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갈색인간 님의 서재입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SF

갈색인간
작품등록일 :
2018.07.25 18:44
최근연재일 :
2022.10.04 17:44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5,083
추천수 :
45
글자수 :
203,653

작성
18.08.14 09:44
조회
106
추천
1
글자
11쪽

4, 그대는 고요했다 - 4

DUMMY

"하하하, 하하하."


호연은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웃음이 세어나왔다. 말도 안 되는 드라마 속에서 갈등 사이에 휘말린 주인공 같았다. 집? 집이라고?


호연은 한참 앉아있다가 서랍을 열었다. 깨진 손거울 밑에 낡은 공책이 깔려있었다. 호연은 낡은 공책 위에 쌓인 먼지를 손으로 털어낸 다음 펼쳤다.


여러 메모가 적혀있었다. 카페에 들어가면 호연과 진애는 항상 공책을 낙서장 삼아 썼었다. 그때 주로 쓰던 공책이었다. 호연은 공책을 하나하나 넘겨가며 흔적을 찾았다.


언젠가 한 번 호연이 그녀의 집 주소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신나게 낙서를 하다가 공책에 그 주소를 적어주었었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아도, 그 행동이 아직도 호연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한참 공책의 낙서를 읽다가, 강남 변두리 쪽에 진애가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호연은 아랫입술을 씹으며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를 감을 생각도 없이 막 헝클어트리고 담뱃갑을 주머니에 구겨넣었다.


"택시!"


그가 외치자 한 택시가 멀리서 다가왔다. 호연은 부디 사람 택시가 아니길 바랐다. 지금 기분에 말을 건다면 쌍욕이 나올 것 같았다. 대낮부터 욕먹고 싶은 기사도 없을 것이고.


호연의 앞에 도착한 것은 로봇 택시였다. 호연은 세게 문을 닫은 뒤 도착점을 찍었다. 로봇은 그곳으로 간다는 말을 남기고 침묵을 지켰다. 호연은 숨을 몰아쉬며 핸드폰을 째려보았다.


'지금 가고 있어.'


호연은 준비하라는 듯이 메시지를 보냈다. 미리 밥은 먹어두라고. 밥 먹을 일은 없을테니까. 답장은 오지 않았다.


택시비가 계속 올랐다. 오르는 택시비에 비해 택시는 별로 가지 않은 듯 했다. 괜히 호연의 마음이 더 초조했다. 마음은 벌써 강남에 도착해 있었다.


"심장 박동이 좋지 않으십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호연은 창문에 떠 있는 홀로그램을 바라보았다. 건강체크 기계가 의자에 부착된 신형 택시였다. 가격이 빨리 올라가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담배와 술을 즐기는 거 치고는 꽤 괜찮은 몸 상태였다. 이 와중에도 건강을 살피는 자신이 참 대견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의사를 불러드릴까요?"


딱딱한 기계 목소리가 물었다.


"아냐, 됐어, 괜찮아."


호연은 자신의 건강이 표시된 화면을 옆으로 넘겼다. 광고창이 잔뜩 화면을 채웠다. 호연은 하나하나 넘기며 시간을 보냈다. 뭘 찾을 생각은 없었다. 잠시 정신을 돌릴 때가 필요했다.


택시에 무료 인터넷이 붙은 대신에 여러 광고들도 따라 붙었다. 대부분 정말 쓸모없는 광고들이었다. 선거철에는 그나마 꽤 쓸모있는 광고들이 떠 있었다. 물론 보지도 않고 넘겨버리는 광고였지만.


호연은 어느덧 강남으로 들어가는 택시를 네비게이션으로 볼 수 있었다. 창문 밖에는 낡은 건물들이 줄지어 들쑥날쑥 세워져있었다. 중간중간 재개발된 아파트 단지는 낡은 아파트 사이에 웅장하게 서 있었다. 아무리 몰락한 지역이라고 해도, 몇 구역은 살아있었다.


서울의 할렘가라지만 별로 다른 점은 없었다. 대신 눈빛이 매섭거나, 거칠어보이는 사람들이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이 돌아다닌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철제 담을 넘으면 달랐다. 같은 강남이지만, 재개발 된 구역이었다. 그곳은 경비업체의 경호를 받고, 사는 사람은 좀 더 젊고 세련된 사람들이었다.


안의 사람들은 과거의 강남을 벗겨낸 젊은 사람이었고, 밖의 사람들은 과거의 빛에 아직도 심취한 오래된 사람이거나, 빛이 사라진 강남을 손에 쥐기위해 찾아온 사람이었다.


