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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현대편 -절애(대한민국, 1990)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작품등록일 :
2022.05.11 12:20
최근연재일 :
2022.07.07 12:01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2,518
추천수 :
108
글자수 :
164,208

작성
22.05.26 18:57
조회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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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제 2 장 악연 (2)

DUMMY

“야, 일어나. 밥 먹자.”


벽에 기대어 졸고 있던 재성을

누군가가 깨웠다.


‘왕’으로 보이던 사내의

옆에 서있던 둘 중

깡마른 사내였다.


7154번,


눈빛이 마치 칼날 같은,

섬뜩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재성은 얼른 눈을 비비고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배식도 끝났는지

밥 먹을 준비가 다 되어있었다.


‘왕’으로 보이는

7774의 남자가

손짓으로 재성을 부르며

입을 열었다.


“일루 와, 내 옆으루.”


재성은 쭈뼛거리며 천천히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왕’이 말했다.


“자, 다들 밥 먹자.

이렇게 또 하루가 갔구먼.”


사내의 말이 끝나자,


7154와 5456은

‘식사하십쇼. 형님’하며

고개를 숙였고,


8004는

여전히 눈치를 보며

둘을 따라 같이

‘왕’에게 고개를 숙였으며,


3377 할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재성도

가만히 분위기를 보다가

맨 나중에 수저를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교도소에서의 첫 식사는

생각보다 꽤나 맛있었다.


밥을 먹고 나서도

아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조용한 분위기가

점호 때까지 계속되었다.


생각보다 자유롭고

평온한 분위기에


재성은

어느 정도 마음이 놓여

서서히 긴장이 풀어졌다.


점호를 끝내고

잠을 자기 위해 자리에 눕자

5456이 다가와

안대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형님이 너 주란다.

편허게 푹 자라구...”


안대를 받아든 재성이

어찌해야할지 몰라

멍하니 쳐다보자


5456이 말했다.


"징역서는,

잠 잘때두 불을 안 꺼.


사고날깨비 소등을 안허구

밝기만 쬐끔 줄여주는디...


첨 오믄 그게 힘드니께...."


"아...."


그제야 재성이 깨닫자

‘왕’이 씩 웃으며 말했다.


“여기 다마가 좀 많이 밝어.


그러니께 적응될 때까진

안대허고 편허게 자.


얘기는

내일 운동시간에 허자.


자는 동안

아무 일두 읍을테니께

걱정허지 말구...


첫날 밤이라

낯설어서 힘들것지만,

그래두 잠들라구 노력해봐.”


생각지도 않았던

‘왕’의 자상한 배려에


재성은

교도소에 와서 처음으로

타인의 온기를 느꼈다.


재성은 고개를 숙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재성의 감사인사를 받자

‘왕’은 씩 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아무리 봐두

칼루 사람모가지 썰구 긋구...


그런 짓 헐 놈이 아닌 거 같은디...

거참...”


그렇게

청주교도소에서의 첫날이 끝났다.




그날 밤,

재성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충식과 종규와 당구를 치며

짜장면을 시켜먹던,


즐거웠던 작년의 이맘때쯤 일이

꿈에 보였다.





“나 정용상여.

내 이름은 들어본 적 있지?”


다음날 아침, 운동시간이었다.


재성을 데리고


자신들의 아지트로 보이는

담벼락 구석의 으슥한 곳에 간

‘왕’이

담배를 한 가치 내밀며 말했다.


5456과 7154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교도관이 다가오는지

망을 보고 있었다.


재성은

공손히 담배를 받아들고

열심히 대답할 말을 찾았으나,


떠오르는 건

오직 한 가지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모르겠습니다...


성함을 들어본 적이...”


자신의 이름을

정용상이라 소개한

7774의 사내가

약간 무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려?


허긴, 내가 고향 떠나

징역 산지두 벌써 5년째니께...

니가 모를 수두 있지.


아니지,

니 나이에 아는 게

더 이상한건가?


그럼 살무사는 들어봤남?

서문 살무사”


사내가 약간 부끄러운 듯

자신의 별명을 얘기하자


그제야 재성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서문 살무사,


자신의 고향에서

유명한 별명이었다.


재성이 살던 도시에는


조선시대에 축조된

성벽(城壁)의 흔적이

도시 주변에

유적처럼 드문드문 남아있었다.


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북문(北門)을 남기고

나머지 세 곳의 성문은

모두 사라졌지만,


조선시대부터

도시의 동서남북으로

성문 주변에 조성된 동네엔

여전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사내가 얘기한

‘서문’이라 함은


바로 지금은 사라진

옛 성벽의 서문(西門) 앞,


이젠 흔적만 조금 남아있는

서문 성벽 근처의 동네를

말하는 것이었다.




재성이

한창 싸움을 하고 다니던

중학교 때에도,


‘서문 살무사’라는 별명은


마치 도시전설처럼

동네 불량배들에게 회자되는

유명한 이름이었다.


