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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수호자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12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1.06.1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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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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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8쪽

안개빛 희극 (9) 카이 바르도나

DUMMY

카이 바르도나는 투명한 술이 담긴 나무잔을 조용히 입으로 가져갔다. 적당히 시원한 술은 답답한 카이 바르도나의 속을 달래주었다.


카이는 작은 의자가 딸린 나무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드넓은 계곡이 훤히 보이는 곳이었다. 밤늦게까지 이어진 전투의 후유증을 다스리는 병사들이 보였다. 계곡 아래로 새벽이 만든 핏물이 강이 되어 흘러내렸다.


“꼭두새벽부터 이런 곳에 계시는군요.” 카신이 말했다. 족장의 오른팔은 천천히 다가와 맞은 편에 앉았다.


카이는 늙은 호랑이에게 잔을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카신.” 카이는 카신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카신은 투명한 술을 천천히 음미했다. 늙은 호랑이에게는 너무 부드러운 술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카신은 깔끔히 잔을 비웠다.


카이는 잔을 홀짝이며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꽤 수월한 전투였더군요.” 카이가 말했다.


“생각보다 싱거웠지요. 지켜보고 계셨습니까?” 카신이 물었다.


“예, 처음부터 지켜보았지요. 전장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명을 제대로 수행했습니다.” 카이 바르도나는 언짢은 듯 혀를 찼다.


“그렇게 말씀하지 마십시오. 족장께서 도련님을 위해 내린 명령이지 않습니까?” 카신이 말했다.


카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를 위한 일이라고요? 퍽 그렇겠어요.” 카이는 실소를 뱉었다.


“족장께서는 항상 도련님을 걱정하십니다.” 카신이 미지근한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걱정? 진정으로 제가 걱정된다면, 전장으로 저를 몰아붙였겠지요. 아버지는 그저, 저를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카이가 소리쳤다.


“도련님···.” 카신은 슬픈 눈빛을 띄웠다.


“아, 죄송합니다. 카신.” 카이는 정신을 되찾았다. 카이는 머리를 수차례 흔들었다.

“그냥, 전장의 이야기나 하지요. 어제의 전황은 어떠했습니까?” 카이가 물었다.


카신은 스스로 자신의 빈 잔을 채웠다. 늙은 호랑이는 천천히 투명한 술을 음미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어제의 전황도 평소와 같았습니다. 딱히 어느 한쪽이 열세였던 곳도 없었고, 고비라고 이름 붙을만한 위기도 없었습니다. 개전 이후 우리는 적들을 완벽히 압도하고 있지요.” 카신이 말했다.


“일방적인 승리···인가요.”


“제국의 대장군이 이끄는 병사들치고는 꽤··· 싱거웠지요.” 카신은 말끝을 살짝 흐렸다.


카이는 늙은 호랑이의 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뭔가 탐탁지 않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카신은 천천히 나무잔을 들이키곤 다시 입을 열었다. “전투라고 일컫기에는 단순했습니다. 대장군이 이끄는 병사들은 뭔가 이상했습니다. 그들의 칼날에는 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요.”


“역시···. 그랬군요.” 카이가 말했다.


“역시라니···?”


카이 바르도나는 가졌던 추측을 꺼냈다. “저들은 패배를 연기하며, 우리를 유인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도련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카신이 말했다.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저 전장을 지켜보기만 한 제가 알아챌 정도로 차이가 극명했으니까요.” 카신은 대답 대신에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카이 바르도나는 다시 자신의 잔을 채웠다. “아버지께서는 눈치를 채고 계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표정을 읽는 취미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족장께서는 평소와 같아 보였습니다.” 카신이 말했다.


카이 바르도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와 얘기해봐야겠어요.” 카신을 그 자리에 버려두고, 카이 바르도나는 탁 트인 언덕 아래로 향했다.


혈투가 만들어낸 피로 물든 강을 따라, 카이 바르도나는 계곡을 내려갔다. 까마귀들이 어젯밤의 상처가 남긴 시체들에 달라붙어 있었다. 카이 바르도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그 옆을 지나갔다.


임시로 구축된 진지에는 아직 전장의 온기가 남아있었다. 어제의 노고를 다스리는 병사들 사이로, 카이 바르도나는 아버지의 처소로 향했다.


가죽과 짚으로 가볍게 엮인 족장의 막사 앞에는 경비 하나가 홀로 있었다. 어깨에 사슬을 걸친 경비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카이 바르도나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아버지는 안에 계시나?” 카이 바르도나가 물었다.


경비는 카이 바르도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경비병이 말했다.


“잠시 실례하지.” 카이 바르도나는 경비를 격려하고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간이막사 구석에는 작은 나무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탁자 위에는 조그만 술병이 있었다. 단출한 내부의 가장자리로 거대한 나무 침상이 보였다. 침상에는 아버지가 뒤를 보며 옆으로 누워있었다.


카이 바르도나는 아버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카이는 아버지의 성격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발소리를 줄였다.


“카이냐···?” 모한 바르도나가 뒷모습으로 말했다.


“예, 아버지. 카이입니다.” 카이 바르도나가 공손히 말했다.


“그래, 어쩐 일이냐?” 모한은 여전히 누운 채로 말했다. 침상에 누운 거대한 덩치는 주변에 위압감을 뿜어냈다.


카이 바르도나는 차분하게 단어를 선택했다. “최근의 전황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카이가 말했다.


“내게 조언하려는 것이냐?” 카이의 말이 모한의 심기를 건드린 듯했다.


카이 바르도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뇨. 아닙니다, 아버지. 그저, 전황에 의문점이 있기에 대답을 구하러 온 것입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였다. “그래. 그럼 어디 한번 얘기해 보아라.” 모한 바르도나가 말했다.


“최근, 우리 군은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얀 호랑이의 우수함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저는 한 가지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저들의 패배는 거짓일지도 모릅니다.” 카이가 말했다.


“흠···.” 모한은 크게 심호흡을 하며 거대한 덩치를 일으켰다. “카신이 말하더냐···?” 모한 바르도나가 물었다.


“아뇨, 아닙니다. 카신에게는 그저 확인했을 뿐. 이 주장은 저의 것입니다.” 카이는 기죽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모한 바르도나는 탁자에 놓인 술병을 들이켰다. “그래서?”


“예···?” 카이가 되물었다.


“잔말 말고 본론을 꺼내라, 카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모한 바르도나가 말했다.


“저들은 패배를 가장해 우리를 유인하고 있습니다. 저들의 뻔한 술책에 당해서는 안 됩니다.” 카이 바르도나는 지지 않고 주장을 펼쳤다.


모한 바르도나는 인상을 구겼다. “그것이 전부더냐?” 아버지가 물었다.


“···예, 아버지.”


아버지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저놈들이 어떤 술수를 펼치든 내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얀 호랑이는 최강이야. 어떤 상대든 어떻게 어디서 싸우든, 하얀 호랑이는 반드시 승리한다.” 모한 바르도나가 말했다.


모한의 오만에 카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만, 아버지···.”


“신경 쓰지 마라. 이것은 네 싸움이 아니다. 지켜보며 전장을 익히거라, 카이 바르도나.” 아버지가 말했다.


카이는 주먹을 쥐며 모한 바르도나를 노려보았다. ‘···제길.’ 카이는 아버지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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