호연은 솔직히 말하면 두 곳 다 살기 싫었다. 호연은 저 멀리 보이는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직도 익숙함이 눈에 선한 거리였다. 그 중 작은 빌라는 진애의 집이었다. 그녀도 강남의 빛에 아직 심취해있는 오래된 사람이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흡연 박스를 찾아보았다. 낡고, 유리가 갈라진 흡연 박스를 찾을 수 있었다. 차라리 밖에서 피우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흡연 박스 안은 청소조차 안 되어있었다. 호연은 땅에 흩뿌려진 듯한 담배꽁초를 밟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하늘에 하늘하늘 흩날리는 담배 연기에 옛 추억들이 떠오르지만, 검은 물감에 뒤덮인 추억들 뿐이었다. 전부 호연과 진애가 사이좋게 뿌려놓은 물감들이었다. 호연은 멍하니 진애가 사는 빌라 층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호연은 한참 건물 층을 바라보다가 옆을 보았다. 중학생 쯤 되어보이는 여자애가 서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었는데, 카라를 반쯤 풀어놓고 검은 브이넥티를 내놓고 있었다. 검은 브이넥티 바로 위로 동물을 그려놓은 목걸이 문신이 특이했다.


강남 안쪽 애들에게 유행하는 문신인 모양이었다. 여자아이는 히히 거리며 물었다. 장난이 가득 담겨있는 웃음이었다.


"담배 나눠줄 수 있어요?"


"폐 썩어."


"저희가 특별히 아저씨 폐 썩을까봐 그러는 거예요."


호연은 주변을 훑어보았다. 자신의 옆에 있는 흡연 박스가 꽤나 구석쪽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람들이 별로 지나다니지 않는 길이었다. 흡연 박스 뒤에 있던 남자가 슬그머니 나와 호연의 길을 차단했다.


"대단하다, 너희들."


호연은 비실비실 웃으며 여학생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여학생은 그럴수로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슬금슬금 더 기어나오는 남학생들이 눈에 보였다. 포위된 상황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이거면 되는 거지? 좀 바빠서 가도 될까?"


호연이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지갑에는 택시 타고 남은 잔돈이 두둑했다. 학생 때도 안 당한 갈취인데, 나이 먹어서 잔돈을 빼앗기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호연은 주머니에 있던 찌그러진 담뱃갑을 꺼내 흔들며 물었다. 주변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비웃음 살 만 했다.


"이 아저씨 진짜 웃긴다."


"지갑도 나눠줄 수 있어? 아니, 혹시나 해서 묻는 거야."


"아저씨, 구차하게 굴지 말고. 우리가 원하는 거 알잖아요?"


호연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웃고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주위에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어떻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수가 없었다. 호연은 모든걸 포기했다는 듯이 지갑이 들어있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상대가 아무리 학생이라도 많은 수를 앞에 두고 으르렁 거릴 수는 없었다.


"야, 거기서들 몰려서 뭐해!"


멀리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은 놀라 그곳을 바라봤다가, 짧은 욕을 내뱉으며 급하게 도망쳤다. 호연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적응할 수 없었다. 한 무리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호연은 지갑이 있는 뒷주머니에서 손을 넣은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이들이 조금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먼저 사과의 말씀을 드리죠."


손을 뻗은 사람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의 중년 남자였다. 실제로 보지는 않았지만, 멀리서 바라봤던 남자였다. 호연은 악수를 하며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아, 제 소개를 드리자면, 강민석 박사라고 합니다."


강민석 박사가 턱짓을 하자, 그의 옆에 있던 덩치 큰 남자가 호연에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호연은 명함을 한 번 보고난 후 TV 속 남자를 완벽히 떠올렸다. 외계생물학자 강민석 박사였다. 지금은 외계 생물 찬양교라는 범죄 조직의 교주였다.


"형제 분은 이름이 어찌 되십니까?"


호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우를 몰아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건만, 호랑이가 바로 앞에 와 있었다. 어쩌면 이 호랑이는 적당히 말만 잘하면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우진이라고 합니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억나는 것이 이우연과 비슷한 이름 뿐이었다. 호연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이름을 겨우 숨겼다.


"기억해두겠습니다. 언젠가 한 번 찾아오시죠."


강민석 박사는 환하게 웃으며 또다시 악수를 건넸다. 호연이 마지못해 그 악수를 받자, 민석 박사는 무리와 함께 호연의 옆을 지나갔다. 배가 부른 호랑이였던 걸까? 호연은 껄끄러운 느낌을 숨길 수 없었다.


호연은 아무 문제 없이 떠난 민석 박사를 뒤로하고 진애의 빌라로 급히 발을 옮겼다. 또다시 아까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다른 것보다, 이 강남을 빨리 뜨고 싶었다.


