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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두 번째 -파천(조선, 1596)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2.29 16:07
최근연재일 :
2022.07.06 20:09
연재수 :
221 회
조회수 :
38,599
추천수 :
340
글자수 :
758,510

작성
22.07.01 19:05
조회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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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1쪽

제 4 부 개화(開花) (113)

DUMMY

-47-


원적암에서 금강굴로 출발한

유정은 승병들을 이끌고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그가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뒤를 따르던 승병들이

하나둘씩 낙오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들이 호흡을 회복할 때까지

몇 번 기다려도 주었으나,


마음이 급해진 유정은 그들에게

최대한 빨리 따라오라 말하고

혼자서 먼저 뛰어나갔다.


그의 마음이 급해진 것은,

갑자기 시작된 산불 때문이었다.




원적암에서 금강굴까지의 길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그리 멀지는 않았으나

산세가 무척 험한 길,


또 하나는

시간은 두 배 이상 걸리나

평탄하고 쉬운 길.


유정의 선택은

당연히 험하고 빠른 길이었다.


봉우리의 정상에서

조금만 아래로 내려가면

금강굴이 있는

반대편 길을 택한 것이다.


그렇게 험한 길을 택해

열심히 달리던 유정의 눈에

갑자기 산짐승들이 날뛰는

광경이 들어왔다.


산새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날아가고

노루와 멧돼지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얼마 후,

독하고 매캐한 연기가

유정의 코를 찔렀다.


엇, 이 냄새는 설마...


이상을 느끼고

잠시 걸음을 멈춘 유정은

바람을 타고

산 아래로 휘몰아치는

강한 화마를 보았다.


'저 불이 시작된 곳은

금강굴 방향이다.


적들이

굴 안에 불을 지른 것인가?

큰일이다. 모두가 위험하다.'


그렇게 판단한 유정은

자신이 태어난 이래

가장 빠르고 급하게

산을 내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금강굴이 있는 봉우리 정상에

유정이 다다랐을 때에,

그의 뒤를 따라잡은 동료들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유정은 그제야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몸집이 해일처럼 커진 불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산의 모든 것을 잡아먹고 있었다.


다행히 바람이 아래를 향해

강하게 불고 있는 덕에

금강굴 근처는

아직 안전해보였으나,


그것도

시간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인력으로는 감당이 안될 만큼

거대해진 화마는,

산의 모든 것을 태울 때까지

절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불의 본질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바람이 사람을 도와줄 때,

한시라도 빨리 금강굴로 가야한다.


지금 동지들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지금은 사람의 친구인 저 바람이

어느 순간부터

불의 친구로 돌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결심한 유정이

금강굴로 다시 뛰려할 때,


산 아래쪽에서 급히 올라오는

두 사내와 맞닥트렸다.


두 사내는,

곽재우와 삼랑이었다.




유정을 발견한 곽재우의 얼굴이

일순 난감하게 변하고,


검은 두건 안에서 고요히 빛나던

삼랑의 두 눈엔

독한 살기가 어렸다.


난감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긴

유정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자신의 앞에

저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이미 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다만 두 사내와 유정의 분노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유정의 분노는

적이 아닌

자신을 향했다는 것이리라.




'내가...내가 결국 늦었구나...


죽어간 다른 동지들이나

금강산 어르신처럼,


굴 안의 사람들마저

난 또 구하지 못했구나...'


오늘 밤,

생사의 기로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중요한 때를

몇 번이나 놓쳐버린 유정이,


스스로를 깊이 원망하며

하늘을 향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는

자책의 감정이 진하게 묻어나왔다.




그때, 곽재우가 입을 열었다.


"스님,

우리를 그냥 보내주실 수 없겠소."


곽재우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으나,


자책감으로

마음이 무너져가고 있던

유정의 귀엔


곽재우의 말은

분노를 일으키는

불씨밖에 되지 않았다.


