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적 개연성
원래대로라면, 한참 뒤에나 찾았을 단서였다.
하지만 재진은 내 말에 힌트를 얻고선, 이때까지의 피해자들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피해자들의 모든 소지품이 다시 빛을 보았다.
그래서 얻은 결론.
“이게···. 일부러 그런 거라고?!”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허 참···. 허!”
재진은 허탈한 듯 보였다.
하지만 반장은 껄껄 웃으며 재진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용케 찾아냈네. 역시!! 김재진이야!!”
보고는 둘이 했으나, 공로는 재진에게로 돌아갔다.
재진은 손사래를 치며,, 윤 형사가 먼저 발견한 거라며 했다.
하지만 반장의 눈엔 겸손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는 마지못해 내 어깨도 두드렸지만, 관심은 온통 재진에게 있었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렇지. 하루 이틀 아니잖아?]
맞아. 익숙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좋은 건 아니지.
[흠. 조연은 조용히 성격 죽이고 살면 좋을 것 같은데···.]
항상 그렇게 살아왔어.
뭐 하나 특출난 거 없이 무난무난하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삶이었으니까.
[계속 그런 텐션을 유지하는 건 어때?]
그 잘난 네 이야기를 위해서?
[음···. 그렇다고 하면 좀 재수 없으려나?]
많이 없지.
[아니라고는 안 할게. 하지만 그거 하나만 알아둬. 작가 특례를 받고 있는 건 오로지 너 하나라는 것을 말이야.]
낄낄 웃는 작가의 웃음소리가 음흉했다.
재진과 나는 자리에 돌아왔다.
재진은 내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영 신경 쓰여, 먼저 물었다.
“뭐 이새끼야. 왜 그러는데?”
“아니···. 반장 저 자식은 왜! 내 말은 안 듣고!!”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늘 같은 패턴이었다.
나도 인간인데 서운한 게 없을 리 없다.
하지만 재진은 늘 그런 내 속내를 잘 알았다.
“됐거든!”
“미안하다야···. 내가 미안해할 건 아닌데···. 그래도 미안하다.”
“지랄한다.”
저라고 좋아서 그러겠는가.
주인공인 게 문제지.
모든 관심이 그를 향했고, 모든 스토리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난 내 처지를 알았다.
죽기 전에도, 죽은 이후에도.
비록 화려하지 못한 삶이어도, 난 내 중심을 잘 지키면 됐다.
그게 내 방식이었다.
“아 진짜 반장···. 아오···.”
“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
겉옷을 챙겨입었다.
재진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 날 따라나섰다.
/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집에 오니 온몸이 녹초가 되었다.
하지만 작가는 날 가만두지 않았다.
[회의를 좀 하자.]
“뭔 회의.”
[이야기가 지지부진해.]
“그거야 네 문제지. 왜 날 귀찮게 해.”
[보이스피싱 당해서 전 재산 홀라당 날려봐야 정신 차리지?]
그 한마디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소파에 가지런히 앉으며 투덜거렸다.
“여행 가는 거 안되면, 건물 사는 건 되냐?”
[로또 당첨금 가지고?]
“응.”
[음···. 조금 과한데···.]
“아. 건물주는 안돼? 그럼 집주인이라도 시켜주면 안 되냐? 아니! 애초에 내 통장에 들어온 돈인데 그거까지 허락 맡아야 해?”
[그럼. 그 돈 내가 줬잖아.]
“아오 진짜···. 노예계약이야.”
[음. 비슷하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머릿속에서 작가의 말이 계속 들리는 이상, 난 이 남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뭐! 뭘 원해!”
[다음 화부터 송채은을 내보내야겠어.]
“버···. 벌써?”
[응.]
내가 송채은을 처음 만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일 년 전으로 회귀한 지금의 나는 송채은과 접점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벌써 그 여자를 만나기엔, 너무 빨랐다.
“왜? 왜 벌써 그 여자를 움직여?”
[말했잖아. 이야기가 늘어진다고. 이러려고 리메이크 하는 게 아닌데···.]
“그러니까 네 말은 우리가 죽을 시기를 더 빨리 앞당기겠다는 거야?”
초조해졌다.
방학 숙제를 하나도 안 한 채로 개학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말은 제대로 해야지. 우린 지금 고구마 오백 개 먹은 엔딩을 피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
[사이다도 뭐가 있어야 사이다가 되는 거 아니겠어?]
“흠.”
작가의 말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야. 작가.”
[왜.]
