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은 채워야한다.
작가는 모든 걸 알고 있다.
로또 1등 한번 하는 것보다는, 로또 2등 여러 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내 속내도 알았다.
로또 당첨되면 전 세계 일주를 해보고 싶다는 속내도 알았다.
[안돼.]
“아 좀. 그 빡빡하게 굴지 말지?!”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일 잘하라고 로또 당첨시켜준 거지, 누가 너 여행가랬냐? 가긴 어디를 가?]
그는 잔뜩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게, 몇 날 며칠째 같은 실랑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 년쯤이야. 그거 뭐! 텍스트로 처리하시던가! 일 년 뒤. 요 세 글자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 아닌가?”
[아 거야 당연히 되는데! 갑자기 시간이 일 년 뒤로 뛰는데 이유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주인공 김재진의 활약에 뻘쭘해진 조연 윤지혁이는 우연히 로또에 당첨돼서 해외로 날랐다! 이렇게 하시던가요. 거참 작가 양반 답답하게 구네.”
작가의 한숨 소리가 깊었다.
[아 진짜···. 내가 만들었지만, 넌 진짜 또라이 새끼야.]
“또라이가 또라이를 낳았나 보지 뭐.”
[···. 아오. 진짜]
그에게 실체라는 게 있었더라면, 난 진즉에 한 대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게, 작가는 날 한시 빨리 출연시키고 싶어서 안달 난 상태였다.
[먹튀는 상도덕에 어긋나지!]
“왜 이렇게 날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야? 나 없어도 재진이는 잘하잖아.”
[네가 자격지심 가지는 건 잘 알겠는데, 그게 또 그렇게 생각할 게 아니라니까?]
자격지심. 결국은 그 단어가 나오고 말았다.
끝끝내 외면하고 싶었다.
재진은 주연이고, 나는 조연이다.
아무리 발버둥 친다 한들, 난 누군가의 들러리일 뿐이다.
어떻게 보면 목적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저 못된 작가는 나보고 목적을 가지라 한다.
[이유나 묻자.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재미없으니까.”
[뭐가 재미없는데? 내 이야기가?]
“네 이야기야 재진이가 있으니 재밌겠지. 재미 없는 건 따로 있어.”
[그게 뭔데?]
“내 인생.”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가는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그 웃음이 참 밉살스럽게만 들려 눈을 흘기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흘길 대상은 보이지 않았다.
[지랄 났네. 지랄 났어. 넌 지금 네 인생 최고의 기회와 순간 앞에서 투정 부리고 있는 거야.]
“내가? 투정을 부린다고?”
[그래 이 새끼야. 작가인 내가 캐릭터한테 하나하나 코치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이례적인 상황이라는 건 알았다.
비록 내가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작가는 나에게 모든 걸 말해주었다.
로또 당첨 따위는 우스워 보일 정도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적어도 스토리 속 조연인 나에게 그는, 신과도 다름없는 존재였다.
“몰라. 재미없으니까. 그만해. 귀찮아.”
[새끼···. 까탈스럽게 구네.]
“네 새끼잖아. 네 새끼 욕하고 싶으면, 그 재미없는 스토리 찍어내는 손가락이나 탓해.”
[와···. 이렇게 뼈를 때리나?]
“맞을 뼈나 있고?”
[아오. 진짜!!]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말투와는 달리, 작가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듯했다.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와의 조우.
뭐. 작가 입장에서는 재미있을 수 있겠다 싶었다. 관심 밖이었지만 말이다.
한참을 키득거리던 작가가 웃음을 멈췄다.
[좋아. 재미를 원해?]
“재미라기보다는···. 의미를 원하지. 간신히 구한 목숨, 제대로 쓰고 싶어.”
[다시 한번 죽기는 싫지?]
“말이라고···.”
[그렇게 불평불만이니, 그럼 네가 직접 해봐.]
“응? 뭘?”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되묻자마자, 시야가 밝아졌다.
조금 전까지 난 우리 집에 있었으나, 지금 난 고깃집으로 왔다.
재진이 내 앞에 있었다. 그가 잔을 부딪쳤다.
“너 요즘 이상하다? 왜 이렇게 정신을 놓고 살아?”
“뭐···. 뭐야!”
“뭐? 뭐가 뭐야?”
“···. 아오. 진짜.”
소주잔을 들이킨 뒤 걸쭉하게 욕을 내뱉었다.
