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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1 영진이네 아버지

#1 영진이네 아버지

*지금도 절친인 고등학교 친구 얘기. 영진아, 허락해주니 고맙네, 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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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께 반바지 사 드리면 어떠냐고 영진이 아내가 시누이에게 물어봤습니다. 안 입으실 거라고 시누이는 대답했습니다. 영진이 아버지는 영진이와 마찬가지로 목욕탕 한번 안 가셨습니다. 영진이가 고등학교 때 방문짝을 칼로 찍어대며 아버지 나오라고 쇳소리 지를 때도 아버지는 조용히 계셨습니다. 오랜 불교 집안에 그렇게 치성드렸는데, 세 살 때 내 큰아들 놈 소아마비 만들어 놓고 이게 무슨 일이더냐고, 마흔 다 돼 장가가던 영진이는 연신 바지를 추키며 그런 말을 다 해주었습니다.


벌써 30년 전이네요. 영진이 장가 갈 때 제 일기장에 써둔 얘기였습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소아마비를 많이 당했는지. 우리 베이비부머 세대 말이죠. 광진구 정립회관도 그때 세운 것입니다.

영진이네가 살던 집은 종로구 창신동이었습니다. 알다시피 창신동은 산동네입니다. 다리가 불편했음에도 영진이는 비탈에 익숙했습니다. 어머니가 아무리 말해도, 아버지가 한번도 업어준 적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집에서 봉제 일을 하셨습니다. 고단한 밤이면 언덕의 많은 아비들이 취해 노래했습니다. 하지만 영진이네 아버지는 술도 안 마시고 조용히 사셨습니다. 팝송을 좋아하던 영진이는 그곳을 해뜨는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래, The Animals The house of rising sun 흐른다)

 

아버지는 개성에서 월남한 분입니다. 겨울 어느 날, 마루에 앉아 달을 보며 말하셨죠. 어린 시절 놀았다는 큰 기와집 툇마루 뜰, 인삼밭, 선죽교 그리고 외삼촌이 끌려갔다는 공안소 건물...그 날 얼어붙은 임진강에 뛰어들고, 파주 지나서 홍제 고개 넘던 일. 끝내 통일이 안 되면 임진강에 뼈라도 뿌려달라며 아버지는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말하셨죠.


저렇게 말도 잘 하는 분이. 그러니 아들놈이랑 말도 좀 하면 얼마나 좋아. 꿈이랄 게 뭐 있나.“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소주라도 한잔하시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술 근처에도 안 가셨습니다.

순했던 영진이는 청춘이 되며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성치 못한 내 다리여, 그렇다면 손아, 대신 말해다오! 영진이는 젓가락 던지기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젓가락이 팍팍 꽂혀가자, 영진이는 악당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친했던 나를 보는 눈도 살벌해졌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며 모든 것이 부질없어질 때쯤 지독히 외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 나는 귀신일지도 모른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까지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게 마흔 다 돼가던 어느 날, 같은 동네로 이사 온 한 여인을 보고 홀딱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녀도 마흔 다 돼가는 노처녀였습니다. 그녀에게 결국 고백했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능력 없는 것들이 가족을 꾸리는 건 죄악이다! 알고 보니 부모님 일찍 돌아가셔서 부모님에 대한 원망도 컸던 그녀였습니다. 수차 사랑을 고백했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녀는 앞으로도 계속 혼자 살 거라는 말만 했습니다. 그래 나는 안 되는가 보다, 차라리 죽자. 영진이는 걸어걸어 제1 한강교로 갔습니다. 그러나 영진이는 죽지 못했습니다. 골로 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영진이는 감옥 갈 각오를 하고 다시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훔쳤습니다. 입술을 도둑 당한 그녀가 따귀를 올려붙였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영진이가 넘어지며 그만 와르르 언덕 아래로 굴렀습니다. 얼굴과 다리가 깨졌습니다.

멀리서 내려보던 그녀가 말했습니다.


많이 다쳤나요? 이리 와봐요...”


그때, 골목길 어느 집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노래, Bee Gees Don't forget to remember가 흐른다)

 

영진이는 말했습니다.


내 다리가 아파서 당신께 더 다가갈 수 없습니다. 다만잠시 거기 서 계셔 주신다면당신이 이리로 오게 할 자신은 있습니다


영진이가 라디오 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마법처럼 그녀가 다가와 영진이를 일으켰습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커피나 한잔 하시죠,”


웃픈 드라마가 끝나고 둘은 결혼을 했더랍니다.


시간은 흘러 귀하게 얻은 딸이 무럭무럭 자라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영진이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손녀가 시중들어줄 때가 된 건데.

영진이 아버지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분입니다. 눈물은 원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영진이가 고등학교 때 아버지에게 그래, 아무도 원망 안 해. 안한다고...”라고 울부짖을 때 아버지는 말씀했습니다.


네 울음이 원망이다. 창자를 끊는 그 울음이 원망 아니고 뭐겠느냐...다 내 잘못이다...”

아버지가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매일 대문 밖을 바라보고 앉아 눈물을 닦아 내셨습니다.

당신이오? 당신이야?”

