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문#02 대만으로부터의 전언
자살하려던 남자. 그는 새로운 길을 걷게된다.
"역시 달걀 아저씨는 아는 게 진짜 많아요."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는 저렇게 자세히 설명을 안 해주시거든요."
"몰라서 안 하는게 아니겠지."
"잉? 알면 더 자세히 알려주셔야죠."
연희는 또 뾰로통해져서는 입이 삐죽하다.
"원래 엄마가 자기 집 애 교육하는 게 제일 힘들어."
"뭔 말이래..."
"... 그러게 뭔말인지 모르겠네. 암튼 너무 가까운 사람에게 깊이 이야기하는 게 좀 더 어렵다는거야."
"치잇. 그 솜털같은 시간동안 이야기를 천천히 해주면 될텐데..."
"지금까지 진심으로 연희가 할머니에게 궁금해하지 않았겠지."
"...음.하긴 그렇네요."
"할머니에게 진심으로 물어봐. 손녀에게 숨길 할머니는 없어."
"있을걸요. 우리 할머니요."
"....음..하긴 그렇겠다."
"요즘은 제 할머니인지 김구 선생인지도 모르겠어요."
연희는 후우 하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럴만하지.
요즘 욕쟁이 할머니는 거의 빙의된 상태로 계시니까.
좀 미안하긴 하다.
내가 잘 못 한건 아니지만.
평생을 준비한 큰 손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막은 거잖아.
근데.
자신의 딸이 죽고.
자신의 손녀까지 큰 손님에게 바치는(...) 그 걸 진심으로 하고 싶었을까?
요즘 들어 생각해보는 관점을 바꿨다.
어쩌면.
일부러 화내고 있는 척 하는 거 아닐까?
나에게 고마움을 숨기기 위해서.
그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모르겠다.
워낙 비밀이 많은 어르신이시라서.
"아. 음악이나 들어야 겠다. 이 아저씨 또 셜록 홈즈 빙의하시네."
"... 그..그런건 아닌데."
****
돌아가는 길은 이제 어둑어둑 하다.
제법 오래 달걀 동자 점집에서 머물렀나 보다.
새우깡을 주고 와서 인지 좀 심심하다.
바삭 거리는 그 느낌 좋았는데...
"아이고. 고도리 선생님. 저랑 어찌 이리 입맛도 비슷합니까.. 새우깡 잘 먹을게요."
피식.
엄청 맛있어하면서 새우깡을 먹던 달걀 아저씨가 떠올랐다.
그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왠지 동네 좋은 아저씨 같은 느낌.
주고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 이야기를 들었으니.
복채라도 주고 와야할 판이긴 하니까.
달걀 동자 아저씨는 큼직한 체형이면서도 리액션도 풍부해서 이야기할 맛이 난다.
그리고 가끔 느껴지는 삶의 깊이.
그에게 숨겨진 이야기가 궁금하긴 한데...
그건 언제든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에 소주라도 한 병 들고가서 못 먹는 술 한잔 하며 들어봐야지라고 생각했다.
"새우깡이 없어서 심심하시구만. 멍 때리시는 거 보니."
연희가 또 놀림으로 밀고 들어온다.
그래도 녀석.
어느 새인가 꼬박 꼬박 욕도 존대말로 하는 구나.
난 말없이 연희의 머리를 쓱슥 쓰담쓰담 해주었다.
****
"어?"
"오랜만이네요. 고도리 선생님."
"어?"
"오랜만이네요. 연희씨."
도착한 욕쟁이 할머니 점집.
반가운 손님이 도착해 있었다.
"준철아저씨. 어쩐 일로 여기까지?"
"긴히 드릴 말이 있어서 오늘 급히 들어왔어요. 한국으로."
바람에 살짝 흩날리는 옆머리.
그리고 지난번 보다 좀더 반짝이는 대머리.
그래도 한국에서 보니 좀 더 반갑다.
"덕분에 진급을 했습니다."
"아이고. 저희 쫓아내고 헬기 타고 가시더니 진급하셨군요."
"연희님도 참.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시라고 그런건데..."
준철은 호주머니에서 말보로 면세품을 꺼내들었다.
역시 공항에서 들어오면 담배를 사는 게 제일 이익이다.
"한 대 피우고 들어가실래요?"
"아. 좋죠. 안 그래도 들어가기전에 한대 피우려고 했는데..."
"아저씨. 들어가서 피우시죠. 고도리 선생님 방 앞에 흡연 장소도 있고, 그 방 안에 맛있는 커피 캔도 있거든요. 그쵸? 고도리 선생님?"
연희가 웃으면서 우리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그 녀의 장점.
아저씨들을 대하는 태도가 좋다.
틱.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스타벅스 캔.
3개를 들고 나왔다.
각각 캔을 따는 소리가 거의 동시에 났다.
"오. 역시 고도리 선생님. 비싼 캔 드시네요."
"아.쿠팡에서 사면 좀 싸요."
"아..아저씨들의 TMI군요."
치익.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길게 나간 연기가 산 쪽으로 불어 날아간다.
산의 반대쪽은 멋진 바다가 보인다.
그리고 밤의 부산 산복도로는 아름다운 빛들로 가득하다.
가난한 동네일수록.
원래 밤에는 아름다운 법이다.
그 경치를 바라보면 준철씨가 입을 열었다.
"여기 공기도 좋고 경치도 참 좋네요."
"네. 그거 하나는 최고죠."
"여기서 담배 한 대 피면 참 좋죠."
친한 친구는 아니지만.