[야. 뒷담은 안 보이는 데서 해라?]
안 보이는 데가 있냐? 내 머릿속까지 쳐들어온 널 피할 수 있는 곳이 있긴 있냐고.
[없지. 그러니까, 넌 내게 절대적인 충성을 해야 한단 말씀이지!]
지랄. 그딴소리는 스토리에 지분 많은 이 자식이랑 하시지?
[말했잖아. 주인공은 자기가 주인공인 걸 알면 안된다니까? 미쳐 돌아버린다고!]
그럼 나는?
[너는···. 괜찮아. 응. 괜찮아.]
뭔가 걸쩍지근한 말이었다. 재진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금세 채워진다.
재진은 다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야···. 윤 형사.”
“왜.”
“나 고민 있다?”
“엇 잠깐.”
“응?”
“자···. 잠깐!!”
황급히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빌어먹을!!
내 기억이 맞는다면 지금 이 장면은, 여주인공 송채은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빙고!]
이야기 갈아엎자며! 근데 왜 또 그 쌍년을 등장시키는 건데?
[음···. 네가 뭘 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소금 안 들어가는 요리 없다?]
사이다 패스인지 뭔지 그거 하자며!!
[응. 해야지 그거.]
“야. 윤 형사!”
“어?!”
“너 진짜 요즘 왜 그러냐···. 어디 아파? 이 중요한 순간에 지금!!”
멀티태스킹이 안 됐다.
머릿속의 작가와 말없이 이야길 나누니, 자연스레 재진은 뒷전이 되어버렸다.
재진은 날 미친놈 보듯 쳐다보았다.
[고구마 없이 사이다도 없다! 그게 바로 내 신념이다. 그거야!!]
“나 여자친구 생겼다.”
작가는 작가였다.
재진과 내 죽음에 일조할 악녀, 송채은.
그녀를 등장시키려는 작가의 노력은 정확히 먹혀들어 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정신 차리라며 재진을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그러기만 해봐! 맘대로 까불면 로또 맞은 거 보이스피싱으로 다 잃게 할 거다!]
그 한마디에, 내 얼굴에는 자본주의 미소가 떠올랐다.
“뭐 이새끼야?”
싱긋 웃으며 욕지거리를 하니, 재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미안. 그렇게 됐다.”
“너는 지금 어!!! 이 새끼 빠져가지고!!!”
참아보려 애썼지만, 결국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은 말 할 때 앉아라.]
9 곱하기 2는?
[십팔?]
응.
[개새끼···.]
나는 부처다. 부처다. 부처다. 오백 번 되뇌었다.
이미 송채은의 존재가 수면 위로 올라와 버리고 말았다.
재진이 여자친구가 생겼단 말에, 과거의 난 대뜸 예쁘냐고 물어봤던 것 같다.
하지만 난 송채은의 얼굴을 알았기에 궁금하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 둘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질문 한 가지를 던졌다.
“뭐 하는 여잔데?”
내 질문이 의외였던 걸까.
재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답지 않게 그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다.
처음 보는 반응이었다.
“사실···. 잘 몰라.”
“썸 타는 것도 아니고, 여자친구인데···. 뭘 하는지 모르신다? 사귀는 건 맞냐?”
“아 그건 맞거든?!”
그가 발끈했다.
왠지 모르게 그가 안쓰러웠다.
두 남녀의 결말을 아는 내가 보기엔, 재진 혼자만의 사랑이었다.
“헤어져.”
“뭐?”
“헤어지라고.”
진심에 정색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재진은 퍽 놀란 듯했다.
[흠. 열심히 긴 한데···. 그렇게는 안 될걸?]
대체 왜 안 되는 거지? 애초에 이 새끼가 그 여자를 안 만나면 되는 일이었잖아! 발암 캐릭터니까 그냥 빼버리는 건 어때?
[안될 건 없지만 재미없어. 그렇게 할 바엔, 그냥 예전 스토리 쓸래.]
뭐?
[약간 재미없는 거랑 많이 재미없는 거랑 고르라면···. 당연히 약간 재미없는 걸 골라야지. 네가 그렇게 스토리 자체를 없던 거로 할 거면, 차라리 예전 게 훨씬 나.]
등장인물들이 모두 다 뒈져버리는 그 이야기가 낫다고? 미쳤냐?
