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4 화 – 안개비 속의 존재들.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자한테 누군가가 봐준다는 것이 참 힘이 되고 고마운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제 34 화 – 안개비 속의 존재들.
토독. 토독─ 토도독──···.
회색 구름이 가득한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리아인과 류안의 여행용 마차는 숲속에서 드문드문 자리한 나무 중 잎이 무성한 나무 옆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고
나뭇잎에 맺힌 빗방울이 방울방울 흘러내리며 마차 지붕과 땅으로 떨어져 연주하듯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우비를 입은 리아인이 마차에서 내려와 말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보온 마법진이 새겨진 말 전용 우비를 씌워주고 있었다.
쌍둥이 네우가 어찌나 말들을 잘 챙겨달라고 부탁을 하면서 주던지 질리고 무서울 정도였었다.
부르르르르─······.
쌀쌀한 날씨 탓인지
그때 네우의 모습을 생각한 때문인지 순간 소름이 올라왔다.
할 일을 끝내고 마차 안으로 들어와 우비를 벗은 리아인의 눈에 ㄷ형태의 소파에 기대고 앉아 멍하니 마차 창밖을 보는 류안이 보였다.
평소에도 멍하니 있는 류안 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더 멍해 보였다.
‘비가 와서 그런가?’
역시나 쌀쌀하고 습한 날씨 탓이라 생각한 리아인은 마차 안에 있는 습도조절 마법 장치를 작동시킨 후, 간이 마법 화로에 주전자를 올려 물을 끓였다.
그 사이 류안의 무릎 위에 담요를 덮어주고는
삐익─♪ 소리를 내며 끓는 물로 따뜻하고 맑게 우려낸 차를 소파 중심에 있는 탁자에 올려놓고 류안 옆에 앉았다.
그리고.
“흐아··· 흐아─암.”
나른한 하품 소리가 났다.
그 하품 소리의 주인은 류안이 아닌
리아인이었다.
“후··· 나도 날씨 타나 보네···.”
혼자 말을 중얼거리던 리아인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뜨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이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감겼다.
스──···.
토독─. 톡. 톡.
조용한 마차 안
나지막한 숨소리와 함께 마차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만이 잔잔히 울려 퍼졌다.
“·········.”
마차 창밖을 보고 있던 류안은 고개를 돌려 잠들어 있는 리아인을 잠시 가만히 바라봤다.
완전히 잠이 든 것을 확인한 후,
살며시 소파에서 일어나서는 자신의 무릎 위에 있는 담요를 리아인한테 고이 덮어주고는 그가 깨지 않게 조용히 마차 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왔다.
보슬비는 어느새 안개비로 바뀌어 있었고
어둡고 음산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
류안은 마차 문을 조용히 닫고는
안개비 너머 풍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자,
희뿌연 안개비 사이로 흐릿한 형체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 ···사념체군.
“뒤틀린 자들의 사념체.”
모습을 드러낸 사념체들은 얼굴 혹은 몸통, 팔다리 등등 하나같이 형체의 일부가 기이하게 뒤틀려져 있었으며,
뒤틀린 기운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자들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무거운 적막이 흐르던 가운데
뒤틀린 사념체들은 모두 류안을 신비하게 바라봤다.
이제껏 자신들과 마주친 존재들은
인상을 구기며 두려움과 함께 혐오감을 드러내거나 겁에 질려 도망가기 일쑤였다.
심지어 퇴마하겠다고 설친 자들도 있었다.
결국에는 실패하고 도망갔지만···.
그러했던 자들과 다르게
자신들 앞에 가만히 서 있는 존재.
자신들의 뒤틀린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을 품고 있는 듯한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존재는 아무런 동요도 반응도 없이
그저 보이는 그대로 자신들을 무심히 바라봐주고 있었다.
토독. 톡. 톡─.
류안은 안개비와 나뭇잎에서 떨어진 빗방울로 인해 젖은 앞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런데,
긴 앞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며 드러난 얼굴은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분명 얼굴이나 모습은 그대로였으나
소년의 어린 티가 나지 않았다.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그 말과 동시에
류안으로부터 풍겨 나오는 미미한 기운을 느낀 뒤틀린 사념체들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놀란 듯 바뀌어 갔다.
다시 내려앉은 적막.
“할 말 없어?”
재차 들리는 류안의 물음에
뒤틀린 사념체들 맨 앞 가운데에 서 있는 사념체의 입이 움직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움직이는 입술을 읽으며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있었고
류안의 ‘방’에 더부살이 중인 ‘---’의 사념체도 뒤틀린 사념체의 입술을 읽었다.