'지금 네 집 앞에 도착했어.'


호연은 진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빌라 건물 앞에서 빌라를 올려다보았다. 여러 일이 곂친지라 분노는 이미 가라앉은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다시 분노가 피어오를 것 같았다.


'곧 나갈게.'


진애에게 답장이 왔다. 호연은 담배를 입에 물고 진애의 발소리를 기다렸다. 담배를 반 피우기도 전에 진애의 발소리가 들렸고, 반을 피우자 진애의 신발이 보였다.


"알고 있었지?"


진애가 다 내려오기도 전에 호연이 담배를 발로 밟아 끄며 말했다. 진애는 아무 말도 안 하고 호연을 째려봤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세게 쳤다.


"다들 미쳤어. 서류상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사람을 단번에 쓰레기 취급을 할 수 있어? 그것도 몇주 전에 죽은 사람이야. 근데 이제와서 새로 생긴 종교에 이름 하나 적혀있다고 이 반응을 보여?"


진애는 호연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왜 너까지 그러는데. 아무리 우리가 너한테 더럽고 끔찍해도, 그렇게 더럽지는 않아, 알아? 뭐가 좋다고 성진이가 범죄 조직에 가담해? 내가 뭐가 좋다고 성진이가 범죄 조직에 들어간 걸 숨겨줘. 뭐가 좋다고, 대체!"


진애는 그의 멱살을 놓고 돌아섰다. 호연은 축 처진 어깨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남자친구를 잃은 그녀의 어깨는 상당이 좁았다. 물론 그만큼 호연의 어깨는 더 좁았다. 여자친구와 친구를 잃었던 그의 어깨는 좁았다.


"어떤 경찰들도, 기자들도 우리의 결백함을 믿지 않아. 오히려 없던 사실을 만들어서 자극적으로 내보낼 뿐이지."


진애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호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목 뒤에서 강한 충격이 왔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진애의 비명이 호연의 귀를 강하게 때렸다. 호연은 남은 정신중 하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몽상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작가의말

오타, 문법 오류 지적 부탁드립니다. 뭔가 지치는 달이네요. 벌써 8월의 허리춤을 붙잡고 울고 있습니다. 가늘어지는 여름의 더위가 사람을 죽이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프롤로그 조금 추가 했습니다. 18.08.26 49 0 -
공지 소설 장르를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18.08.25 58 0 -
공지 안녕하세요, 연재 일 수를 조정하려 합니다. 18.08.16 62 0 -
47 7, 크레이터 - 2 22.10.04 8 0 10쪽
46 7, 크레이터 - 1 20.02.14 23 0 12쪽
45 6, 파란 장미꽃 - 10 20.02.14 18 0 10쪽
44 6, 파란 장미꽃 - 9 20.01.17 23 0 9쪽
43 6, 파란 장미꽃 - 8 20.01.03 24 0 10쪽
42 6, 파란 장미꽃 - 7 20.01.02 22 0 10쪽
41 6, 파란 장미꽃 - 6 19.12.30 29 0 10쪽
40 6, 파란 장미꽃 - 5 19.12.24 25 0 10쪽
39 6, 파란 장미꽃 - 4 18.09.15 54 0 10쪽
38 6, 파란 장미꽃 - 3 18.09.10 85 0 10쪽
37 6, 파란 장미꽃 - 2 18.09.08 60 0 9쪽
36 6, 파란 장미꽃 - 1 18.09.05 109 0 10쪽
35 5, 달콤함 - 6 18.09.03 90 1 14쪽
34 5, 달콤함 - 5 18.08.31 91 1 9쪽
33 5, 달콤함 - 4 18.08.29 114 1 10쪽
32 5, 달콤함 - 3 18.08.27 104 1 9쪽
31 5, 달콤함 - 2 18.08.24 92 1 10쪽
30 5, 달콤함 - 1 18.08.22 75 1 10쪽
29 4, 그대는 고요했다 - 7 18.08.20 102 1 10쪽
28 4, 그대는 고요했다 - 6 18.08.17 106 0 10쪽
27 4, 그대는 고요했다 - 5 18.08.16 93 1 10쪽
» 4, 그대는 고요했다 - 4 18.08.14 107 1 11쪽
25 4, 그대는 고요했다 - 3 18.08.09 111 1 11쪽
24 4, 그대는 고요했다 - 2 18.08.05 94 1 10쪽
23 4, 그대는 고요했다 - 1 18.08.03 100 1 9쪽
22 3, 당신이라는 사람 - 5 18.08.03 136 1 13쪽
21 3, 당신이라는 사람 - 4 18.08.01 101 1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