“그···. 이왕 리메이크를 하는 거, 확 바꿔보는 건 어때?”
[확 바꿔? 어떻게?]
“날 형사 말고···. 송채은과 가까워질 수 있는 인물로 만들어줘.”
[오. 싹 다 뜯어고치자?]
“응. 연쇄 살인마 박유철에게 수갑을 채울 형사는 김재진 하나로 충분한 것 같아. 굳이 내가 없어도···.”
흐려지는 내 말꼬리에 씁쓸함이 묻어있던 걸까.
작가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새끼···. 아직도 꽁해있냐?]
“시끄러.”
부정한다 한들, 한낮 조연인 나는 작가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어쩌면 지금 이 제안 역시 그의 뜻일지도 몰랐다.
[좋아. 그럼 이렇게 된 거 확 뜯어 고쳐봐?]
“좋을 대로.”
[재밌겠다! 그럼 내일 아침부터 해 보자. 잘 자라. 내일부터는 바빠질 테니.]
그때 알았어야 했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음을.
/
“윤 형사!! 뭐야!! 어떻게 된 건데?!!”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출근했다.
재진은 날 보자마자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관두긴 왜 관둬!!”
작가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사표를 던진 모양이다.
조금 당황스러운데.
[형사 말고 다른 거 하고 싶다며?]
아니 그렇긴 한데···.
[너 이 자식. 부럽다 진짜! 내가 쓴 캐릭터지만···. 진짜 부럽다.]
뭐가 그렇게 부러운 건데? 나도 좀 알자!
[건물주 되고 싶다며!]
헐. 미친. 진짜?
[어. 진짜. 완전 진짜.]
재진은 아무말 않는 날 흔들며, 닦달하기 시작했다.
“뭔데 진짜! 무슨 바람이 들어서 그러는 건데?!!”
무슨 바람이 들었다기보단,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다.
하지만 받은 것이 있으니, 일을 해야 할 터.
“그냥. 너무 피곤해서 그만하려고.”
“야 이 자식아! 그런 게 어딨어!!”
“캐릭터가 겹치니까, 이편이 나을지도 몰라.”
“대체 뭔 소릴 하는 거야?!”
“이렇게 그만둬서 미안하긴 한데···. 하나만 알아줘라.”
한껏 무게를 잡으니, 내 손발이 없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재진은 몹시도 진지했다.
“아니 이유도 없이! 너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너 혹시 어제 일 때문에 그러는 거면···.”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좁디좁은 내 속마음은 둘째치고, 나와 작가에겐 할 일이 있었다.
주연 김재진과 조연 윤지혁을 살리는 것.
연쇄 살인마 박유철과 그 가담자 송채은을 잡는 것.
“죽지 마라.”
“뭐?”
“무슨 일이 있어도 박유철을 꼭 잡아. 송채은 보다 네 목숨을 먼저 챙겨야 해.”
“너 대체 무슨 소릴!!”
“알았어?”
재진은 말문이 턱 막힌 듯했다.
당황스러울 테지만,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그리고! 내가 뭐 어디 영영 떠나냐?!”
“그럼···.”
“어휴. 병신새끼. 영화 찍고 있네! 작작 하지?! 닭살 돋거든?”
영화가 아니라 소설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표를 썼지만, 그것이 포기를 뜻하는 건 아니었다.
조연은 주연에 가려져 빛을 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난 조금 더 깊은 어둠 속을 택하겠다.
시선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와 내 목숨을 구할 것이다.
[좋은 자세야.]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
한 달간의 인수인계가 있었다.
재진은 지치지도 않고 날 설득했다.
하지만 난 마음을 돌릴 생각이 없었다.
[왜냐면! 증여처리 끝난 번듯한 12층짜리 오피스텔이 네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지!!]
“아오. 진짜. 그런 거 아니거든?!”
[아 뭐야. 건물주 되고 싶다며?]
“아 그렇긴 한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흠. 김빠지네.]
오늘로써 조연 윤지혁은 동료 형사가 아니라, 재진의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형사로써의 커리어가 아깝지 않냐하면,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하지만 불로소득의 꿈은 명예보다 달콤했다.
이래서 내가 조연인가 보다.
속물적인 캐릭터는 정의감 넘치는 주연 자리에는 안 어울리니까 말이다.
[뭐 꼭 그렇게까지 비하할 거 있나.]
“아니라고는 안 하네.”
[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미래를 알고 있는 내가 재진의 옆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미래를 바꾸려면, 과거부터 바꿔야 했다.