· ∎∎∎ 신이시여.
· 우리들의 ∎∎∎을 없애주십시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의 사념체는 뒤틀린 사념체의 입술이 중간중간 일그러져 보이면서 말하고 있는 것 중 일부는 읽을 수가 없었다.
류안만이 그 입술의 움직임을 온전히 모두 읽을 수 있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
· 당신의 ∎∎∎으로 우리들의 ∎∎∎을 거두어 그자들이 ∎∎∎을 사용하는 것을··· 악용하는 것을 막아주십시오.
“하─아···.”
류안은 앞 머리카락을 넘긴 그 손 그대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것들이 뭘 알고 모여든 건가? 아니면··· 그냥 단순한 우연?’
지금 자신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념체들과 이 상황에 의문을 가지는 와중에
뒤틀린 사념체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고,
류안은 그 입술의 움직임을 읽었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 ∎∎∎ 신이시여,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젠장.’
신한테 하는 부탁의 주문.
류안은 목 옷깃에 달린 작은 붉은 브로치를 매만졌다.
그러면서도
이번에는 제대로 거절하리라 다짐했으나,
아직 거절의 요령을 터득하지 못한 탓인지 바로 거절하는 말이 나오지 않아 다른 방법으로 거절하기 위해 말을 했다.
“나한테 부탁하지 말고 직접 하는 것은 어때?”
뒤틀린 사념체 모두가 움찔거렸다.
‘직접’이라는 단어에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술렁이며 웅성거리는 것이 보였다.
류안은 그 모습을 보며
얼마 전 고목 나무 구멍 속에서 습득한 도롱이 벌레처럼 나무껍질들에 둘러싸여 있는 투명한 돌을 붉은 브로치의 아공간에서 꺼내 들었다.
‘가지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렇게 바로 사용하게 되네.’
류안은 저번 쇼트 때도 그렇고
단순한 우연이라기에는 얄궂은 상황에 씁쓸함과 찜찜함을 품으며 뒤틀린 사념체들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중간 운반책 역할까지는 해줄 수 있지만, 그 뒤는 너희들이 스스로 해. 싫으면 거절해도 돼, 난 상관없으니까.”
류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난 너의 말대로 ‘∎∎∎’신이지만 ‘□□□’이기도 해. 귀찮게 들러붙는 것들은 바로 ‘□□’해 버리면 그만인데, 어떻게 할래?”
류안은 말 그대로 할 생각이었고
뒤틀린 사념체들의 얼굴이 기이하게 뒤틀리면서 어떤 표정인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으나, 자신의 말에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뒤틀린 사념체들의 대표로 입을 열었던 사념체가 다시 입을 움직였다.
· 당신의 뜻 잘 알겠습니다.
“응?”
· 우리는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내 뜻? 무슨 뜻?’
· 또한, 저희에게 그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과 함께 뒤틀린 사념체 모두가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뭐지? 왜 이래? 무슨 기회? 무슨 감사?’
류안은 귀찮게 하지 말고 지들 일은 지들이 알아서 하라고 한 말일 뿐이었는데···
저 뒤틀린 사념체들이 뭔가 오해한 것 같았다.
오해를 풀어야 하나 했지만,
어찌 되었든 결론은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으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냥 넘어갔다.
류안은 손을 가슴높이로 들었다.
그러자 손위에 있는 도롱이 벌레처럼 돌을 둘러싸고 있던 나무껍질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와서는 주위를 맴돌고 흩날리면서 투명한 돌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맞혀
뒤틀린 사념체들은 하나씩 어두운색의 연기로 변하면서 투명한 돌에 스며 들어갔다.
류안은 살짝 당황했다.
뒤틀린 사념체들이 어디 있다가 나타나서 모여들었는지 처음 대면했을 때보다 그 수가 꽤 많아져 있었다.
투명한 돌에 저 많은 사념체들이 스며드는 것에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귀찮은 일에 엮이지 않으려고 한 행동한 것이 무색해지게 엄청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함이 강하게 스쳐 지나가면서 류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의 사념체는 다른 의미로 불길함을 느꼈다.
-대체 이 시대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류안은 ‘---’의 사념체 목소리에 설명했다가 왠지 쓸데없는 것을 알게 될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더 이상 귀찮아지기 싫어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의 사념체는 오히려 그런 류안의 행동에 이 시대에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또한,
오래전 일어났던 ‘대학살’이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예감했고
어쩌면 그 ‘대학살’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그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의 사념체인 자신이 이 어린 신과 만난 것이라고,
필연이라고 여겼다.