불법을 수호하며

항상 온화한 눈빛으로

세상만물을 대하던 유정의 눈빛이

엄청난 분노로 이글거렸다.


곽재우에게 대답을 하는 대신,


유정은 번개처럼 몸을 날려

그의 급소를 향해

매섭게 손을 뻗었다.




헉.


느닷없이 날아온 유정의 살초에

깜짝 놀란 곽재우가

급히 뒤로 몸을 피하고,


그 둘의 사이로

삼랑의 월참이 끼어들었다.


삼랑의 단도 두 자루가

유정의 목과 허리를 노리며

날아들자,


유정이 날쌔게 도약하여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공격을 피해냈다.


유정이

땅에 착지하는 순간을 노려

삼랑의 월참이

그의 가슴팍으로 향하자


유정이 양팔을 들어

삼랑의 칼을 막아냈다.




퍽.


팔로 칼을 막는다는 것부터

이상했지만,


살점이 베어지는 소리가 아닌

무언가 둔탁한 소리가 나자

삼랑은 그제야 깨달았다.


유정은

양팔에 모래가 가득 들어찬

보호대를 차고 있었다.


김태균이 선물한 그 보호대는,


소가죽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아주 튼튼한 것이었는데,


유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보호대 안에

모래를 담을 수 있도록

김태균에게 개량을 부탁했다.


본시 개량의 용도는

수련을 위한 것이었는데,


오늘 밤의 실전에서 유정은

그것을 공격이든 방어든 간에

아주 유용하게 써먹고 있었다.


삼랑이 뒤로 한 발 물러나며

신중하게 간격을 잡았다.




'저 자의

양 팔뚝뿐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 양쪽 정강이에도

똑같은 것을 차고 있겠지.


갑주의 빈틈을 노리듯

정밀하고 예리한 공격을

최대한 빠르게 날려야 한다.


책사의 말대로 시간이 없다.


다른 놈들이 더 몰려오기 전에

저 중을 죽이고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판단을 마친 삼랑이

특이한 자세를 잡았다.


왼팔은 앞으로 내밀고

오른팔은 가슴 아래로 내렸다.


초승달모양의 단도 두 자루가

하나는 유정의 눈을 향해,


또 하나는 어디를 향할지 모르는

미묘한 자세로 변했다.




그때,

곽재우가 다시 또 입을 열었다.


"스님, 이러지 마시고, 제 말 좀..."


"문답무용!"


유정이

곽재우의 말을 단칼에 자르고

삼랑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유정의 왼손이

삼랑의 얼굴을 향해

먼저 날아가고


바로 연결하듯

오른손이 곧고 빠르게

같은 곳으로 날아갔다.


삼랑이

앞으로 내민 왼손을 휘둘러

유정이 내지른

두 개의 주먹을 쳐내고,


아래로 내렸던 오른손을

빠르게 휘둘러

유정의 허리를 노렸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공격이

유정의 발끝에서 비롯되었다.




뻑!


삼랑의 다리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개의 주먹이

다시 되돌아감과 동시에,


유정이 선택한 것은

방어가 아니라

공격이었던 것이다.


유정의 왼쪽 다리가

삼랑의 오른쪽 허벅지를

강하게 후려쳤다.


적의 오른손에 들린 칼이

자신의 허리에 닿는 간격보다,


자신의 다리가

적의 허벅지에 닿는 간격이

더 길다는 것을 이용한

절묘한 공격이었다.




"크윽..."


두 번도 아닌

무려 세 번의 연속기가,


그것도 위와 아래로

손과 발을 모두 이용해

들어올 것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삼랑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유정의 체중에

모래의 무게까지 실린 발차기는

순간적으로

삼랑의 다리에 마비를 일으켰다.


잠깐 동안 움직임이 멈춘 적을

유정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유정의 몸이

빠르게 한 바퀴 돌면서

보호대가 묶인 오른쪽 팔뚝이

삼랑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회전력까지 실린 유정의 공격은,

막기엔 너무 사납고

피하기엔 너무 가까운 간격이었다.