[좆 같든, 엿 같든, 병신같든! 어찌 됐든 만들어진 이야기잖아? 지금 네가 하려는 건 이야기를 없애버리는 거야. 그건 안 하느니만 못해. 분량은 채워야지 않겠어?]
돌겠네! 진짜.
[나도 돌겠다야. 잘 좀 해봐 그러니까.]
뭐 이렇게 제약이 많은 건지.
“너 요즘 진짜 이상해. 약간 정신 빠진 것 같달까? 툭하면 말없이 가만히 있고···.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다짜고짜 헤어지라니. 설명은 해줘야 할 거 아냐?”
머리가 지끈거렸다. 재진의 말도 옳았고, 작가의 말도 옳았다.
지금 이 모든 것들이 이야기의 한 흐름이라면.
난 흐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흐름의 방향을 바꿔야만 했다.
현재에 충실하며, 머릿속 작가와 협의 하에 이야기를 기존과는 다르게 진행해야 했다.
아주 좆 빠지는 작업이었다.
“얼마나 뒤가 구린 여자길래 뭘 하는지 이야기도 안 해? 볼 것도 없어.”
“그게 다 사정이 있어서 그래.”
“뭔 사정.“
“사실 그게···. 채은이가···. 좀 많이 예···.”
“병신새끼.”
재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욕부터 했다.
그러자 재진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예쁘거든?!!”
예쁘긴 개뿔. 그딴 여자가 예쁘면 미인 다 얼어 죽었게?
야. 작가. 캐스팅이 왜 그따위냐? 그 비주얼이 최선이었어?
[···. 어. 음···. 그게 다 복잡한 비즈니스 사정이 있어서···.]
돈 문제구먼? 예산이 없냐?
[···.]
열심히 떠들어대던 작가가 입을 다문 걸 보니, 내가 정답을 맞힌 모양이었다.
재진은 계속 고기를 구웠고, 난 갈증이 나 물을 벌컥 마셨다.
“아니 그게···. 채은이가 그 뭘 하는지 자세히 말 안 해주는 게 이유가 있어요.”
“뭔 놈의 이유.”
“연예인 생활을 하는 거 같아···. 아니 사실은 정확히 모르겠는데···. 인플루언서? 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처음 듣는 단어와 낯선 정보였다.
“뭐···. 뭔 서??”
“인플루언서.”
“그게 뭔데.”
“SNS로 유명해진 사람들 있잖아. 그런 유명인을 말하는 거야.”
“지랄. 요즘은 백수를 그렇게 표현하냐?”
“백수 아니라고!!”
이번에는 재진이 버럭버럭했다.
하지만 난 술잔을 채우며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알던 송채은은 편의점 알바생이었다.
혹시나 생략된 정보가 있나 싶어 다시 물었다.
“사진 봐봐.”
“여기.”
재진이 건넨 핸드폰엔 내가 아는 그 얼굴이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내 기억 속 송채은보다 조금 더 화려한 차림새를 했다.
SNS 유명인이 이런 건가.
“진짜 직업 없대?”
“음···. 들은 건 없는데···.”
“편의점 알바 안 하던?”
내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재진은 고개를 저었다.
“들은 적 없어. 연락하는 시간이나, 만나는 시간보면···. 알바를 하는 것 같진 않아. 보통 내 시간에 맞춰서 보거든.”
“너한테 맞춘다고?”
“응. 평범한 회사 다니는 사람이랑 연애하기 쉽진 않잖아···. 한쪽이 어딘가에 얽매여있으면, 다른 한쪽이 맞춰줘야 뭐가 돼도 되지 않겠냐.”
“그렇긴 한데···.”
또 하나의 다른 점.
과거의 재진은 송채은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기 바빴다.
정시퇴근이 불가능한 강력팀 형사에게 송채은은 최악의 여자친구였다.
새벽 세 시에 자신을 데리러 오라고 전화하거나, 주말 아침 대뜸 여행을 가자고 명령하는 식이었다.
주변 사람들마저 그들의 연애에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완벽히 보이는 주종관계였다.
“나한테 너무 잘 맞춰주니까 고마운 것 있지? 그래서 마음이 더 기운 것 같아. 계속해서 기울고 있고···.”
결이 다르긴 했지만, 어찌 됐든 재진은 송채은에게 흠뻑 빠진 듯 보였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다른 듯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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