하루 이틀, 이제 진지도 거르기 시작했습니다. 눈발 날리는 부엌에서 손 호호 불어가며 밥을 짓던 아내, 힘들 때 가장 힘이 되어주었던 아내, 모질게 젓가락 연습하던 영진이를 보며 미어지던 아내. 일 년 후, 아버지는 결국 어머니 따라 하늘로 가셨습니다.

가족은 유언대로 아버지를 임진강에 뿌려드렸습니다. 그날 임진강까지 함께 해준 고향 친구분이 말했습니다.

같이 월남할 때, 네 아버지가 다친 동생을 업어 게지구 여길 건너는데... 결국 동생이 총맞았디... 대신... 네 아버지가 살았지 않겠네?”

이 무슨 말인가... 하지만 그 말에도 영진이는 울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날 이후 웃음이 난 적도 있었습니다. 미친 걸까? 내 인생 분노와 남 탓 일색으로 완전히 오관이 봉쇄되어 버린 때문 아니었을까? 알 수 없도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정말 독해, 어떻게 눈물 한 방울 안 흘려? 그렇게 당신이 속 썩이고도...”

십 년이 지난 후, 이제 유학 가는 딸을 따라 아내도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혼자 밥해먹고 혼자 자는 환갑 다 된 기러기 아빠였던 것입니다. 휴일에 공원 산책 하는 게 낙입니다. 공원에는 부모님 연세쯤 되는 분들이 주욱, 항상 앉아 계시죠. 할아버지들은 장기를 두거나, 그저 굽은 등으로 안경을 닦거나. 할머니들은 아직도 화산 같은 수다 삼매경이고요.

그렇게 산책하던 어느 휴일, 이제 집에 돌아가려 잠시 벤치에 앉았는데, 갑자기 눈물 한 방울 톡...또 한 방울 쪼록..., 이젠 주룩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에이 괜히 아내 때문인 줄...아니 아이가 보고 싶어서 그런 줄...아니었습니다.

공원 벤치에서 하얀 머리에 산타처럼 빨간 모자를 쓰고 안경 닦고 계시던 분, 그분이 등을 돌려 영진이를 보았습니다. , 아버지와 너무 똑 같았던 것입니다. 그분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영진이 흉내라도 내듯 왼다리를 절뚝이며 멀어져 갔습니다.

...아버지...”(2)

장마철 하수구 물 빠지는 소리처럼 끼익끼익 기이한 소리를 내더니, 영진이가 드디어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 아버지가 저렇게 나타나시는구나...”

사람들이 놀라서 달랬습니다. 영진이가 소리쳤습니다.

비켜, 이 사람들아, 때로는 달래지 말아야 할 슬픔이 있는 것이다. 그저 충분히 슬퍼해야만 하는 슬픔이 있는 것이다!”

이때, 임진강에 오셨던 아버지의 고향 친구분 말이 귓가에 울려왔습니다.

니를...잘 업어주셨네?”

전혀요..”

죽으니끼니...그거이...당신이 업어주머는 죽으니끼니...기래 기런기야...”

 

(노래, The Hollies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울린다)

 

영진이는 곧바로, 자동차를 몰았습니다. 부앙-.

출렁출렁...임진강은 아직도 잘 흘렀습니다. 다시 통곡이 시작되었습니다.

다 울고 난 영진이가 살풋 잠이 들었는데, 꿈에 영진이 자신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항상 그렇듯 절뚝거리며 가는데, 그 등에.......아버지가 업혀있었습니다. 영진이는 잠결에 웅얼거렸습니다.

사랑한다, 나의 아비여...형제여...당신과 걸음걸이가 비슷해진 나를 존경한다. 당신과 똑 같아진 얼굴을 나는 보며 나는 매일 웃는다. 아비여. 나의 아비여...형이여...잘가오, 아비여...”.

이에 등에 업힌 아버지도 입을 열었습니다.

영진아, 안 무거우냐?”

...안 무거워요, 아버지...우리 아버지인데요...,”

일주일 후, 크리스마스를 맞아 영진이 아내와 아이가 잠시 귀국했습니다. 거리엔 막바지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영진이는 가족의 손을 잡고 옛 집 언덕으로 갔습니다. 실로 오랜만이었습니다. 살던 집터엔 리모데링한 독특한 식당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달을 보던 겨울 마루엔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고 있고요. 아내와 딸이 주문하는 사이, 영진이가 잠시 나와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 일 이후로 아버지가 꿈에 자주 나타나신다고. 오늘 아침에도 나타났다고. 아버지한테 이런저런 이야기 다 해드렸다고. 물가 오른 거랑, 주식 판 거랑 다. 나는 말해주었습니다. “오마나...영진이네 아버지 꿈이 이뤄졌네?”


영진이 아버지는 모든 걸 가질 수 있었지만, 영진이 없이 갖는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영진이 아버지는 모든 걸 할 수 있었지만, 영진이 없이 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영진이 아버지는 모든 걸 꿀 수 있었지만, 영진이 없는 꿈은 한 번도 꾼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꿈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걸어라, 영진아. 걸어라, 이 자식 영진아.같이 걷자꾸나!


여러분, 섣달그믐입니다. 영진이네처럼 좋은 꿈 많이 꾸고, 행복한 새해 맞으십시오.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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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일상 | #1 영진이네 아버지 2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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