힘겨운 일을 함께 한 동지.
그 동지를 오랜만에 만나서 좋긴한데...
굳이 한국까지 온 대만 경찰 김준철.
왠지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
"준철이 오랜만에 봤는데 왜 이리 폭삭 늙었어. 아이고. 눈 아파라 ..반짝거리는 빛 때문인거여? 왠 대머리가 온거여?"
준철씨가 들어와서 앉자마자 욕쟁이 할머니가 소리치신다.
맛있는 원두를 잘 갈아서.
맛있게 커피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르륵.
물을 부으면 검은 커피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이 과정을 거쳐야.
볶은 커피가 맛있는 커피가 된다.
"왜 여기까지 온 것이여? 이 썩을 넘아."
"이틀 전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준철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난감한 표졍을 지었다.
"혹시 뒤진겨? 그 년이?"
커피를 내리던 내 눈이 할머니에게 향했다.
할머니는 단호하게 준철을 쳐다본다.
"아..네. 죽었어요. 감옥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그 년. 결국 뒤져버렸구만. 병X 같은 년. 그리 고생하더니 결국..."
할머니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연희도 눈을 같이 감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눈을 떴다.
"이런..병X같은 년. 자살하면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는데 결국 거기 떨어져부렸네. 독한 년...그리고 불쌍한 년."
할머니는 눈믈을 살짝 비치신다.
일단 커피 한 잔이 완성되었다.
난 두 번째 잔을 넣었다.
그리고 물을 빙글 돌리면서 원 모양으로 붓기 시작했다.
원두를 내릴 때는 역시 둥근 원을 그리며 물을 부어야 커피가 맛있다.
"타이치 그 새끼랑 만나지도 못 할텐데..그리고 정원에서 기다리는 엄마랑 보지도 못 하는데..바보 같은 년..참 슬픈 삶을 살고 아픈 죽음을 당했구만."
슬퍼하는 할머니.
난 할머니에게 두 번째 커피 물을 부으며 말했다.
"타이치를 만나고 싶어서 지옥을 택한 것 같은데요."
"이 미친 소리 하는 겨! 네가 죽인 이무기 아니 타이치는 중간계로 떨어져서 다시는 나오지 못 하는 억겁의 벌을 받는거여. 그것도 모르는 년이 무당 짓이나 하더니만 자살해서 지옥가면 그래도 괴롭지만 벗어날 기회는 있으니... 영원히 둘은 만나지 못 해."
"아..그렇군요."
난 다시 조용히 두 번째 커피를 완성했다.
그리고 세 번째 커피 잔의 물을 내리기 전에 미리 뽑은 2개의 커피잔을 할머니와 준철 씨 앞에 놓았다.
"일단 커피 한 모급 드시면서 말씀 나누세요."
"고맙습니다."
"어따. 이 자슥. 커피 하나는 잘 내리지라. 지랄같은 놈이 재주는 제법 있어. 그치? 준철?"
준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제법 있는 정도가 아니죠. 아마 현 시대에선 사상 최강이실건데..거기다가 커피도 이렇게 잘 내리시네요. 커피 잘 내리면 머리 좋은 사람이라던데.."
"저 써글 놈이 머리가 좋았으면 지가 하던 게임 회사가 안 망했겠제. 그냥 운 좋은 병X이여. 커피라도 그나마 잘 내리니. 나중에 커피 장사나 하면 되겠구만. "
"어휴. 할머니. 참 그 이야기는...그만 하시죠."
연희가 화들딱 놀라며 말을 막아 선다.
"아냐. 괜찮아. 하나도 틀린 게 없는 말인데...뭘."
고도리 선생은 좀 쓴 웃음을 지었다.
다시 주르륵하고 커피 물을 원두 위에 부었다.
"근데 우리에게 편지를 하나 보냈어요. 죽기전에. 유언처럼."
"그래서 우릴 찾아왔구만. 왜 근데 우리에게?"
"정확하게는 우리가 아니라 고도리 선생에게."
준철은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고도리 선생을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고도리 선생이 아니라 큰 손님이겠제. 이 써글놈아."
할머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날 쳐다본다.
역시 다 알고 있구나.
내가 곧 큰 손님이고 큰 손님이 나라는 것을.
적어도 지금은 내가 그의 모습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세 번째 커피가 다 만들어졌다.
난 그 잔을 들고 연희 앞에 놓으면서 탁자에 앉았다.
"고마워요. 고 선생님."
연희가 고마움을 표했다.
"근데 여기까지 와야할 만큼 중요한 일입니까? 대만 경찰이 해결하면 안 되나요? 굳이 왜..."
난 준철에게 물었다.
"엄청난 편지라서요. 대만 경찰이 이해하기도 힘들기도 하고. 이건 그냥 경찰이 할 일이 아닌거 같아요. 핵폭탄이라도 필요할 거 같은 정도로 보여서..."
준철이 다시 머리를 긁적였다.
연희 할머니가 커피를 한 모금 드시고 그 편지를 낚아챘다.
욕쟁이 할머니의 손놀림은 참 재빠르시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눈으로 날 쳐다보고 이야기한다.
"이런 스벌넘들. 지옥의 문이라도 열린다는게여? 진짜?"
커피..이런걸로 내린다는겁니다. 머리 속에 그리시기 쉬우시라고..
댓글과 추천을 환영합니다. 여러분의 추천이 많아야 글이 잘 써져요..
- 작가의말
이렇게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네요.
지옥의 문이 열리는 것.
우째야 할까요....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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