그래서 이 오피스텔이 내 것이 된 것이다.
“송채은은?”
[곧 올 거야. 계속해서 말하는데, 너 막 개연성 깨는 짓 하면 진짜 큰일 난다?!]
“아 거참. 알았대도 그러네.”
[지금 이 이야기가 픽션이라는 건, 딱 너만 알아야 한다고!]
요즘 들어 부쩍 잔소리가 늘었다.
귀를 후비적대며, 노상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번화가 한복판에 자리 잡은 오피스텔.
그 건물이 내 것이란다.
근데 그 건물에 여자 주인공 송채은이 살고 있단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야. 작가.”
[왜.]
“근데···. 일개 형사가 로또 맞아서 12층짜리 오피스텔을 소유하는 건 개연성에 맞냐?”
[어···? 응? 어음···.]
내 질문에, 작가는 당황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이때다 싶어 질문을 쏟아부었다.
“로또 당첨이야 운이니까 그렇다 쳐. 근데 2주 간격으로 당첨된 것도 모자라, 그 당첨금을 주식에 넣어 더 불렸다? 등락 변덕이 심한 바이오 종목으로?! 기깔나게 타이밍 잘 맞춰서 돈을 다섯 배로 불렸다? 이게 말이 돼? 이건 개연성에 안 어긋나나?”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췄다.
무선 이어폰이 아니었다면, 혼잣말하는 미친놈처럼 보였겠지.
[거기에 개연성을 붙이는 게 내 역할 아니겠냐! 그리고! 나는 로또까지만 손댔다? 주식은 네가 하자며. 하여튼!! 회귀하면 다들 이렇게 주식에 목을 매요! 그냥 좀 어! 적당히 있으면 될 걸 가지고! 뭐 그렇게 투자 못 해서 안달들인가 몰라.]
“다들이라니? 나 말고도 누가 또 있어?”
[어? 아니아니. 신경 쓰지 마.]
“신경 쓰지 말라니까, 더 신경 쓰고 싶은데.”
[야야!! 저기저기!! 송채은 온다!!]
“너 일부러 지금 송채은 등장시키는 거지? 뭔데! 뭐냐고!”
[캬. 너도 팔자 폈지만, 송채은은 팔자 더 핀 모양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번지르르한 수퍼카가 오피스텔 앞에 섰다.
그 부티 나는 자태가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하···. 이건 좀 당황스러운데.”
[왜 그래. 내심 예상했을 텐데?]
“···. 그게 지금일 줄은 몰랐지.”
운전자석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연쇄살인마 박유철이었다.
그 누가 저 남자를 살인마로 볼까.
나조차도 저 남자의 행색이 어색했다.
[이왕 하는 거, 싹 다 뜯어고쳤지! 어때? 마음에 들어?]
“전혀.”
내가 알던 박유철은 별다른 직업도, 별다른 특이사항도 없는 평범한 남자였다.
억 소리 나는 스포츠카를 끌고 다닐 남자가 아녔다. 그가 보조석 문을 열었다.
그러자 또 하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여자 주인공 송채은이었다.
아니. 이제는 다르게 불러야 하나.
저 여자를 주인공으로 칭하면, 이 이야기는 또 고구마가 되어버릴 게 분명하다.
[음.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럼 이제부터 저 여자를 악역 2라고 부를까?]
“당연히 그래야지.”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두 남녀는 헤어지기 아쉬운 듯, 서로를 안고 애정행각을 했다.
내가 들은 바로는, 저 여자에겐 형사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얼른 들어가.”
“내일은 언제 올까?”
“점심 이후로.”
“알겠어. 오늘도 힘쓰느라 피곤했을 텐데 얼른 자.”
“응. 자기도.”
다정함이 흘러넘치는 연인의 대화.
두 연놈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에겐, 그 말이 퍽 소름 끼치게 들렸다.
박유철의 스포츠카가 굉음을 내며 떠났다.
송채은은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나 또한 그녀를 따랐다. 오늘부로 내 집 역시 이곳이니까 말이다.
엘리베이터 앞에 나란히 섰다.
난 커피를 한 모금 하는 척하다, 컵을 떨어뜨렸다.
뜨거운 커피가 바닥에 튀겼다.
송채은의 다리에도 튀겼다.
요즘 들어 부쩍 물오른 내 연기력을 발휘할 때다.
“헉!! 괜찮으세요?!!”
송채은은 잔뜩 짜증이 난 얼굴로 날 아니꼽게 보았다.
이제 시작이다. 이 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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