류안은 알았다면 기함을 토해냈을
‘---’ 사념체의 생각은 인지하지 못한 채 투명한 돌을 응시하고 있었다.
상당한 수의 뒤틀린 사념체가 모두 투명한 돌로 스며 들어갔고
돌 주위를 맴돌며 흩날리던 나무껍질들이 투명한 돌 속의 존재들을 보호하듯, 봉인하듯 둘러싸기 시작했다.
투명한 돌이 다시 도롱이 벌레를 닮은 형태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류안은 그 돌을 붉은 브로치 아공간에 넣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게 가리는 듯했던 안개비가 서서히 보슬비로 바뀌어 가면서
어둡고 음산한 기류도 사라져갔다.
류안은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고는
조심히 조용히 마차 문을 열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리아인은 아직 소파에 잠들어 있었다.
류안은 소파에 앉아 리아인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리아인은 따뜻한 그 손길에 천천히 눈을 떴다.
“어···? 언제 잠들었던 거지?”
리아인은 날씨 탓에 찌뿌둥해진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피며 마차 창밖을 봤다.
여전히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보슬비를 보던 리아인은 좀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아직 잠이 들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야─ 이런 날이 장대비 쏟아질 때보다 더 유령 나오기 좋은 환경인데···.”
리아인은 자신의 말이 실없다 느끼고 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나왔었어.”
“응?”
리아인은 동그래진 눈으로 류안을 봤다.
류안은 어린 티가 나는 소년의 얼굴로 미소짓고 있었다.
“······농담?”
“아니, 진짜.”
사념체도 어찌 보면 유령의 일종.
류안은 눈으로 호선을 그리며 장난기를 가득 담아 더 짙게 미소지었다.
오소소소────소─···.
류안의 말이 농담이나 거짓말이 아닌 진짜였음을 느낀 리아인은 손끝에서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소름에 질겁하며 두 팔로 몸을 감싸 안고 손으로 팔을 문질러댔다.
안 그래도 가끔씩, 종종 동양 귀신을 떠오르게 하는 류안의 검고 긴 머리카락과 날씨까지 한몫하는 바람에 소름이 더 극심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류안은 그런 리아인을 묘한 미소로 보다가
시간이 지나 식어버렸지만
리아인이 자신을 위해 타 준 차를 마시며 마차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해 나왔다.”
보슬비는 어느새 그친 상태로
하늘은 회색 구름이 걷히고 푸른색이 드러나면서 환한 햇살의 커튼들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 풍경은 한 폭의 명화와도 같았다.
리아인은 마차 밖으로 나와
말들한테 씌워졌던 우비를 거뒀고
머리 위로 비치는 반짝임에 고개를 들었다.
무성한 나뭇잎에 맺혀 있는 물방울들에 햇살이 반사되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리아인은 잠시 그 반짝임을 보다가 이내 눈이 부셔와 보던 것을 멈추고는
류안이 있는 은은한 어둠이 드리워진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차 문이 닫히자.
푸르르르───.
말들은 몇 번 머리를 좌우로 털고는 발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고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투명한 돌이 있는 장소로 향해갔다.
* * *
리아인과 류안이 떠난 장소.
그곳에 낡고 바랜 검은 로브를 입은 자가 스르륵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념체는 물론이고
뒤틀린 기운은 그 어디에도 없이 사라져 쾌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로브 두건에 가려져 입만 보이는 그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아직 때가 아니라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그때를 기약하며 리아인과 류안의 마차가 향한 곳을 잠시 본 그자는 이내 사라졌다.
* * *
마차 안에서 류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리아인과 자신이 잠시 있다가 간 장소에 어느새인가 일상이라는 듯이 변함없이 터울을 두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존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자의 행동이 별로 해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냥 관심을 끄고는
저녁 준비하는 리아인 옆에서 서서 구경하는 것에 집중했다.
리아인은 거창할 것 없이 밀키트 형식으로 준비된 재료들을 냄비에 담아 끓이기만 하면 되는 것을 눈을 말똥거리며 집중해 보는 류안을 보면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위해
이런 평범한 삶을 무슨 짓을 해서든 최선을 다해 지키리라 다짐했다.
또한,
자신이 선택한 ─한테 그 누구도 손 내밀지 못하게 지키리라 다짐했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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