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셔가 그린 펜로즈의 계단, ‘상승과 하강' 입니다. 펜로즈 부자가 고안한 ’불가능 모양'의 하나라고 합니다. 즉,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모양' 입니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모양이라면, 마인드루프 안에서는 쉽게 만들볼 수 있겠네요? 물론 그렇지만, 이 모양과 이 그림이 잘 알려진 만큼 조금은 식상해진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이미지를 그대로 한 회차의 배경으로 쓰기보다는 컨셉과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제가 받았던 ‘인상' 을 글로 풀어 써 볼까 생각을 했습니다.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에셔의 원래 의도일 ‘불가능성의 현실화' 보다는, 고개를 숙인 채 끝도 없이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에서 느껴지는 ’집단으로서의 삶의 무한함, 또는 무의미함' 이 저를 압도했었습니다. 영원히 바위를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는 시지프스도 생각났구요. 치열하지만 무한한, 그리고 허무한 삶.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이런 생각들 중에 <나인스카이즈>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의 작명을 하기도 했답니다 :) )
그림의 제목은 ‘상승과 하강(Ascending and Descending)’ 이지만, 이 그림의 세계에서는 본질적으로 상승도 하강도 없습니다. 상승을 선택하든 하강을 선택하든 자유지만, 계단을 올라가든 내려가든 결국 제 위치로 다시 돌아올 뿐이죠. 자유 속에 숨어 있는 구조적인 기만성이랄까, 그런 생각에까지 이르자 조금은 화가 나기도 하지만요. :)
우리 사회의 많은 조직이 이 ‘상승과 하강’ 구조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상승은 선이자 보상이고 목표죠. 하강은 악이자 벌이고 좌절이구요. 상승은 그 조직에서 ‘일'하는 인간의 동기유발이 되기도 하고, 그 일을 지속가능한 것으로 유지해 주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조 하에서 일하다 보면 조직 뿐만 아니라 인생 자체를 상승과 하강 구도에 맞추는 오류에 종종 빠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조직에서 상승의 단맛에 취해 있다 보면 하강이 두려워지고, 그 두려움 때문에 일을, 삶을 멈추기도 합니다. 그리고 좌절하지요. 이 경우, 그 좌절은 사실 하강 때문이 아니라 멈추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인데도 불구하고요.
그렇게 2차원이고, 2차원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대요, 우리 삶은 -- 에셔가 그린 펜로즈의 계단처럼. 2차원에서 끝도 없이 살다 죽다를 반복하는 우리를, 그는 그린 거죠. 현재를 즐겨라, 카르페디엠? 개소리예요. 내버려두면 가능한 것은 반복밖에 없어요.
그게 좋아할 일, 안심할 일인가요? 여기 우리가 있는 곳이 2차원이라는 게? 평생토록 변하지 않고, 공간에, 세상에 어떤 의미도 영향도 없이 산다는 게?
당신이 한 축을 잃은 것처럼, 나는 시간이라는 축을 잃었어요. 다른 차원에서 살고 싶나요? 잃어버린 당신의 축을 찾아와서, 당신이 존재하는 이 평면에 찔러 넣어요. 2차원 계단 위에 무수히 존재하는 당신 가슴 속 깊숙이. 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절대로 흔들리지 않게 말이예요. 당신이 안되면 가슴 속 핏방울들이라도 우리가 모르는 차원, 세계, 공간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해 줘요. 당신이 당신의 세상을 점유하게, 차지하게 해요.
제발, 제발 이젠 이 계단을 그냥 걸어가 버리지 말아요. 나는 아직 포기 안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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