. 매년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는 마드레님의 요정 같은 건 어때?”

“루씽. 그거 왠지 낭만적이야앙.”


쉴 새 없이 콧소리를 내는 이네스와 털털한 루씨가 죽이 맞아 클로이를 놀려댔다.

클로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믿어줄 리가 없었다.

두 소녀는 클로이의 허벅지를 가리키며 저택의 계단에서 넘어지며 이런 소재를 찾은 거라며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까지 했다.

클로이는 그 자리에 더 있을 수 없었다.


“나, 이만 가볼게. 나중에 또 보자.”

“클로이! 삐졌어?”

“히잉, 클로잉~ 미안해~ 더 놀쟈아~”

“안 돼. 나 집에 가봐야 해. 이야기책 써야 하거든.”


클로이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오랜 친구들이지만, 그녀들은 클로이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더라도 클로이 역시 그랬을 것이다.

어차피 이 일은 클로이 혼자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히잉. 믿어줄 걸 그랬나아?”

“아니야~ 쟤 좀 지나면 나아질 거야.”


루씨는 멀어져가는 클로이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집에 들어온 클로이는 잡아온 라브를 보관용 통에 쏟아붓고는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집에 올 때까지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다.


“흐어엉.”

클로이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얼굴을 베게에 파묻고 서럽게 울었다.

머리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고민은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누구든 좋았다.

하지만 클로이는 친구들의 반응을 보며 마음으로 그것은 헛된 바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클로이는 그렇게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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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2화. 어둠, 미녀 군단, 그리고 조제, 그리고 마니아코. 14.06.07 213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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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화. 빛, 오(汚)를 깨닫다. 14.04.30 421 2 14쪽
8 4화. 어둠, 차기 국경 정찰대장. 14.04.29 236 3 17쪽
» 3화. 빛, '오(汚)'를 느끼다.(2) 14.04.29 342 5 12쪽
6 3화. 빛, '오(汚)'를 느끼다.(1) 14.04.28 371 4 10쪽
5 2화. 어둠, 국경 정찰대장 라주르 자비에.(2) 14.04.28 410 3 11쪽
4 2화. 어둠, 국경 정찰대장 라주르 자비에.(1) 14.04.27 326 4 9쪽
3 1화. 빛, 정화 기사단장 크리스토프 미첼.(2) 14.04.27 341 7 12쪽
2 1화. 빛, 정화 기사단장 크리스토프 미첼.(1) 14.04.17 611 11 11쪽
1 프롤로그. +8 14.04.12 917 1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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