그러나 삼랑도 만만치 않았다.


저 회전공격을 얼굴에 맞으면

그대로 끝날 것이라 판단한 그는

아예 방어를 포기했다.


삼랑은 미련 없이

두 자루의 월참을 버리고

몸을 아래로 숙인 채

앞을 향해 재빨리 몸을 날렸다.




엇?


칼까지 버리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을 보자,

유정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던 것이다.


달려든 삼랑이

유정의 허리를 양팔로 감싸 안고

그대로 밀어 넘어트렸다.


방금 전까지 서로를 바라보며

팽팽하게 대치하던 상황은


순식간에 서로의 몸이 뒤엉켜

땅바닥에 뒹구는 상태로 변했다.


이런 식의 싸움을

경험한 적이 없는 유정은

정말 많이 당황했다.


엎치락뒤치락 뒹구는 사이

어느덧 삼랑이 유정의 위로 올라가

그를 타고 앉는 모양새가 되었다.


삼랑의 체중에 허리를 제압당하자

유정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상대의 움직임을

확실히 제압한 삼랑이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흑랑의 살수들이

항시 10개정도씩

몸의 어딘가에 상비하고 다니는

독수였다.


여인네들이 쓰는

은장도 정도 크기의

비수를 빼든 삼랑이


유정의 목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날렸다.




아...이젠 끝인가.


유정의 머릿속에

절망적인 생각이 확 떠오르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컥!"


그러나 잠시 후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유정의 입이 아니라

삼랑의 입이었다.


'응? 뭐지?'


이상함을 느낀 유정이

다시 눈을 뜨고 상황을 살폈다.


자신의 허리를 깔고 앉은

적의 가슴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밑에 깔린 유정의 눈에

적의 명치를 뚫고나온 칼끝이

다시 몸 밖으로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삼랑의 등 뒤에서

칼을 찌른 것은 곽재우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에게

급소를 당한 삼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곽재우를 바라보았다.


곽재우가

여러 개의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랑의 입이 힘겹게 열렸다.


"이...이...배신자...


우리가 누구...때문에...

오늘...이곳에서...

피를 흘렸는데..."


삼랑의 분노를

오롯이 받아들인다는 듯,

곽재우가 마지막 말을 전했다.


"정말...정말 미안하오...삼랑...


내가 죽을 때까지,

오늘을 절대 잊지 않겠소.


평생 동안,

내가 눈을 감는 날까지

동지들에게 속죄하며 살아가리다."


"개소리 마라!!!

이 씨발 새끼야!!!"




쉭!


삼랑의 거친 욕설과 함께,


곽재우의 칼이

날카롭게 허공을 그었다.


곽재우의 칼에 잘린

삼랑의 머리가

그의 몸에서 분리되어


밑에 깔려 있는

유정의 가슴으로 툭 떨어졌다.


자신을 구하러 온 동지의 목을

자신의 손으로 자른 곽재우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유정의 몸을 깔고 앉아있던,

머리가 없어진 삼랑의 몸이

서서히 옆으로 넘어갔다.


흑랑의 마지막 생존자는,


그렇게

자신이 구하러 온 동지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잠시 후,


삼랑의 잘린 머리를 들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유정에게


곽재우가 울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그래서...

그렇게 내 말 좀 들어보시라고...

그렇게...얘기를 했는데..."


곽재우의 회한서린 말에

유정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의 뒤로

뒤쳐졌던 동지들이

속속들이 합류했고


바로 얼마 후엔

가쁜 숨을 내쉬며

김태균과 류현진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산대사가

숲을 뚫고 그 자리에 도착했다.


그들 모두는,

이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달빛이 무심하게

그들의 등을 비췄다.


서쪽 하늘에서

서서히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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