혼자서 12명을

발차기만으로

모두 보내버렸다느니,


칼 두 개를

귀신같이 쓴다느니,


한 번 뛰면

어른 키 만한 높이를

훌쩍 뛰어넘는다느니,


충청도 일대에선 싸움으론

당해낼 사람이 없다느니,


어렸을 때부터 기차를 타고

여기저기 원정을 다니면서

한 번도 진적이 없다느니 등등


무슨 무협지에나 나오는

주인공처럼


‘서문 살무사’에 대한

황당한 무용담은


도시 곳곳에

실체가 없는 유령처럼

무수히 퍼져있었다.




그 별명의 주인공이

진짜 있었다니...


재성은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으나

하도 많이 들어서 친숙한,


‘서문 살무사’의 실체를

천천히 바라보며 입을 열였다.


“들어봤습니다...


충청도 일대서는

아무도 당할 사람이 없었다는,

시라소니 같은

엄청난 싸움꾼이시라구...


저 어렸을 때부터

그 별명 들어봤습니다.


서문...살무사...”


재성이

무척이나 긴장한 얼굴로 말하자


사내는 피식 웃으며

담배를 물고 불을 붙여

한 모금 빨아들이더니

맛있게 연기를 토해냈다.


사내가 라이터를 내밀며 말했다.


“시라소니는 무슨...

담배나 태워라.”


재성이 담배를 물자

사내가 불을 붙여주었다.




이게 도대체 얼마만의 담배인가...


재성이

목구멍을 깔깔하게 만드는

행복감에 잠시 젖어있을 무렵,


망을 보던 두 사내가 다가왔다.


“간수들,

목공방 쪽으로 갔습니다. 형님.”


“그려, 고생혔따.

얼른 담배들이나 태워.”


두 사내는

‘고맙습니다. 형님’하며

고개를 숙인 뒤,


사내가 내민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받아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여기, 얘들허구두 인사혀,


얘는 장현수라구

우리 동네 직속 후배니께

너헌티두 고향 선밸꺼구,


얘는 온양서

칼잽이루 유명헌 놈여.


김형철이라구, 현수 친구여.


너헌티는

둘 다 한참 선배니께

인사 지대루 올려.


앞으루 너

여기서 생활 헐 때

이것저것

많이 도움 받을테니께 ”


장현수라는 사내는

덩치가 컸던 험상궂은

5456번,


김형철은 7154번을 단

날카로운 눈빛의

깡마른 사내였다.


재성은

얼른 허리를 깊이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김재성이라고 합니다.”


“알어...

아직 스물밖에 안됐다믄서...


사건나기 전엔

우시장서 경비 섰구...


복싱 오래 했다매?”


인사를 받은 장현수가 말했다.


재성은

고개를 숙인채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지?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데?


“복싱...


그랬구만...


어쩐지

날렵허게 생겼다 했더니...

잘 치게 생겼네.”


김형철이

위아래로 재성을 훑어보며

한마디 거들었다.


“올해 스물이믄...

58년 개띠구먼,


내가 해방둥이니께

나랑은 열세 살 차이구...


현수랑 형철이랑은

띠 동갑이네...


동생이 아니라 조카뻘이구먼.”


정용상이 웃으며 말했다.


고향과 멀리 떨어진

청주교도소에서

고향사투리를 들으니


어쩐지 재성은

마음이 무척이나 편안해졌다.


재성도

반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렇게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들.”


재성이 다시금 허리 숙여

공손하게 인사하자

셋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용상이

마지막 한 모금을

깊이 들여 마시고

연기를 길게 내뱉으며 말했다.


“이제 대충

족보는 정리된 거 같구...


근디, 재성아,


니가 진짜

박무석이 모가지 땄냐?”


“.....”




재성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재성을

유심히 바라보던 정용상이

다시 말했다.


“너무 그렇게

대놓구 불편허다는 식으로

표시내지 말어...


우리가 무슨 형사두 아니구,


그냥 실제루 너 보구서

안 믿어져서 그런 거니께...


나두 따지구 보믄

박무석이 땜에

여기서 이 꼴루 이러구 있는겨...


니가 안했으믄,

나가서 내가 했을껴 아마...”


정용상의 말에


재성은 둘 사이에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용상의 말을 듣고 있던

장현수가 끼어들었다.


“형님은 이제

출소까지 일 년밖에 안 남으셨어.


그래서 나가시자마자

그 새끼 모가지 따버린다구

한참 벼르구 계셨거든...


근디 갑자기

그 새끼가

칼 맞아 뒤졌다는 얘기를


접견 오신 형수님헌티

얼마 전에 들으신겨.


그것두

족보가 있는 건달두 아닌

한참 어린애한티 당했다구...


그래서

재성이 니가

여기루 온다구 들었을 때


성님이

너를 많이 궁금해허셨어...


그 새끼허구 우리가

사연이 좀 많거든,


안 좋은 쪽으루다가...


그러니께

그렇게 너무 경계허지 말어.”


장현수의 말투엔

구수한 진솔함이 묻어났다.


재성은

순간 마음이 흔들렸으나,

아직은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재성은

‘재판 때처럼’

천천히 대답했다.




“...그 새끼가...

제가 좋아했던 누나를

강간했어유...


누나는 그 충격으루

정신이 이상해져서

비오는 날만 되믄 밖에 나가더니...


폭우가 쏟아지던 날

사고루 죽었어유.


저랑 형제처럼 지내는

동생 누난디...


그 새끼 땜에

그 동생네 가족은

완전히 망가졌어유.


어머니는

누나 죽던 날 쓰러지셔서

아직두 깨어나질 못하시구...


그래서 그 동생이

그 새끼 죽여버린다구 찾아갈 때

같이 간 거여유.


누나 죽을 때,

제 책임두 있었거든유...


근디

그 새끼가 칼을 꺼내더니

제 동생을 죽일 듯이 때리구,


저랑 같이 간 또 다른 동생이랑

둘이 뜯어 말리니께


우리두 다 같이 죽여버린다구

막 날뛰다가

저희랑두 싸움이 붙었는디...


저랑 엎치락뒤치락허다가

먼가 느낌이 이상허더라구유...”


재성이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어렵게 끝을 흐리자


장현수는

재성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토닥여주었고,


정용상은

말없이 담배 한 가치를 더 내밀었다.


재성이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담배를 입에 물자,


불을 붙여준 정용상이

자상한 말투로 위로를 전했다.


“...어쩐지

그림이 먼가 이상하다했더니...


남헌티 말허기 힘든

사연이 있었구먼...


근디 재성아,

그 새낀 사람이 아녀...


니가 죽인 건

사람이 아니니께

그렇게 너무 자책허지 말어...


아니,

자책할 필요가 아예 읍서.


언제 죽어두

남의 손에 뒤질 놈이었으니께.


그냥 미친개 한 마리가

갑자기 달려들어서

어쩔 수 읍이

죽여버린 거라구 생각혀.


스물밖에 안됐으믄

한참 젊은 나인디

증말 안타깝네...


재성이가 운이 없었구먼.”


장현수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 미친 새끼가

아무리 망가졌어두

어린애들한티 당할 만큼

만만한 놈이 아니었는디...


이제야 이해가 되는구먼유...


에휴,

살믄서 그런 새끼랑

아예 엮이질 말으야는디...


재성이가 재수가 읍었네유.”


둘의 따뜻한 위로에

재성의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 울컥한 것이 올라왔으나,


재성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만 피웠다.


운동장 쪽을 살피고 있던

김형철이 말했다.


“형님,

간수들 옵니다. 그만 가시죠.”


넷은 태연한 표정으로

다시 운동장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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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제 2 장 악연 (17) 22.07.07 63 0 14쪽
33 제 2 장 악연 (16) 22.07.05 42 0 11쪽
32 제 2 장 악연 (15) 22.06.30 45 0 10쪽
31 제 2 장 악연 (14) 22.06.28 42 1 10쪽
30 제 2 장 악연 (13) +1 22.06.16 63 2 13쪽
29 제 2 장 악연 (12) +1 22.06.16 48 2 10쪽
28 제 2 장 악연 (11) +1 22.06.15 46 2 10쪽
27 제 2 장 악연 (10) +1 22.06.10 65 2 14쪽
26 제 2 장 악연 (9) +1 22.06.07 56 3 12쪽
25 제 2 장 악연 (8) +1 22.06.05 65 1 17쪽
24 제 2 장 악연 (7) 22.06.04 48 1 11쪽
23 제 2 장 악연 (6) 22.06.02 53 2 9쪽
22 제 2 장 악연 (5) 22.06.01 54 2 11쪽
21 제 2 장 악연 (4) 22.05.31 52 3 10쪽
20 제 2 장 악연 (3) 22.05.28 61 3 14쪽
» 제 2 장 악연 (2) 22.05.26 58 3 11쪽
18 제 2 장 악연 (1) 22.05.25 67 3 10쪽
17 제 1 장 세 명의 소년 (17) +1 22.05.24 87 4 9쪽
16 제 1 장 세 명의 소년 (16) 22.05.23 69 4 11쪽
15 제 1 장 세 명의 소년 (15) +1 22.05.20 71 4 10쪽
14 제 1 장 세 명의 소년 (14) 22.05.19 66 2 9쪽
13 제 1 장 세 명의 소년 (13) 22.05.18 68 2 9쪽
12 제 1 장 세 명의 소년 (12) 22.05.18 65 2 12쪽
11 제 1 장 세 명의 소년 (11) 22.05.17 69 3 11쪽
10 제 1 장 세 명의 소년 (10) 22.05.17 69 4 9쪽
9 제 1 장 세 명의 소년 (09) 22.05.16 78 3 10쪽
8 제 1 장 세 명의 소년 (08) 22.05.16 75 2 9쪽
7 제 1 장 세 명의 소년 (07) 22.05.13 81 2 10쪽
6 제 1 장 세 명의 소년 (06) 22.05.13 87 2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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